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00화 (600/741)

599화

노보시비르스크.

시베리아 남서에 있는, 러시아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큰 도시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길목으로 처음 생겨나 역사는 짧지만 시베리아 개발과 함께 급격히 발전했다.

그 노보시비르스크의 근처에 있는 톨마초보 국제공항에 도진이 천마신교의 사람들과 함께 발을 내딛었다.

평소와 달리 도진은 정장 무복을 차려입었는데 겉옷을 벗으면 세미 정장 스타일이었고 겉옷, 그러니까 금실로 용을 수놓은 코트 타입의 곤룡포를 입으면 무복에 가까운 스타일이다.

웨일스 후작이 소유한 프리미엄 브랜드의 단 하나뿐인 맞춤 제작이다.

그 우측에는 전문성이 돋보이는 깔끔한 정장에 두꺼운 패딩 코트를 입은 오성아가 서고 뒤로 이번 일을 위해 선별된 전문가들이 함께 했다.

그리고 좌측에는 170에 이르는 늘씬한 키에 표범을 연상케하는 탄탄한 몸을 이국적인 디자인의 무복으로 감싼 바할라의 정예 무인, 왕실타격대 엑소시아 소속의 리쉬라가 투마전의 무인들과 함께 섰다.

마지막으로.

냐아앙-

도진의 어깨 위에 앉은 새하얀 털뭉치, 솜이다.

결국 솜이까지 함께 온 것이다.

-러시아?

-하아아아악-!

솜이는 러시아라는 단어에 전에 없을 만큼 크게 반응하였다.

그 단어에 크게 반응할 만큼, 무언가가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에 관하여 도진은 대번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어떻게 천산설표의 새끼들만이 환경적으로도 맞지 않는 한국에 흘러들어왔던 것일까.

과거 천산설표와 관련한 사건이 터졌을 때 도진이 가졌던 의문.

그때 떠올렸던 가능성 중 하나인 '밀렵'이었다.

러시아라면.

특히나 사람이 살지 않는 혹한의 넓은 땅이 있는 시베리아라면 발견되지 않은 천산설표가 있을 법하다.

어쩌면 솜이는 러시아에서 밀렵꾼들에게 잡혀 한국으로 흘러들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낮은 가능성이라 어디까지나 생각만 했던 것인데 솜이의 반응으로 인해 조금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다.

-솜이야. 같이 갈래, 러시아?

-냐아아앙!!

도진의 물음에 솜이는 아주 강력하게 어필하였고 결국.

-냐아아앙.

'너, 너무 귀여워…….'

차마 시선이 많은 공간이라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눈으로 그리 말하는 오성아의 열렬한 시선을 받으며 도진의 어깨 위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나중에 호텔 가면 같이 놀게 해 드릴게요.

-오늘 일 열심히 할게!

전음과 섭음술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도진이 주변을 훑었다.

감각을 통하여 보이고 들리는 대부분의 말과 글이 러시아어다.

러시아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기초적인 러시아어라도 배우고 가는 게 좋다던 인터넷에서의 조언이 과연 틀리지 않은 듯 보였다.

러시아 출장이 정해진 뒤 벼락치기를 하긴 했는데, 주변에서 들리는 말 대부분이 해석되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실전에서 써먹기엔 모자란 것 같다.

허나 그 부분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으니 일행 중 러시아어에 통달한 인재들이 있었고.

"어서 오십시오, 소천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성의 노보시비르스크 지사에서 나온, 이번 출장에 동행할 역시나 러시아어에 통달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예."

도진이 웃으며 손을 내미니 기다리고 있던, 엘리트의 분위기가 팍팍 풍기는 직원이 공손히 그 손을 잡았다.

"차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그의 안내에 따라 공항을 나가니 대번에 눈에 띄는 커다란 SUV가 있었다.

고급스러운,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야성적인 디자인의 대형 SUV다.

그 SUV를 타고 눈이 펑펑 내리는 도로를 달려 오성의 지사가 있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진입했다.

