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소천마 김도진 이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은 한유성이었다.
재계나 무림을 넘어 아예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으로 한유성이 꼽혔다는 거다.
한유성.
대한민국의 확고부동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재계 서열 1위 금화의 황태자로 태어나 그 이름에 걸맞는 성장을 하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혈통을 타고나 가장 좋은 환경에서 무공을 수련하였으니 한국 무림에서도 최고의 후기지수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압도적인 성적과 무력으로 숭무고 수석을 차지, 그 명성은 이미 후기지수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인룡(人龍), 인중지룡(人中之龍)이란 뜻의 별호를 부르는 것이 오히려 조심스러울 만큼.
한유성은 그런 '가축'들의 칭송만큼은 흡족해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 시대는 오히려 중세보다 확고한 계급 사회다. 단지 그것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예.
-중요한 것은 가축들이 자의로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엔 놈들을 강제로 우리에 가두고, 반항한다면 얼마든지 도축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자들이 조금 더 높은 계급에 오를 수 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학생 때부터 그것을 연습했다.
'협객'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일진이란 것들을 은밀히 휘하에 두었다.
적당한 사료를 약속하고 수하로 두어 부렸다.
감히 그에게 반항하던 것들을 이들을 부려 다시는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게 만들었고 일이 다 끝난 뒤에 나타나 수하들의 잘못을 징치하는 연기를 하였다.
반항하던 것들은 그에게 감사하여 무릎을 꿇었고 인룡의 명성은 치솟아 숭무고를 넘어 일반 대중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수하들은 겉으로야 징계를 받았으나 금군의 아래, 금화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이보다 영광스러울 수가 없다.
그리고 한유성은 열아홉에 A-1, 초절정의 자격을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업적을 이룩하고 서른도 되기 전에 금화의 부회장이자 금군(金君)으로 시대에 군림해 온 것이다.
가축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대한민국에서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힘.
그것이 한유성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었으며 이곳,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 모인 '회(會)'에 들 수 있었던 자격이었다.
한데 그것이. 그것이, 씹어먹어도 모자랄 놈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김도진. 김도진 그놈이다.
그가 쌓은 숭무고에서의 전설을 덮어 버리고 유일무이했던 A-1의 기록마저 갱신해 버려 업적을 바래게 하더니, 이제는 아예 그를 밀어내고 옛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뿐인가!
금화의 위명을 넘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그의 원대하고도 장대하며 위대한 계획에마저, 똥물을 뿌렸다.
"끌끌. 한국은 복구하려면 많이 힘들겠어."
까드득-
부러 그에게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담긴 카자카미 노보루의 말에 다시 한 번 이가 갈렸다.
아득한 계획이었다.
평범한 것들은 감히 그 전체를 파악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계획.
그걸, 김도진이 다 말아먹었다.
한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중심이 되고자 했던 '금군'의 이름을 김도진이 밀어내 버렸다.
절대적으로 군림하여야 했던 금화 또한, 천마신교에 밀리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이는 일전 있었던 안민선과 안지오 사건이 치명적이었다.
회에서는 한국을 삼키기 위하여 금화와 안민선, 안지오에 투자하였다.
재계는 금화, 정계는 안민선이 꽉 잡고 이내 안지오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조종하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실제로 금화는 금군 한유성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에 군림하였고 금화의 지원을 받은 안민선 일파가 정계를 꽉 잡았다.
전형적이지만 압도적인 정경유착이었다.
여기에 주는 사료를 먹고 자란 멍청한 안지오가 대통령이 되기만 했다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체제가 완성될 것이었다.
한데! 그걸!
김도진이 안민선 일파를 재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나락으로 보내면서 말아먹었단 말이다!
호시탐탐 틈을 노리던 오성이 여기에 힘을 보탰고 군홍무가도 하이에나마냥 끼어들면서 이 원대한 계획은 완전히 엎어졌다.
금화의 영향력도 축소되었고.
이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과 금력, 그리고 시간이 들지 한유성조차 아득해질 지경이다.
"김도진……."
씹어뱉듯 한유성이 그 이름을 말했고 카자카미 노보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이 문제지. 바할라도 놈 때문에 손을 떼야 했고 말이야."
그러면서 스윽, 카자카미 노보루가 시선을 향하는 건 바할라를 포함한 남쪽 나라를 담당했던 자들이다.
외부에 얼굴을 잘 노출하지 않는, 그러나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호인 그들은 바할라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 나라를 삼키려 했으나 역시 김도진 때문에 실패했다.
바할라의 왕세자 슈미트라의 즉위를 지연시키고 2왕자를 내세우면서 차츰차츰 그들이 원하는 구도를 만들어 갔으나 김도진에 의해 오히려 바할라를 넘어 남쪽 나라 전체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한국은 그나마 한유성과 금화라도 있지 남쪽 나라는 밑작업부터 다시 해야 할 판이다.
허나 남쪽 나라의 중심인 바할라에 투마전이 있으니 얼마나 그것이 지난할지 견적을 잡기도 힘들다.
"진짜, 게임 좆같이 하는 새끼네. 요즘 애들은 김도진 같은 놈을 이렇게 말한다며?"
"……."
경박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그렇게 말했으나 한유성도 카자카미 노보루도 대꾸해 주지 않았다.
해 줄 가치가 없었다.
