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94화 (594/741)

593화

"……!!"

노인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도진의 선언과 함께 세상이, 그래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이 노인을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발로 딛고 서 숨쉬는 세상 전체가 자신을 적대하는 감각은 감히 화경의 고수라 해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으니 노인은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이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젊은 무인에 경악하였다.

'형님 말고도 이런 경지에 이른 자가 있다니……!'

세상 전체가 대상을 적대하게 만드는 건, 기실 실제로는 세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무인이, 세상에 자신의 심상을 덧씌울 수 있는 무인이 만들어낸 현상인 것이다.

자신에 그치지 않고 외부에마저 심상을 덧씌울 수 있는 경지.

'하늘 밖 하늘'에 지극히 가까운 이들만이 가능한 이 이적을 젊은 무인이, 그것도 무공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알려진 자가 행하고 있다는 것에 노인은 일순 상황마저 잊을 정도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현실을 자각하고선 이를 뿌득 악물었다.

눈앞의 젊은 무인이, 소천마가 그의 제안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걸 이 압박으로 대답했으니까.

이길 수 없다는 건 이미 확정된 미래였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저항해야만 했고.

쿠오오오오-!!

필생의 내공을 다하여 검을 내뻗었다.

찬연한 검기가 적대하는 세상의 압력을 뚫고 소천마를 향해 짓쳐들었다.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 도달한 정수가 그 일검에 깃들어 있었다.

소천마는 그 검을.

꽝-!

너무나 간단하게 받아내었다.

'……!!'

그리고 노인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마혈(痲穴)과 아혈(啞穴)이 짚힌 것이었다.

몸이 마비되는 마혈과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는 아혈을 동시에, 그것도 화경의 고수가 필사적으로 내지른 한 수를 간단히 받아내면서 짚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부 무협 소설에서 점혈을 무슨 아무나 짚을 수 있는 간단한 수법마냥 묘사하지만 실제로 점혈은 지극히 고등의 수법이며 숙련자라 해도 위치와 힘조절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으니까.

그것을, 노인의 공격을 상쇄하며 동시에 무인이라면 가장 방비가 견고한 마혈과 아혈을 짚어 버리다니.

상식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허나 그 또한, 소천마이면서 동시에 사신의 제자인 도진에게는 상식과 가능의 영역에 있는 일이었다.

무흔잠영의 성취가 경계를 넘어서면서 도진은 사신의 진신절기에 도달하였다.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 경지이자 무경(武境)을 장호는 부지역(不知域)이라 하였다.

점에서 시작하여 선(線), 이내 면(面)에 이르는 무흔잠영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면 '시간'이 더해진다.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이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바로 사신 장호의 영역이고 도진은 비로소 사신 장호의 무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이 검을 내지른 순간 도진이 이치에 닿아 뜬 신안(神眼)은 점을 이어 선을 만들었고 공방이 이루어지는 면을 완성했다.

여기에 시간이 더해져 미래까지 이어지니 도진은 이미 노인보다 몇 수나 앞서 보고 먼저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인의 시선은 도진의 현재의 출수에조차 닿을 수 없으니 선(線)이 되지 못하였고 선이 되지 못하였으니 미래에 있을 마혈과 아혈을 점하는 치명적인 공격에도 닿지 못한다.

차라리 노인이 순수한 무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무력하지 않았을 터이나 그의 무공은 암살자에 닿은 부분이 있었기에 도진과의 상성이 최악이었다.

그렇게.

검을 늘어뜨린 채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버린 노인을 두고 도진은 백설을 휘둘렀다.

스각-

백설에 사지의 힘줄이 베여 쓰러지는 건 노인이 아닌 배경석과 함께 왔던 인신매매단의 인간 쓰레기다.

"끄으아아아아아악!!"

주입된 천마기가 미쳐 날뛰며 결코 회복되지 않을 상처를 만들고 놈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지른다.

그 비명을 배경으로 도진이 정신을 잃고 잠들었던 배경석의 옆구리를 찼다.

빠각-!

"아아아아악!!"

정신을 후려치는 고통에 배경석이 비명을 내지르며 깨어났다.

갈비뼈가 박살이 난 건 아니었기에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그는 비명을 내지르다 도진의 모습에 경악하고, 또 눈깔을 굴려 주변을 살피더니 일순 안도감을 보였다.

노인의 등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 도진은 알았다.

'그랬구나.'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일단은 배경석의 성정이었다.

사람을 짐승마냥 해체하고 팔아먹던 놈이었는데 그 성정이 물렁했다.

본디 이런 인간은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연스레 살기가 깃들고 어느 쪽이든 배수의 진을 친 정신 상태이기 마련인데 이놈은 그 배수의 진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를 방금 알았다.

놈의 '배수의 진'은 내부가 아닌 외부, 은밀히 지켜주던 아버지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배경석이란 놈이 손을 털었다면서 이렇게나 쉽게 사고를 치는 성격이었음에도 전생에서 15년이 넘도록 전혀 그런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이 또한 노인이 뒤에서 손을 썼던 것이다.

후-

도진이 옅게 웃었다.

웃었지만, 본능이 울리는 경종에 배경석은 히익 숨을 삼켰고.

빠각-!

"아아아아아악!!"

도진에 의해 발목이 분쇄되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히익! 히이이익!!"

딱딱한 바닥에 면상부터 엎어져 이가 부러지고 코피가 줄줄 흘렀으나 그는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공포를 토해냈다.

느껴지는 것이다.

도진에게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殺氣)가.

배경석은 살고 싶었고 필사적이고 급한 마음에 아작난 발목으로 일어서는 대신 두 손으로 바닥을 기었다.

기어서, 아버지에게로 접근했다.

