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무도관 내의 사람들은 최소한으로만 의복을 갖추었다.
움직이기 편한 반바지, 트레이닝 하프팬츠 차림이고 여자는 거기에 브라톱을 더 입은 정도이니 가린 면적보다 드러난 면적이 훨씬 많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이들은 결코 음심(淫心)이 동할 수 없을 것이었으니 넓은 무도관을 가득 채운 것이 색(色)이 아닌 무(武)이기 때문이었다.
드러난 몸을 구성하는 것은 근육이다.
역동적이고 또 탄력적인 근육은 켜켜이 쌓이고 또 짜올려진 단련과 극기의 결과물이요 그를 통하여 펼쳐지는 초식은 끊임없는 무도(武道)의 추구이니 이곳을 가득 채우는 것은 색이 아닌 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도관을 가득 채우는 무를 자아내는 이들 중 한 명이, 도진의 친구 오대용이었다.
한국에선 제법 하얬던 몸이 보기 좋게 그을려 구릿빛이 되었다.
그런 오대용을 몰아치는 건 190에 달하는 장신의 바할라 무인이다.
'엑소시아 후보생.'
도진은 그를 알고 있었으니 천마신교의 교도로 슈미트라 직속 왕실타격대, 그러니까 투마전에 들기 위하여 매일을 노력하는 무인이었다.
190에 120킬로, 그러나 완벽한 신체 밸런스를 이루어 날렵함마저 갖춘 그의 공세는 강렬하면서도 초식의 연계가 부드럽게 계속돼 웬만한 이는 반격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할 만큼 훌륭하다.
선수를 빼앗긴 오대용 또한 섣불리 반격하지 못하고 수비적으로 일관하였으나 눈빛만큼은 분명히 살아 있어 상대가 방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쿠웅-!
그렇게, 전혀 방심하지 않는 상대에게 오대용이 커다란 진각으로 형세를 바꾸려 하였다.
수세에 몰려 있음에도 크게 내딛는 진각과 이어지는 정직한 일권(一拳)은 일견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그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일권이 형세를 뒤집는다.
사자천권(獅子穿拳).
거침없이, 강렬하게 내뻗어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는 기세를 담고 있는 일권이다.
거기에 담긴 이치를 체화하고 한 점의 의심없이 스스로를 완벽하게 믿으며 내뻗은 일권은 그렇기에 정직한 만큼 묵직하게 상대의 공세를 받아치는 것이다.
꽈아아앙-!!
바할라의 무인 또한 물러서지 않고 거기에 정면으로 격돌함으로써 퍼져 나가는 기파(氣波)가 넓은 무도관을 가득 채운다.
"좋네."
"그렇네요."
유지은의 말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들어오며 도진은 자신을 가리던 것을 벗었으나 내부의 무인들은 예를 취하지 않는다.
소천마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이다.
소천마는 이곳의 신성한 대련을 존중하니 그 마음을 존중하여 내부에 가득한 무를 흩트리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까지 더하여 도진은 조금 흥이 나고 말았다.
꽤 오랫동안 못 보았는데.
그 사이에도 오대용은 꾸준히 자신의 권을 연마하였다.
진창에 처박혔음에도 무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고 매일 계속하였던 가장 기본이 되었던 지르기.
기본(基本)은 곧 바탕이자 뿌리이니 오랜 세월 단단히 자리잡은 뿌리는 깊고 또 단단하여 그 누구에 견주어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오랜만에, 그 권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스윽-
"오."
웃통을 벗었고 유지은이 감탄하여 눈을 반짝였다.
위연서 또한 감히 불경하다 생각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보아도. 아무리 보아도 빠져드는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몸이어서.
매일 한계를 넘어선 흔적이 쌓이고 또 쌓여 이루어진 그 몸은 자체로 사람을 압도하고 홀리게 만든다.
그렇게 상체를 드러낸 도진이 비무를 끝낸 오대용의 앞에 섰다.
"오랜만에 한 판?"
오대용이 씨익 웃었다.
