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91화 (591/741)
  • 590화

    천외천과의 만남은 가을을 지나 겨울, 12월로 정해졌다.

    천외천이 도진과의 만남을 원하였고 도진도 기다리고 있었던 만큼 당장이라도 이루어질 것 같았던 만남이 그렇게 한 달도 넘게 밀린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사소한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았다더군."

    여유를 되찾은, 그 짬(?)에 천외천과의 연락을 맡아 주었던 오군성의 말대로 깨달음의 실마리 때문이었다.

    도진과 만나기로 한 이들중 한 명인 천외천에서도 손꼽히는 고수가 우연히 깨달음의 실마리를 붙잡았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짧은 폐관에 든 것이다.

    그 정도나 되는 경지에 있는 고수가 사소하다지만 깨달음의 실마리를 붙잡았는데 온갖 현생의 것들이 문제겠는가.

    당연히 그것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고 도진은 이해했다.

    그런 이유로 조금 일정에 여유가 생겼고 도진은 나지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주제는 전서린이었다.

    나지윤은 전서린이 직접 그려준, 꿈 속에서 본 장면을 그린 그림들을 보고서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건 정말로 중요한 자료야."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

    동양인이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그 얼굴들은 나지윤 같이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 있어 억만금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도진은 이들과 비슷한 얼굴을 이미 보았었다.

    다른 곳도 아닌 무형독에 소속된 이들이 바로 그랬다.

    허나 그때는 아직 이 정보를 확신의 영역에 둘 수 없었다.

    -무형독에 소속된 이들은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정의하기엔 반론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들의 영어가 유창하면서도 발음이 어색했던 것이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연막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의 이런 특징을 가진 외모 또한 국적을 포함하여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한 연막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아예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은 순수한 외모일 확률마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무형독에 소속된 이들 전부가 그런 것도 아니고 일부만이 그랬으며 지위 고하에도 일관성이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었으면 무형독이 방치할 리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그저 정보 중 하나로만 두었고 추후 상상도 못할 범위로 조사를 했었다.

    그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이가 없는지 세계 단위로 조사를 벌인 것이다.

    답청문이라면 할 수 없었겠으나 바할라의 정보 단체가 합류한 세이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저 자연적으로 나온 외모였다.

    동양만이 아닌 서양에서도 비슷한 외모를 가진 이들을 소수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무형독이 아니었다.

    일전 나지윤이 말했던, '숨긴 것이 아닌 정말 없는 것'의 영역에서 나온 결론이었으니 부정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끝난 일이었는데.

    나지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아주, 아주 많이 달라지거든."

    세이전이 조사한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장면은 볼 수 없었다.

    배경만 보아도 제법 규모가 상당하고 곳곳에 보이는 양식이 독특하다.

    그런 곳에서 이토록 특이한 광경에 이토록 특징적인 외모를 가진 이들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을 세이전은 찾지 못했었다.

    즉.

    "세이전의 눈을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곳에, 그럴 능력이 있는 자들이 모여 있다는 거지."

    여기서 대번에 떠오르는 단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무형독."

    "응."

    무형독이다.

    천마신교는 물론이요 많은 국가들이 힘을 합치고 있음에도 무형독의 몸통은 오리무중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정말로 없는 것처럼.

    그것이 가능한 조직이라면 세이전이 '없다'고 결론 내릴 만큼 존재를 숨길 수 있을 것이었고.

    "제아무리 하오문의 핵심 간부라 해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나지윤의 말대로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가정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진다.

    무형독이 일부러, 수작을 부려서 전서린을 하오문에 보냈을 확률이 생긴다.

    "네 말대로라면 무형독은 술법에 능해. 비현실적인 일들마저 가능할 만큼."

    "맞아."

    그것은 차라리 판타지의 '마법(魔法)'을 떠올릴 정도였다.

    만일 그들이 보여준 것 이상의 것마저 가능하다면.

    "전서린의 기억을 봉인하고 하오문의 간부 자리에 오르도록 의도했을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전서린이 기억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본인조차 모르게 하오문을 무형독에 감염시킬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허나 너무 나갔다고 하기엔 지울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때문에 도진은 이 이야기를 전서린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사람의 속은 모르는 법이다.

    도진의 신안(神眼)은, 장호에게 배운 사람 보는 법까지 더하여서 전서린이 무형독에 가담할 리가 없는 사람으로 보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건 복잡한 것이다.

    만약 무형독 안에 전서린의 가족이 있다면.

    전서린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를 완전히 뒤흔들 것들이 잃은 기억에 있다면.

    전서린은 도진이 본 그대로의 사람이면서도 무형독에 가담할 수 있었다.

    "복잡하네."

    "응."

    도진의 말에 나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 복잡한 걸 정리하는 게 전문이니까. 정리가 되도록 노력해 볼게."

    "그래. 부탁할게."

    * * * *

    새로운 단서가 생겼고 그에 맞추어 세이전이 바빠졌다.

    성과가 금방 나올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없었던 길이 생긴 것만으로도 정보 단체가 바빠질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바쁜 중에도, 나지윤은 배경석에 대한 정보에 소홀하지 않았다.

    "배경석이 인신매매단과 통화를 했어."

    "무슨 일로?"

    "임금 체불로 강예지와 갈등이 있었어."

    * * * *

    "……."

    쉬고 싶다.

    오전 여덟 시. 눈을 뜬 강예지가 가장 먼저 한 간절한 생각이었다.

    언뜻 그런 생각을 하기에 여덟 시는 꽤 늦은 기상 시간이 아닌가 싶지만 여섯 시간 전까지, 그러니까 새벽 2시까지 강예지가 일을 했다는 부분까지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었다.

