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92화 (592/741)

591화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이자 전생을, 도진은 떠올려 보았다.

더 이상 바깥을 외면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지낼 수 없게 되면서 입사했던 공장.

왼팔과 왼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신을 '너그러이' 받아주었던 공장이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왼팔과 멀쩡한 오른팔을 같이 써 일할 수 있는 공장이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왼다리 대신 오른다리만 사용하여 액셀과 브레이크를 조작, 오른손을 함께 움직여 차를 운전할 수도 있었고 그것으로 직접 포장한 물건들을 배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여 월급을 받았을 때.

200만 원이 안 되는 그 돈이 그리도 크게 느껴졌고 집에 보탬이 되었을 때.

도진은 '희망'이란 걸 가졌었다.

이렇게라도 조금은 정상적인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하지만 그렇게 조심스레 가졌던 위태로웠던 희망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첫 월급은 두 달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 거야.

공장에서 오래 일했던 직원 중 한 명의 말이었다.

첫 달 월급을 바로 주면 말도 없이 그만두는 등의 짓거리를 하는 인간들이 있어서 그런다는 말.

도진은 별 말 없이 받아들이긴 했으나 첫 월급을 받기까지의 두 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입사 후 8개월까지의 기간 동안 제대로 받은 유일한 월급이었다.

80만 원, 50만 원, 20만 원.

놀리는 것도 아니고.

월급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조각조각 나뉘어 불규칙하게 들어왔다.

무려 8개월 동안이나.

희망은 짓뭉개졌고 도진의 삶 또한 엉망이 되었다.

월급이란 삶의 뼈대이니 그 뼈대가 무너져서야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도진은 미칠듯이 괴로웠고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면서 인터넷을 뒤적여댔다.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만약 회사가 망하면 어떻게 하나, 월급이 떼이지는 않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이성적으로는 그만둬야 하지만 여길 그만두면 갈 데가 있기는 한가.

차라리 회사가 정상화되길 기다리는 게 현명한 게 아닌가.

이 세상은 그렇게 깨끗하고 이상적이지 않으니까. 이럴 수도 있는 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회사는, 결국 정상화되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고 도진은 자신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다행스러워 했다.

"……."

쓴웃음이 나오는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도진은 그런 일을 지금 강예지가 겪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래서, 싸운 거야?"

도진의 물음에 나지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싸움을 한 건 아니고. 강예지가 불만을 내비치는데 배경석은 미안하다는 말로 무마하는 식이었어."

상상이 되었다.

배경석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정색하고 윽박지르는 타입이 아닌 사람 좋은 얼굴로 사과를 하는 타입.

그래서 더욱, 사람의 장기를 밀매하고 마약을 취급하는 얼굴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런 식이었지만, 아무래도 화가 쌓였나 봐. 그래서 죽이기로 한 거겠지."

특별한 방식으로 인신매매단과 연락을 취했다.

직접적인 단어의 언급을 피했으나 강예지를 팔아넘기려는 의도를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 한 명을 팔면, 당장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말하는 나지윤이었으나 그 안에는 분명히 분노가 어려 있었다.

"거진 6개월이면…… 가면을 오래 유지하긴 했어."

나지윤의 평가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고립되고 소문에도 둔감했던 도진이 다 알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아는 범위 내에서 공장 주변에서 의문의 실종이나 살인 같은 건 단 한 건도 듣지 못했었다.

아무리 둔감해도 그런 일이 터졌다면 도진의 귀에도 들어왔을 텐데.

"접촉한 단체는 말단급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나지윤은 정보를 계속 풀어놓았다.

"말단급."

"어. 현장에서 직접 수급해서, 역겹지만 평범하게 비유하자면 도매상에게 넘기는 거야. 이 정도는 되어야 큰 단체랑 연결되지."

"이렇게 보면…… 정말로 배경석은 말단 중에 말단이고 무형독과는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을 거야."

당장 딴에는 비밀스런 수단으로 전화를 했다고 하나 나지윤의 입장에서 보자면 길거리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수준으로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부분에서 접촉한 인신매매단의 수준이 드러난다.

"그렇구나."

도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죽음에 특별한 어떤 것이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러니까. 그저 그런 것이다.

배경석은 도진의 퇴직금을 주기가 싫었고, 주기 싫었지만 줘야 하니까.

도진을 죽이고 그 '부산물'을 팔아 손해를 메꾸려 했던 거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죽여서 부산물을 팔 수 있는 인간이 곁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쥐뿔도 없던 전생의 도진의 삶에서는 특별한 요소였다.

그저, 그런 것이었다.

비참하다거나 화가 더 나진 않았다.

본래 그런 것조차 알지 못하고 완전히 끝이 나야 할 삶을 이렇게 다시 살아 알게 되었으니 충분하다.

남은 건.

그 죗값을 복수를 더하여 치르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놈들은 며칠 내로 움직일 거야. 갈 거지?"

나지윤의 물음에 도진이 평소와 같이 옅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 *

"예지 씨, 잠시 괜찮을까요?"

평소와 같은 날. 배경석이 강예지를 불렀다.

"네, 사장님."

사장실에서 둘이 독대를 하게 됐다.

배경석이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일 혹시 야근을 하실 수 있을까 해서요. 아, 야근이라 해서 오래는 아니고 저녁 8시 정도까지요."

"…무슨 일이 있나요?"

"큰 계약 하나가 잡힐 거 같은데, 함께 일을 처리해 주실 분이 필요해서요. 태블릿 피시를 사용할 거라는데 아무래도 젊은 예지 씨가 함께 가 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큰 건.

그리고 희망적인 어조가 강예지의 귀에 진하게 들린다.