"좋지."
꽈아아앙-!!
* * * *
"어휴. 하여간 자비가 없는 놈."
"많이 늘었네, 너."
무도관을 나온 도진의 일행이 한 명 늘었으니 다름 아닌 오대용이다.
도진과의 비무로 모든 힘을 소진한 오대용이 그날의 비무를 끝내고 동네 관광을 다니기로 한 일행에 합류한 것이었다.
"내가 여긴 좀 잘 알거든."
제법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한 오대용이었는데,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오대용은 이곳의 지리를 현지인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으며 인간관계 또한 몇십 년은 이곳에서 산 마당발만큼이나 훌륭했다.
어느 잡화점 앞.
"여, 대용."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물건을 하루 일찍 받게 돼서 말야."
또 어느 노상 카페 앞.
"어제 싸우시더니 오늘은 금슬이 좋으시네요."
"시원하게 마음을 터놓고 주먹을 나누었지."
"하하."
현지 주민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개인사 또한 언급할 정도였는데 오대용이 이곳에 본격적으로 발령이 난 게 몇 개월 되지 않았으며 중간에 무림대회의 일까지 맡았음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에이레는 좋은 문화야."
에이레.
바할라의 문화로 비무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는 신성한 결투다.
거친 말은 영혼을 더럽히며 정신을 오염시킨다.
호전적인 바할라의 사람들은 그것을 경계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고 상대를 정중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몸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말보다 깊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이 문화가 오대용을 이렇게나 이곳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외국에서의 사업에서 특히나 중요한 게 '현지화'라는 걸 생각하면, 오대용은 무도관에 매일 출석함으로써 꽤나 훌륭하게 현지화에 성공한 모양새다.
그런 오대용이 가이드 역할을 해 준 덕분에 도진 일행은 제법 즐겁게 동네 관광과 쇼핑을 할 수 있었다.
"이거랑 이거 주세요."
"예."
도진이 귀국하여 건네 줄 선물로 산 건 일단 두 개의 망토였다.
바할라의 전통 문양이 들어간 망토는 봄과 가을 등에 쓰기 적당했는데, 유진이와 호진이에게 줄 것이었다.
호진이는 본래 추위를 잘 타는 아이였다 보니 따듯한 걸 좋아했고 연호신공으로 체질을 개선한 지금도 무언가를 두르고 있는 걸 좋아했다.
유진이의 경우 아이돌 특성상 무대 의상을 입고 대기하는 일이 많을 텐데, 그럴 때 두르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 외엔 독서를 좋아하는 호진이를 위한 바할라의 서적이나 군것질을 좋아하는 유진이를 위한 특산물 같은 걸 샀다.
어머니를 위한 선물도 물론 잊지 않았다.
무얼 드려야 하나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전생에 해드리지 못했던 명품 가방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
"선배는 뭐 갖고 싶어요? 연서 너도."
"음. 더 다녀 볼래!"
"망극하나이다."
함께 해 준 유지은과 위연서에게는 가방을 사기 위해 방문한 명품 매장에서 머리 장식을 사 주었다.
"고마워. 잘 쓸게."
"네."
"아! 그러고 보니 후배는 생머리가 좋아, 묶은 머리가 좋아?"
"예쁘면 다 좋아요."
"응, 그렇구나. 그럼 난 뭘 해도 좋겠네?"
"그렇죠."
"헤헤."
"평생 보물로 간직하겠나이다."
"아끼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보관만 하면 안 돼."
"예. 그러겠나이다."
두 사람 다 비단 같은 머릿결을 자랑하는데, 수련을 할 때 그 머리를 묶을 수 있으니 실용적이면서도 항상 몸에 지닐 수 있는 선물이었다.
"땡큐. 덕분에 편하게 다녔네."
그렇게 쇼핑을 끝내고 나니 얼추 시간이 되어 공식 일정인 신도시 건설 현장의 시찰을 나가게 되었다.