그리고 외쳤다.

"사, 살려줘! 살려달라고!!"

그처럼 한심한 성격의 인간이 살벌한 외국의 뒷골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말도 안 되게 강한, 그러나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는 그야말로 무적이었고 그는 배수의 진을 치지 않고서도 여유롭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적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버지는 절대적인 강함을 보여 주었으니 배경석은 이번에도 아버지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소천마라 해도 어린 놈이다.

나이 지긋한 아버지가 질 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와 달라고!!!"

그는 피를 토하며 외쳤으나 아버지는 등을 보인 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배경석을 미치게 만들었고.

빠드득-

"아아아아아아악!!"

도진이 땅을 기던 손목을 즈려밟자 또 한 번 미칠듯한 고통과 공포에 비명을 내질렀다.

"너희 아버지가 빨리 도와주셔야 할 텐데 잘 안 들리시나 봐. 어서 가서 옷자락이라도 흔들어 봐야 할 텐데. 이렇게 느려서야, 당하고 말 거야?"

"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배경석은 미쳐서 남은 한 손과 다리로 바닥을 긴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우드드드득-

남은 한 손마저 즈려밟혀 기능을 영구히 잃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닿기를 포기했다.

불과 몇 걸음을 남겨두고.

도진이 그의 몸을 뒤집었다. 더러워진 운동화로 더러운 것을 건드리는 듯한 몸짓으로.

쭈그려 앉아 눈과 눈의 거리를 좁혔다.

배경석이 반쯤 정신이 나가서는 중얼거렸다.

"사, 살려, 살려 줘. 살려 줘."

도진이 싱긋 웃었다.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을 살려준 적, 있어?"

배경석은 아가리를 벌렸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고장난 것처럼 살려달라고만 다시 반복했다.

"응. 운이 좋네. 나는 사람을 안 죽이니까. 살려줄게."

"아. 아. 아."

일순 배경석의 얼굴에 희망이 어린다.

푸욱-

하지만 도진이 웃는 얼굴 그대로 백설을 뱃속에 찔러넣자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준다고 했잖아아아아아!!"

"응. 오해하지 마. 죽이는 거 아니니까. 안 아프잖아?"

"……!!"

배경석은 고통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정말이었다.

칼이 뱃속을 깊게 찔렀는데.

아프지가 않다.

"요즘 제법 유명하던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소천마는 불살의 화신이라고."

불살(不殺)의 화신.

소천마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배경석도 그 이야기를 들었고 기억해냈다.

그래서, 고통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시린 냉기를 뚫고 공포가 폭발했다.

"주, 죽여. 죽여."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뜻만큼은 분명히 정해졌고 도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죽인다니까. 내가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으로 보여? 나 천마인데?"

죽음은 죄에서 도피하는 행위다.

도진이, 천마신교의 교주가, 소천마가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앞서 백정들의 몸에 낸 칼집들과 마찬가지로, 배경석의 배에 쑤셔박힌 검 또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살아서 죗값을 치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으으…….

침기(沈氣).

사신공을 운용함으로써 발현할 수 있는 이 기운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부위를 죽일 수 있다.

그런 침기가 배경석의 온몸에 깃들었다.

"죽지 않을 거야. 그냥 천수를 누릴 동안, 천천히 죽어갈 뿐이지. 눈에 힘을 주어 집중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볼 수 없게 될 거고 어쩌다 몸에 부담이 되는 음식을 먹으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게 될 테지. 하지만 걱정 마. 그래도, 죽지는 않을 거야. 죽을 때까지 말이야."

"아. 아아. 아아아아아악!!"

배경석은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었다.

죽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아주 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도진은 몸을 일으켜 배경석을 버려두고 그 아비의 앞에 섰다.

'…….'

노인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들의 미래를 생각한 아비의 절절한 부정(父情)이다.

허나 도진은 전혀 거기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도진의 의지에 따라 기가 움직여 노인의 아혈을 풀었다.

노인으로서도 감히 재단하지 못할 경이로운 수법이었으나 그는 거기에 감탄하는 대신 도진을 원망했다.

"꼭. 꼭, 이렇게까지 하여야 했나?"

도진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원망스러워?"

"그러면, 처참하게 망가지는 아들의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서 있었던 아비가 어찌 원망스러워 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래, 그러면. 그렇게 망가지는 걸 넘어 시체조차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죽은 가족의 시체조차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이들의 슬픔을 좀, 짐작은 할 수 있겠어?"

"……."

"너 따위 새끼가 지금 겪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처절했을 사람들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겠냐고 이 개새끼야."

"……."

"애새끼가 그따위 짓거릴 하면 말렸어야지. 뒤늦게라도 말리고 계도했어야지. 왜. 니가 화경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어? 이제와서 아들에게 훈계하기엔,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어? 평생, 피해자가 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

"……."

"내가 지금 이곳에 없었으면. 쟤는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저 아이의 보호자는? 그걸 상상도 못할 모자란 새끼는 아니잖아? 그래도 넌 그저 몰래 숨어서 지켜만 봤겠지?"

"너. 벽에 막혀 있는데 그걸 아주 오랜 세월을 들여서도 뚫지 못하고 있는 이유, 알고 있어? 간단해. 나쁜 걸 알면서도 외면하는 그 썩어빠진 정신 상태가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는 거야."

도진이 피식 웃었다.

"앞으로 혼자선 밥숟가락도 못 들고 밥벌이도 못할 애새끼가 오래도록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뒤늦게라도 애비 노릇 잘 하도록 해. 같이 반성하면서."

퍼걱-

도진은 정신부터 완벽히 패배한 노인의 단전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여기 인신매매단을 잡아 두었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