사장은 강예지가 원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고 하청에만 기대서야 회사가 발전할 수는 없는 법이죠. 주도적으로 판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사업이 필요했는데, 마침 해외 쪽에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중국 쪽 현지 법인을 통해서 우리 브랜드를 런칭하고 공급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불안정한 물량의 하청에 기대는 대신 우리가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고 수입도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지금처럼 회사의 사정이 외부의 이유로 불안정해질 일이 없어지는 거죠."

'아.'

간단한 이야기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밀린 월급을 줄 수 있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야근 수당은 드릴 거고 차비도 드릴 테니, 가능하면 같이 가 주시면 좋겠네요."

마침 내일은 마트 휴무날이다.

원래는 밀린 잠이라도 잘까 했는데, 이런 일이라면 나쁘지 않다.

새벽까지도 아니고 겨우 저녁 8시까지의 야근이니까.

게다가 직접 가서 보면 정말로 괜찮은지 아닌지 조금이라도 가늠이 될 것도 같고.

"…네. 그럴게요."

강예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고마워요."

배경석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다음날 오후.

5시 정도가 되어서 강예지는 사장의 차를 타고 인천항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중국 쪽 회사의 한국 지사가 목적지였다.

"가능하면 오전에 일을 처리하고 싶었는데, 그쪽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조금 늦은 시간이 됐어요."

"네."

겨울이다 보니 가는 사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기저기 조명이 밝지만 가득 쌓인 컨테이너 사이의 길을 달리다 보니 마치 미궁에 들어가는 것만 같아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우리 회사도 앞으로 저런 컨테이너에 가득 물건을 실어서 수출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규모도 훨씬 커지게 될 테죠."

하지만 사장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희망을 말한다.

"지금 고생하시는 분들은 그때가 되면 번듯한 자리로 보답해 드릴 겁니다."

"네."

컨테이너 사이를 더 나아가 외진 곳에서 차가 멈췄다.

'삼일무역'이란 간판이 내걸린 컨테이너 두 동짜리 사무실 앞이었다.

조명이 밝지만 주변을 컨테이너가 가득 둘러싸고 있어 역시나 꺼림칙하다.

"가시죠."

사장과 함께 안에 들어서니 내부는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하는 이들도 평범한 인상의 한국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한데 이쪽 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십니다."

"아."

배경석의 말에 삼일무역의 직원이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사장님들끼리 민감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계약을 하자는 쪽이어서요."

"음."

직설적으로 말하면 직원이 낄 데가 아니란 소리였다.

강예지는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시선을 내리깔았고 그 사이 몇 마디를 더 나눈 사장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미안합니다, 예지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저 혼자 올 걸 그랬네요."

"아뇨, 아니에요."

"지금이 여섯 시 십 분이니까, 일곱 시까지 일한 것으로 쳐 드릴게요. 그리고 이건 택시비."

그러면서 배경석은 십만 원을 건넸다.

강예지는 한 번 괜찮다고 한 뒤 그 돈을 받았다.

"바깥까지는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그리고 도로로 나가서 택시 타시면 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의 차를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처음엔 꺼림칙한 미궁 같았는데 나가는 길이어서인지, 생각지 못했던 소득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번엔 나쁘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향했다.

조금만 나아가면 큰길이 나오고 거기서 택시를 타면 집까지 금방 갈 수 있다.

그렇게 강예지가 몇 발자국 걸었을 때였다.

훅-!

우악스런 손길이 강예지를 붙잡고 코와 입을 막았다.

"……!!"

소리를 치려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약품에 적셔진 천이 코와 입을 완벽하게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단단한 손이 그것을 잔혹할 만큼 완벽하게 무위로 만들었다.

'……!'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공포와 절망감에 몸이 한 순간 파르르 떨렸고.

강예지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 * * *

삼일무역의 사무실 안.

배경석은 그를 맞이해 주었던 직원과 함께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직원이 말했다.

"과거 청산하고 성실히 산다고 하드만, 결국 돌아왔네."

직원의 말에 배경석이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씨발년이 꼴받게 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보내 버리면 좀 귀찮을 텐데."

"어차피 안 들킬 건데 뭐."

배경석은 확신하는 얼굴이었고 실제로 그리 될 일이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계획된 '판매'였다.

실제로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오는 길은 철저하게 CCTV에 비치는 동선 안에 있었다.

심지어 이곳에도 CCTV가 있으며 강예지를 내려준 곳에도 CCTV가 있다.

하지만 단 한 곳.

강예지가 큰길로 가기 위해 조금 나아간 단 한 곳만은.

CCTV의 공백이다.

배경석은 강예지를 바래다 주었고 그 뒤로 삼일무역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떠날 것이었고 그렇게 알리바이가 만들어진 범위 안에서, 그와 관련없이 강예지는 실종되는 것이다.

"작업은?"

"뭐 지금 한창 하고 있겠지."

"또 헛짓거리하고 있는 건 아니고?"

"뭐 어때. 어차피 돈은 똑같이 입금될 건데."

"그건 그렇지. 그럼 뭐 현장이나 좀 보고 갈까."

"손 턴 놈이 현장은 또 왜."

"그년 배때기 속 한 번 보고 싶어서."

"하여간 성질 더럽다니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거절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CCTV가 비추지 않는 어느 컨테이너 앞에 섰고.

기계를 이용하여 그것을 들어올리자 바닥의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그 길을 따라 제법 걸어 주변 야산 지하에 은밀히 자리잡은 '도축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뭐, 뭐야."

여기저기 몸에 칼집이 가득한, 더러운 바닥을 기고 있는 백정들을 마주하게 됐고.

"제 발로 왔네?"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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