    배가 고팠지만 감당하기 힘든 피로에 겨우 씻기만 하고 자리에 누웠고 눈을 감았다 뜨니 해가 밝았다.

    제발 사라져 주길 바랐고 그게 이루어져 감방에 처박힌, 차라리 원수였던 오빠와 달리 강예지에겐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었고 네 시간은 그런 그녀의 피로가 다 풀리기엔 부족했다.

    '개같아.'

    이 세상에 하늘 같은 빌어처먹을 건 없다. 없어야 했다.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데 죽이지 못해서 복장이 터질 테니까.

    가족이 아니라 원수 그 자체인 그 새끼가 아닌 나한테 무공의 재능이 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 새끼가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했을 텐데.

    그랬다면, 아무리 허덕여도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제자리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이 빌어처먹을 현실에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최저 시급을 맞춰줄 뿐인, 그러나 집에서 가깝고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이유로 더 나은 미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공장의 경리로 들어갔다.

    그 경리의 월급으로 현실을 버티면서 더 나은 미래를 붙잡을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기 위하여 투잡을 뛰었다.

    마트에서 흔히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힘 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대번에 팀장이 되었지만 어린 년이 건방지다는 뒷담화와 근육통이 뒤따랐다.

    15만원이 더 오른 월급이 그것을 감내하게 만들었다.

    어렵진 않았다.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할 것이, 버텨내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그런 사소한 것엔 통증을 느끼는 게 오히려 어려웠으니까.

    '배워야 해.'

    강예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었고 진득히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A-3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 투자할 시간도 돈도 없었다.

    허나 지금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으니 배움이다.

    일반적으로 무공에 재능이 있는 이들은 천재이지만 그들이 무공에 치중하기에 외면받는 분야가 있었다.

    그 분야 중 버려서는 안 되는 분야가 있었고 의외로 이런 곳들이 일할 사람이 적어 페이도 좋고 안정적이었다.

    강예지는 그런 자리를 노리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투잡을 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달도 밀렸네요."

    사장, 배경석을 보는 강예지의 눈동자엔 진득하고 검은 감정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예지 씨."

    배경석이 사람 좋은 얼굴로 사과했지만 강예지의 검고 진득한 감정이 해소될 리가 만무하다.

    입사할 때 들었다.

    -예지 씨는 잘 모를 수 있겠지만 일하다 도망가거나 불성실하게 해서 회사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단 말야.

    -네.

    -그러니까 월급은 한 달이 밀려서 나와. 첫 달 월급이 다음달에, 두 달째 월급이 셋째 달에 나오는 식이지.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었지만 그 개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곳이었기에 강예지는 감내하기로 했다.

    어쨌든 첫 달 이후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기만 한다면 최소한 힘든 사정이 나아질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두 달을 버텨 온전히 월급을 받았을 때엔 차오르는 어떤 것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데.

    -미안합니다. 사정이 어려워져서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셋째 달.

    겨우 80만원이 입금되었고 2주가 지나 다 들어오기는 커녕 또 50만원만 입금이 되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달 월급날이 되어서야 전 달의 월급이 다 들어왔는데 그 달 원래 받아야 하는 월급은 한 푼도 들어오질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다.

    -원래 이런 식이었나요?

    -아니.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왔었어. 오래 전에 한 번인가, 두 달 정도 월급이 이런 식으로 밀린 적이 있었다는데 내가 다니는 동안은 그런 적이 없었지.

    -바뀐 사장 때문에 망하는 거 아닌가 몰라.

    -재수없는 소리는 하지 말자고.

    이런 때에 누군가는 쉽게 말하곤 한다.

    임금 체불을 하면 그냥 때려치고 신고하라고.

    하지만 강예지는 쉽게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길 그만두는, 그런 식으로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강예지의 삶에는 없었으니까.

    결국 나아지겠지, 버텨 보자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월급도 어찌되었든 조금씩이나마 나오고 있으니까.

    허나 분노만큼은 어쩔 수 없다.

    강예지에겐 말 그대로 생계가, 삶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월급이 제때 들어오지 않아 공과금을 내지 못하고 생필품을 사지 못하고 계획해 두었던 모든 것들이 어그러지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비참함을, 겪지 못한 이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배경석을 노려보는 강예지의 새까만 감정은 거기서 기인한다.

    '현명하게' 판단하면 이런 곳은 당장 때려쳐야 한다.

    일할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강예지는 그런 선택조차 하기 힘든 처지에 있었고, 결국 '병신 같은 선택'을 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어쩌지 못한 분노까지 더하여 배경석을 원망하는 게 고작이었던 거다.

    "곧 상황이 나아질 거예요. 조금만 함께 견뎌 주세요."

    "……."

    어느새 겨울.

    공장을 나와 퇴근하는, 그러나 출근하는 강예지는 겨우 가졌던 자그마한 희망마저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억누르며 걸었다.

    함께 공장을 나온 배경석은 그런 강예지의 어둑한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차에 올랐고, 마치 사람이 바뀐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배때기를 따 버리고 싶네. 씨발년."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장에서 인간 백정으로 변해 버린 배경석이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만지작거린다.

    허나 기이한 건, 분명히 명함의 형태를 한 닳고 닳은 그것이 어떤 상호도 이름도 번호도 인쇄되지 않은 백지였다는 거다.

    하도 만지작거려 닳고 닳은 그것을 쥔 배경석이 어느 순간 결론을 내린 얼굴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 앱을 켜 명함을 비추자 어딘가로 전화가 걸렸고 그가 말했다.

    "네, 사장님. 물건 하나 거래하고 싶어서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