'흐음.'

시베리아하면 보통 혹한의 새하얀 벌판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인데, 이곳 노보시비르스크는 물론 엄청나게 추웠고 눈도 펑펑 내리고 있었으나 크게 발전한 대도시로서의 면모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을 보며 나지윤이 정리해 준 자료를 되새긴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사자군 오군성의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 준 상징적인 도시야.

시베리아의 발전 기류에 타고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 성공시킴으로써 오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한 수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 배경의 오성 노보시비르스크 지사는 도시의 중심에 솟은 거대한 빌딩을 통째로 쓰고 있을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

그리고 그 지사의 2인자인 부사장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6도를 넘는 곳에서 단정한 양복만을 차려입었으나 추워 보이지 않을 만큼 형형한 존재감과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중년 남성.

현지화를 위하여 사장은 가능하면 현지의 인물로 둔다는 사풍(社風)이 아니었다면 사장이 되었을, 오군성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다.

설원 위에 선 사자를 연상케하는 대단한 그를 마주하여, 도진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설 부사장님."

설강호. 무인으로서도 초절정의 무위를 이룩하였으며 사업가로서도 오성의 러시아 지사 2인자로 오군성의 신뢰를 받는 인물.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이에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는.

"예, 반갑습니다. 소천마."

젊은 소천마의 손을 고개 숙여 인사하며 받았다.

"……!"

"……!!"

그를 잘 알고 있는 지사 사람들의 눈에서 파문이 일며 놀람이 번진다.

허나 그들 또한 곧,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소천마의 존재감에 가슴 속 깊이 설강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저기 설 부사장과 악수하고 있는, 잔잔하게 웃고 있는 소천마는 차원이 다른 영역에 있는 인간이다.

나이나 신분을 논하기 이전에 그 존재감부터가 완전히 다름을, 본능의 영역에서 깨닫고 또 이해한 것이다.

이는 도진이 일부러 그들이 그것을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군성을 통하여 이미 들었다.

오성이라는 회사의 특성상, 특히 러시아 지사는 그런 식으로 '서열 정리'를 해 두지 않으면 잡음이 생길 수 있다고.

도진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문제를 겪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렇게 초면에 정리를 한 것이다.

물론 추후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냐도 중요하겠지만 그 부분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오성아를 필두로 한 화온의 인재들과 리쉬라를 필두로 한 투마전의 무인들이 함께 왔으니까.

업무 능력에 있어 그들이 모자람을 보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도진이 웃으며 설강호에게 말했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 * * *

러시아 전체가 혹한의 환경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허나 사실 러시아의 영토는 워낙 넓어 춥지 않은 곳도 있다.

"중요한 건 러시아의 많은 영토가 실제로 혹한의 환경에 있으며, 개중엔 정말로 좋지 않은 환경의 땅이 적지 않다는 것이지요."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해야 하는 인터넷은 물론이요 의식주조차 '투쟁'을 통하여 충족해야만 하는 환경에 사는 사람들.

"우리는 거기에 집중하였습니다."

'라스푸티차'라는 단어가 있다.

차량은 감히 다니지도 못할 '뻘'로 변해 버린 도로를 뜻하는 단어다.

그런 도로조차 한참을 지나가야 있는,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 터지지 않지만 사람이 사는 마을도 있다.

오성은 그런 곳에까지 물류를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를 깔고 그런 곳에서도 쓸 수 있는 물건을 팔았다.

현재 러시아에서 오성이 자국 기업 이상으로 지지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규제도 자금도 아닌 흑도였습니다."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아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개중 특히 골머리를 썩혔던 것이 흑도였다.

전화조차 제대로 터지지 않는 곳에서 CCTV 따위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공권력은 당연히 미치지 않는다.

한데 그런 곳에 물자가 오가니 항상 그에 허덕이는 흑도에게 있어 이보다 먹음직스러운 것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기관과 무림을 집보다 더 많이 들락거려야 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이제는 러시아의 설원에 숨어든 흑도가 감히 오성의 물건을 노릴 수 없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천마신교의 이름이 더해질 예정이다.

