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90화 (590/741)

589화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영역.

현실에서의 모든 구속을 벗어 던졌기에 무한히 자유롭지만, 그것이 구속이면서 동시에 지지대였기에 경계를 넘어선 영역은 바로 서는 것조차 버거운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까지 어깨를 펴고 당당히, 꼿꼿이 고개를 든 채 걷던 오군성은 결국 멈춰서고 말았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나아갔건만.

나아갈 길은 보이지 않고 그저 헤매이고만 있다.

이 세계에서 나아간다는 건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심지어 도달한다는 확신조차 없으면서도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끝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쳐 가는 것과 비슷하다.

의지할 곳 없이, 기약도 없이, 계속해서 헤엄치지 않으면 물살에 떠밀려 표류하고 마는 그런 끝없이 가혹한 여정.

오군성은 평생을 그러했던 것처럼 어찌되었든 굴하지 않고 걸었으나 그것이 전진이 아닌 퇴보가 되는 현실에, 언제까지고 마르지 않을 것 같던 의지가 결국 바닥을 보였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윽고, 멈추고 말았다.

공허했다.

경계를 넘어섰고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며 그 이상의 시련에도 당당히 걸었는데.

너에게 허락된 건 여기까지라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꺾이고 초라해진 때에 오군성은 만난 것이다.

하늘 밖의 하늘을 목표로 하는, 거기에 가까운 자를.

발신인도 없이 전해진 편지의 필체로 짐작은 했다.

이 편지를 쓴 자가 자신 이상으로 강한 무인일 거라는 건.

그러나 그렇게 예상을 하고 인정까지 했음에도, 직접 마주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인의 경지는 충격적일 만큼 아득했던 것이다.

오군성에겐 허락되지 않은 영역.

손을 뻗어도 결코 닿을 수 없으며 제대로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머나먼 곳.

그는, 현실의 경계보다 하늘 밖의 하늘에 더 가까운 곳에 있는 무인이었다.

"그자는 나보다 열 살이 더 많더군. 하지만 그자가 서 있는 곳은 내가 백 년을, 아니 천 년을 걸어도 좁힐 수 없을 만큼 멀었지."

모래에 절반쯤 파묻힌 채 오군성이 읊조렸다.

그 읊조림에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천외천에 들었어. 이정표를 찾으려 했지."

길이 보이지 않아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천외천에는 오군성 외에도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무인들이 있었으며 그보다 더 앞서 걷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보고 길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집을 꺾고 조언을 구했지. 그러니까 그자가 말하더군. 너는, 길을 걷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지 않느냐고."

"그리 많은 짐을 쥐고서 어찌 먼 길을 가겠느냐고 하더군."

길을 구하는, 구도(求道)는 멀고 먼 고난의 여정이다.

그 여정에 있어 어깨를 무겁게 하는 짐을 놓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오군성은 그런 도가적인, 혹은 불가적인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길을 잃고 헤매는 지금 받아들이는 게 옳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였네. 내가 가진 것들을 놓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

평생을 일군 오성 그룹을 조금씩, 단번에는 안 되어서 조금씩 놓으려는 노력을 하였고 그것이 외부에서 보기에 은퇴하려는 준비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조언을 받은 게 있으니 나는 천외천의 뜻에 따라 자네를 만나고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곳에 온 게야."

"그랬군요."

도진은 그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진을 사막에 반쯤 파묻혀 물끄러미 쳐다보다, 오군성이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가, 잘하고 있는 것 같은가?"

도진은 그제서야 오군성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제 스승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길은 각자가 밟은 곳이 길이다, 라고."

"……."

오군성은 와닿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 세상엔 아주 많은 답이 있고 회장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정답이 되기도, 오답이 되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제 생각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건 분명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짐이 소중하다면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중한 짐을 지고도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힘들겠죠. 버리는 게 더 편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회장님은 평생을 타협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대로 해서 기어코 성공해 오지 않으셨던가요?"

"……!"

오군성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삶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쥐뿔도 없는 놈이었다.

그 쥐뿔도 없는 놈이 꿈만 더럽게 컸는데 심지어 포기할 줄도 모르는 꼴통이었다.

그래서 도전했다.

미친듯이 힘들고 미친듯이 괴롭고, 그러고도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이 목표가 멀었는데.

그래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느새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너머가 보였다.

"회장님의 삶이 그러했고, 무공이 그러했죠."

쥐뿔도 없는 놈은 오성의 회장이 되었고 사자군이 되었다.

그때도 그랬다.

먼 곳 따위 보이지 않았고 도달할 수 있으리란 약속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달릴 수 있었던 건.

"그 원동력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굽히지 않는 전진이었을 겁니다."

그 삶이 깃든 것이 사자천권이요, 이내 이루었던 것이 사자패권이 된 것이다.

"회장님이 길을 잃은 건 외부의 이정표가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 속의 이정표를 잃어서는 아닐까."

도진이 씨익 웃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군성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웃었다.

"크, 크흐흐."

미친듯이 웃었다.

"크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웃는데 마치 우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만 가득한 것이었고 오군성은 평생을 그러했던 것처럼,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고집이었다.

푸스스-

그리고 모래 속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그놈의 말이 맞는 거 같아. 내가 너무 많은 걸 쥐고 있었어."

"그랬던가요?"

"그래. 쥐뿔도 없던 놈이 너무 많은 걸 쥐었더니, 앞이 안 보이고 있었던 거야."

"그럼, 놓으실 건가요?"

"어림도 없는 소리지. 이런 것들을 쥐겠다고 이 악물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놓으라고? 안 될 말이지."

오군성이 배고픈 사자와 같은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더 많이 쥐어야지. 하늘 밖의 하늘까지 말이야."

도진도 하하 웃었다.