여기에는 슈미트라 왕세자는 물론이요 오전에 함께 다녔던 오대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 오성 그룹이었고 그 책임자로 갑자기 발령난 게 오대용이었으니까.
쿠구궁-
쿠르르릉-
공사 현장 특유의 소음과 먼지가 인다.
하지만 그것이 불쾌하지 않은 건 현장이 그 이상의 생기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계획된, 그러나 그 안에 기계적인 획일 대신 예술의 감성을 채워 넣고 있는 도시는 아직 윤곽뿐임에도 감탄이 나온다.
"좋은 도시가 되겠네요."
"예. 그렇게 만들고자 합니다."
슈미트라는 새롭게 건설되는 신도시를 첨단 산업과 누구에게나 열린 배움의 터로 채우고자 했다.
이렇게 세워진 도시에 배움에 열의를 가진 이들이 모일 것이고 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길 원하는 인재들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이들을 위한 문화 공간을 조성할 것이니 문화 또한 꽃피울 것이다.
그렇게 슈미트라는 산유국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가진 나라로 바할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다.
도진은 그 열의에 미소지었고 시찰이 끝난 이른 저녁.
슈미트라의 꿈을 실현할 신도시의 건설에 일조하고 있는 아버지와 벽태웅을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많이 타셨네요, 아버지. 태웅이 너도."
본래 도진은 피부가 하얗고 고운 편이었는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도진은 여전히 피부가 하얀데 그 피부를 물려준 김서우는 뜨거운 태양 아래 있다 보니 벽태웅과 함께 구릿빛이 되었다.
"더 멋있어지셨어요, 아버님."
"하하. 고마워요."
유지은이 상견례에서나 볼 법한 미소지은 얼굴과 톤으로 말하고 김서우는 멋쩍게 웃었다.
김서우와 도진, 유지은에 위연서, 벽태웅까지 다섯 명이 고기를 구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태웅이네랑 협업하시는 거네요."
"그렇게 되었지."
"잘 됐네요."
김서우는 벽태웅의 회사와 협업 관계가 되었다.
규모가 부족한 편인 김서우의 회사와 벽태웅의 회사가 함께 일을 수주하는 형태다.
그리고 그렇게 수주한 작업을 하면서 김서우는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벽태웅에게 전수하고 있었고 벽태웅은 그런 김서우를 두 번째 스승처럼 극진히 모시는 게 보였다.
그것은 벽태웅이 바라던 것을 김서우가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었으니까.
벽태웅이 대표로서 문파를, 회사를 차린 건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서다.
보육원을 나가면 무얼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다만 그것이 그저 몸을 쓰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벽태웅은 아이들이 대체할 수 없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는데 그를 위한 것들을 김서우가 아낌없이 베풀어 주고 있으니 과연 두 번째 스승이라 할 만했다.
도진은 그런 관계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전혀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거라 생각한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역시 다르니 이렇게 흡족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노사님도 이번 학기 수업 끝내시면 바할라 오신다고 하셨지."
"예. 아무래도 이곳에 꽤 오래 머물 것 같습니다."
소거인 강거혁.
벽태웅의 스승인 그는 아직 숭무고에 교사로 머물고 있었는데, 벽태웅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바할라로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머지 않아 경계를 넘게 될 그가 이곳에 있는 건 김서우의 신변 또한 더욱 안전하게 만들어 줄 일이었으니 도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때?"
여기서 아이들은 보육원의 아이들이다.
아무리 바할라가 한국에 좋은 이미지라 해도 어쨌든 외국이니 외국으로 건너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벽태웅은 씨익 웃었다.
"장남으로서 아이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곰'과 같은 벽태웅은 머리가 좋고 그만큼 걱정도 많은 타입이었다.
한데 이렇게나 '막연한' 대답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후배의 성장에 도진은 또 한 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 * * *
다음날.
평소와 같이 새벽에 일어난 도진은 나지윤을 통해 의외의 정보를 듣게 되었다.
-오군성 회장이 오늘, 바할라의 신도시 건설 현장을 방문할 거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