오성은 조금 더 인프라를 넓히고자 하였으니 더 깊은 오지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위험이 따르는데 이 부분에서 천마신교가, 정확히는 투마전이 나선다.

혹한의 환경에 굴하지 않는 천마신교 투마전의, 바할라의 무인들이 경호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골자다.

"천마신교가 함께 해 준다면 제아무리 설원의 독한 자들이라 해도 감히 이를 드러내지 못하겠지요."

설강호는 그리 말하며 도진의 곁에 묵묵히 선 리쉬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번 러시아행에 리쉬라가 함께 온 이유 중 하나였다.

도시의 안내와 사업적인 이야기를 끝내고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성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하루를 머문 뒤, 도진은 일정에 따라 노보시비르스크를 떠났다.

'현장 시찰'이 그 이유였다.

* * * *

도진은 리쉬라를 포함한 투마전의 무인들과 함께 노보시비르스크를 떠나 시베리아의 오지 깊숙이 들어갔다.

현장을 소천마가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지였고 극한의 환경을 고려하여 오성아와 리쉬라를 포함한, 이번 일의 실무를 담당할 이들은 두고 투마전의 일부 무인들만 함께 했다.

노보시비르스크가 같은 시베리아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길이 사라지고 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3일 뒤.

도진 일행은 호텔은커녕 전기조차 쓸 수 없었으나 다수의 인원이 머물 수 있는 건물이나마 있어 다행인 마을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곳의 밤은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고 어둠과 함께 침묵이 내린 시간에 도진은 투마전의 충성심만큼이나 입이 무거운 무인에게 말했다.

"며칠 늦을 수 있을 거예요. 부탁할게요."

"예."

이야기가 이미 되어 있었기에 대화는 길지 않았다.

도진은 조용히 건물을 나섰고, 그 곁에는 솜이에 더하여 한 명의 여성이 함께 하고 있었으니 투마전의 무인들 사이에 존재감을 감추고 동행했던 전서린이었다.

하오문의 간부답게 '전서린'이란 존재를 완벽하게 감추고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다.

솜이까지 더하여 셋은 조용히 작은 마을을 벗어나 설원을 걸었다.

서벅.

빛이라곤 전혀 없이 끝없이 펼쳐진 설원은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는 풍경이었다.

그 설원을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을 때, 저 너머에서 모터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아아-!

설원을 달려 온 스노우카였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에 모자까지 자신을 꽁꽁 감싸고 있었는데 차를 멈춘 채 말없이 도진과 전서린을 응시했다.

타라는 의도를 읽고 도진과 전서린이 뒷좌석에 앉으니 바로 차를 출발시켰고 무려 두 시간이 넘게 달릴 동안에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설원만이 펼쳐져 방향 감각조차 잃은 것 같은 풍경이 계속되자 전서린은 조금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도 심장이 뛰는 듯 보였다.

콰아아아아-!

스노우카가 멈췄다.

풍경이 변화하여 눈덮인 절벽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결코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곳에서, 도진은 고요히 서서 스노우카가 도착하기를 기다린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경계를 넘어서진 못했으나 그 문을 곧 두드릴 수 있을 듯한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솜이에게 잠시 시선을 주는 듯 했으나 그 외엔 감정의 흐름조차 얼어붙은 듯 딱딱한 모습이다.

도진과 전서린이 내리자 스노우카는 미련없이 떠나갔고 그 뒤로는 추위 때문이 아닌 신분의 노출을 꺼려 온몸을 싸맨 그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경공을 펼쳐 스노우카 못지 않은 속도로 설원을 내달려 절벽 지대 깊숙이 진입했다.

그리고 이내 목적지에 도착하여 발을 멈추었을 때.

'여긴…….'

도진의 깊어진 눈동자에는 '마을'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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