"좋은 욕심이네요. 원래 사람이 발전하려면 결핍이 있어야 한다고 하죠."

"좋은 말이군."

오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도진을 진지하게 보았다.

"그래서 말이야, 자네."

"네."

"성아와 식은 언제 올릴 건가?"

"네?"

"증손주가 보고 싶어졌어."

"……."

* * * *

-오군성 회장이 사업을 확장하려는 것 같다.

근래 들어 새로이 정보 단체 사이에 돌게 된 이야기였다.

자식과 손주들에게 '권력'을 나눠 주기에 후계를 찾고 은퇴를 하려는가 했더니 사실은 더 크게 판을 벌리기 위한 방침이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초인이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설령 인재에게 실무를 맡긴다 해도 모든 것을 직접 총괄하려면 범위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세간에 도는 '오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금화는 넘지 못할 것이다'라는 평에는 그런 근거가 있었다.

오군성이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는 어쩔 수 없는 약점으로 남을 것이었는데.

드디어 그것이 바뀌었다.

여전히 오군성은 오성의 절대군주다.

그러나 그 아래 자식과 손주들을 기용하여 더욱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 '더 큰 욕심'을 품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맡길 수 있는 자잘한 것은 맡긴다.

대신 더 큰 것을 잡기 위하여 오군성은 다시 전면에 나섰고 그 기세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와 맞닿은 세력 중 하나가.

[오성 그룹, 천마신교와 손 잡나?]

천마신교였다.

-ㄷㄷㄷ 머임 갑자기?

-이 정도면 거의 세계관 최강자들의 퓨전 아니냐?ㄷㄷㄷ

-소천마랑 성아 여신님이랑 결혼한다던데?

-이게 뭔 소리야 ㅋㅋㅋㅋㅋ

본래 오성과 천마신교 사이에는 많은 인연이 있었다.

소천마가 아직 잠룡이란 별호를 얻기 전부터 시작하여 천마신교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오성아까지 걸쳐서 깊게 말이다.

하지만 사업적으론 명백하게 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급격히 좁혀지는 신호들이 있어 재계는 물론이요 무림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천마신교와 오성의 동맹이라니.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으니까.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해외의 여러 분야에서 협업을 위한 만남이 계속되고 있었으니 오군성의 직접 지시였다.

그런 갑작스런 변화에서 혈연을 통한 동맹, 소천마와 오성아의 결혼이라는 뜬금없지만 설득력 있는 소문이 돌았으니 당사자인 오성아가 물었다.

"할아버지랑 도대체 뭔 이야기를 했길래 증손주 이야기가 나온 거야?"

"음, 인간이라면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욕심을 부려야 한다는 이야기요?"

오성아는 도진의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에 귀엽게 입술을 부우, 내밀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자 농담의 영역이니 깊게 생각할 부분은 아니었다.

사실 싫은 건 아닌데, 아무래도 경쟁자들이 너무 쟁쟁하다보니 여기에 끼는 건 '편한 삶'을 지향하는 오성아와는 맞지 않는 일이다.

뭐,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한국으로 도진은 돌아왔다.

동생들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였고 어머니의 고마워라는 말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거, 꼭 쓰셔야 돼요. 김치 담글 때도 옆에 두세요."

"얘는."

"물건이라는 건 쓰라고 있는 거니까요. 집에 아껴 두실 거면, 그렇게 너덜너덜하게 된 뒤에 해 주세요."

"알았어, 그래."

그런 느낌의 하루를 보냈고 다음날에는 총괄부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셨습니까."

"네."

늦은 밤.

하오문의 숭무지부에 방문하여 전서린과 마주하였다.

"천외천과 만나 보기로 했어요."

거두절미하고 도진은 본론에 들어갔다.

"예."

오군성이 찾아온 건 도진을 천외천에 초대하기 위해서였다.

그 부분에 대해선 긴 말을 나누지 않았는데, 애초에 도진 쪽에서 그 접촉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천외천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해.

-네. 약속을 한 번 잡아 보죠.

우선은 천외천의 핵심이 되는 이들과 한 번 만나 보기로 했다.

거기서 무엇을 물을지에 관해서 나지윤을 포함한 총괄부와는 이미 이야기를 해 두었다.

그리고 오늘.

전서린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 목적은 간결하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림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그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은 천외천이 가장 가까운 가능성이다.

도진은 거기서 천마신교에 대한 단서를 원한다.

소천마 김도진이 천마신교의 부활을 선포하였으나 기대하였던 교도들의 접촉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사기꾼이나 두엇이 기웃거렸을 뿐이다.

혹시나. 정말로 지금껏 만난 이들 이외에 천마신교의 맥은 이어지지 못한 것일까.

그에 관한 사소한 것이라도 무언가 단서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서린은 자신의 근원에 대한 단서를 원했다.

그곳으로 도달하기 위한 길이 모두 막혀 있는 지금.

천외천에 또 다른 길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진에게 건넨 그림들이었다.

전서린이 꿈 속에서 본 장면들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어릴 적부터 연마하여 그림 실력이 탁월한 전서린이었기에 흐릿하지 않고 명확하게 배경과 인물들이 그림에 투영되었다.

그것들을 잘 챙겨 나온 도진은 숭무지부를 나와 천마전 안에서 다시 진지한 얼굴로 펼쳐 보았다.

배경은 특별하지 않다.

허나 그 배경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도진을 진지하게 만들었다.

동양인이다.

언뜻 보면 중국 사람 같은데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서양인이라면 전혀 구분하지 못할 만큼 미미한 차이.

허나 도진이기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파고들면 그들은 동양인이지만 중국인은 물론이요 한국인과도, 일본인과도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특징을 가진 얼굴들을, 도진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무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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