"아니, 그건 칭찬이야. 오히려 극찬이라고."
"오, 그런가? 이런! 미안해. 너희를 놀리려던 의도는 아니었어."
한데 또 다른 경박한 놈이 그렇게 말을 받으면서 실패한 이들의 화를 돋궜다.
'정말, 개같은 놈들이다.'
한유성은 억지로 화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국을 넘어 세상을 손에 넣기 위하여 한 배를 타긴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정말로.
카자카미 노보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과할 거 없네. 나는 잘 되고 있으니까 말이야."
…일본은, 카자카미 노보루는 김도진과 부딪쳤음에도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는 나라였다.
김도진이 일본을 직접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혹은. 카자카미 노보루가 발 빠르게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사과와 보상을 했기 때문일까.
"그래. 일본은 그랬지."
일본은 각 지역의 막부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정부는 점점 힘을 잃어 이름만이 남고 각지의 강력한 문파가 실권을 쥐는 형국이다.
정부의 관료가 대문파의 지원을 받아 당선되고 심지어 대통령도 상황이 다르지 않으니 대문파의 입김에 따라 나라가 운영되는 형태다.
회가 원하는 그림이고 착착,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미국도 상황이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카자카미 노보루의 말에 조용하던 레너 집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존 스미스를 철저하게 잘라냄으로써 레너 공방은 어느 정도 의심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철저한 감시의 체계가 구축되었으나, 그 체계의 중심이 금화였기에 오히려 더 과감하게 일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세간에서야 금화가 무형독에 이를 박박 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바로 그 금화가 무형독의, 회의 핵심이었으니 역으로 호재인 것이다.
"뭐, 그래도 대계(大計)는 조금 더 늦춰지겠어."
"…그렇군."
대계.
세상을 잡아먹을 계획.
단순히 힘을 쥔 상류층의 단계를 넘어 실질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 위한 계획이다.
김도진으로 인해 늦춰진 그 계획이 또, 조금 더 늦춰질 거라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치지직-
뒤늦게 스피커를 통하여 나타난 무선이 말했다.
-대계를 발동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뭐라?"
* * * *
회의를 위해 모인 이들이 모두 경악하였다.
그만큼, 지금 무선의 발언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계를…… 발동하겠다고?"
카자카미 노보루의 물음에 스피커 너머의 무선이 답했다.
-예.
"여러 계획이 어그러진 지금, 불안정한 상황에서 대계를 발동하려는 이유가 뭐지?"
-그렇기에 오히려 지금이 적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무선이 이유를 말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진행하였던 많은 계획 중 일부가 어그러졌고 그 균열이 커지고 있습니다. 김도진을 필두로 한 이단의 집단이 대표적이지요.
-균열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커질 것입니다. 다른 곳을 보완하여도 메꿀 수 없는 균열이 커진다면 결국 전체가 붕괴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균열이 더 커지기 전에 그 부분을 포기하고 대계를 발동하는 것이 오히려 최선이 되는 것입니다.
"……."
짧은 설명이었으나 그들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 말대로야."
"그래."
완벽을 기하려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는 구도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빠르게 일을 진행하는 것이 '최선'이 된다.
-한국과 바할라 등 일부를 버리고 그 자원을 다른 곳에 집중하여 진척도를 높입니다. 그럼으로써 생기는 파탄은, 무(武)로써 해결하겠습니다.
"좋군."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하는 것은 한유성이었다.
언제까지고 숨어서, 웅크린 채 꿈지럭거리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10년이 넘도록 계속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한데. 그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역으로 계획을 앞당긴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시작하지.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좋은데."
그가 이를 드러내며 호전적인 기세를 흘렸다.
* * * *
스윽-
검은 무복을 입은 중년의 무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서 신비롭게 빛나던 스피커가 주입되던 내공이 끊기자 빛을 잃었다.
'…어리석은 것들.'
소리없이 걸으며 그는, 무선(武線)이라 불리는 이는 욕심 그득한 자들을 경멸하였다.
욕심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경계하고 또 경계하지 않으면 본인을 잡아먹는 두려운 괴물이라는 것을 놈들은 모른다.
어느 순간 잡아먹혀 욕심이 오히려 인간을 조종하는 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욕심에 잡아먹힌 자들의 끈을 조종하여 '대계'를 진행하고 있으니 상황이 얄궂다고, 무선은 또 생각하였다.
저벅.
상당한 거리를 걸은 무선은 어두운 곳을 나와 어느 전각에 들어섰다.
목재로 지어진 전각은 어디인지 모를 장엄한 자연에 둘러싸여 현대적인 색채가 보이지 않는다.
타닥. 타다닥.
그러나 그 내부에는 온갖 전자 기기가 가득하고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니 오묘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무선은 그들을 지나쳐 모니터가 아닌 종이에 정보가 기록된 서류를 정리하는 이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장로님."
"검 장로께서는?"
"깨달음을 수습하시고 임무로 복귀하셨습니다."
"그래."
무선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 뒤를 묻지 않았다.
검 장로. 충성심이 대단한 '교'의 장로인 그는 문제없이 임무를 수행할 것이었으니까.
* * * *
12월 중순.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도진은 기다리고 있던, 천외천에서 보낸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소천마 김도진. 하오문의 전서린과 함께 만나기를 원한다.]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