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가령, 일반인이 눈뜨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초인이 되었다면.
가볍게 수 미터를 솟아오르고 아무런 기술없이 그대로 착지하여도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몸을 가지게 된다면.
심지어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육체 능력에 불과하고 아직 잘 모르는 초능력까지 잠들어 있다면.
그것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하여서는 제법 많은 노력과 궁구가 요구될 것이다.
갓 화경에 오른 무인을 바로 그러한 처지에 비유할 수 있었다.
무림인이란 본래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하고 또 그 육체를 극한까지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자들이다.
여기에 기(氣), 내공(內功)을 더하여 한계를 초월한다.
그리고 이내 현실마저 초월한 것이 화경이니 화경을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화경의 초입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단계다.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초입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초월의 영역은 넓고 또 새로운 것이다."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좁디좁은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와 새로이 접하게 되는 '밖'은 그만큼이나 아득하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짓누른다.
"유약한 자는 그러한 이유로 평생을 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하고 그곳에 갇히기도 한다."
자신의 한계조차 알지 못한다.
한계를 알지 못하니 한계 너머의 영역으로도 나아갈 수 없고 영원히 초입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초인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손목에서 철보다 단단하지만 고무보다 유연하고 탄력 있는 거미줄이 나가는 '특수 능력'을 얻었다고 해서 누구나 빌딩숲을 아무런 망설임없이 뛰어다니고 거미줄을 타고 허공을 유영할 수는 없다.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용기를 내 '실행할 수 있는' 이만이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는 법이니까.
심(心)을 단련해야만 하는 이유다.
"이 시대의 한심한 것들은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단 말이지."
"하하."
도진은 옅게 웃었다.
어느 정도는, 그래 솔직히 '꼰대' 같은 발언이지만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이 시대의 무인들은 가진 게 너무 많으니까.
손에 쥔 것이 너무나 많아 운신에 제약이 있고 그것을 잃는 것을 또 두려워 하기에.
쉽사리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지 못하곤 했다.
이를테면, 스스로는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리암 드가모마저도 그 부류에 있었다.
"그에 비에 우리 제자는 단련의 클라스가 차원이 다르지."
위지혁이 씨익 웃었다.
천마신공의, 위지혁이 새로이 정립한 천마신공의 6성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나아가는' 단계다.
사실 도진은 천마신공의 4성에 이미 이 영역을 걷고 있었다.
언뜻 모순이 되는 이야기지만 심상세계와 도진의 결코 부러지지 않는 심지, 그리고 두 스승 위지혁과 장호의 이치를 깃들이는 수련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했지만 심상세계에서는 '천마군림'을 통하여 초월의 영역을 걸을 수 있었다.
그 초월의 영역에서 위지혁과 목숨을 건 대련을 함으로써 매일 한계를 시험받는 수련을 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드디어.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깨달음을 얻으며 도진은 천마신공의 5성에 올랐고 그동안 빠져 있던 경험에 '핵심'을 채워 넣음으로써 단시간 내에 6성에까지 이르렀고 그 확인을 했던 것이 단신으로 포로들을 구출했던 작전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무모합니다.
-혼자서 포로들을 구출하겠다니.
타당한 발언이었다.
허나 그것이 아니고서는 포로들을 안전하게, 그들의 경계를 단번에 파고들어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때문에 도진은 모든 책임을 지고서 작전을 강행하였고.
-…….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작전을 성공시킨 도진을 또 한 번 용병들이 경이에 찬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당시의 감각을 도진은 되새겼다.
천마군림을 통하여 세계와 연결되었다.
깨달음없이 구현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선명하게 세상을, 기로 가득한 세상을 느낄 수 있었고 온전히 감각을 동화시킬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감각이 벼려졌고 그것은 음속을 넘어선 지극히 작은 것마저 완벽히 파악하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을 육체와 기(氣)가 완벽히 따라갔다.
테러범들은 느낄 수조차 없는 차원에서 호신강기(護身罡氣)를 둘렀다.
그들이 절망하며 생각했던, '말도 안 되는 기술의 철갑(鐵甲)'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호신강기라 해도 무수한 총탄을 완벽히 막을 수는 없다.
그저 칼에 두르는 검기만 해도 내공의 소모가 막심하여 현대에서는 화경의 고수라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만 발현할 정도인데 그것을 온몸에 두르는 건 비교도 할 수 없는 내공의 소모를 가져온다.
여기에 충격을 막기 위해 소모되는 내공은 별도이니 이 현대에 호신강기가 소설의 영역에 있는 건 사실 내공 문제가 가장 컸다.
도진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영역에 있는 천마의 가르침으로 훨씬 효율 좋은 내공의 운용으로 호신강기를 사용하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니 소모 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무수한 총탄의 세례를 무한정 막을 수는 없었으니 애초에 화경의 경지에서 펼치는 호신강기의 강도가 그것을 버틸 만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공에 의한 회복보다 파괴력이 더 컸다.
그러니까 총탄을 막은 건 호신강기에 아득한 이치가 더해진 결과였다.
세상과 연결된 감각이 총탄을 완벽하게 인지하였다.
그렇게 인지한 총탄이 호신강기에 격돌한 순간 다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충격을 가했다.
너무 강하지 않게, 그저 궤도를 아주 약간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만.
그 다음은 무흔잠영을 통하여 깨달은 '선(線)'의 이치에 따라 즉각 반응하고 이어지는 총탄끼리 교차하는 궤적을 조율하면 된다.
소수의 총탄은 호신강기로 막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총탄끼리 서로 부딪쳐 힘이 상쇄되게 만드는 것이다.
말이 쉽지 찰나를 쪼갠 순간에 무수한 총탄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그것의 궤적을 조율하는 건 현실을 넘어선 영역의 일이다.
허나. 그 현실을 넘어선 영역에 이르러 더 나아가기 시작한 게 도진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할 수 있었다.
"네가 진실로 천마라 불리게 될 날도 그리 멀지는 않겠구나."
위지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천마신공의 5성이 소천마라 불리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라면, 오롯이 천마라 불리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은 9성이었다.
다만 이것은 위지혁이 새로이 정립하지 않은 천마신공의 기준이니 그에 해당하는 새로운 천마신공의 경지는 8성이다.
경계를 넘어선 곳에 펼쳐진 아득한 세상. 그 세상의 하늘마저 넘어서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
허나 위지혁은, 그리고 장호는 자신들의 제자가 그 영역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고.
"그럼, 또 한 번 비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부님."
"허허. 오냐."
단 한 점의 의심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 * * *
스윽-
바할라에서도 도진은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떴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우선 총괄부의 오성아, 한유아와 화상 통화로 회의를 해야 했고 나지윤에게 매일 갱신되는 정보도 듣고 숙지해야 했다.
그리고 숨 쉬는 것과 같은 연신극기공의 단련으로 몸을 풀고 의뢰를 수행하기 위하여 함께 온 정의검가의 유지은과 대련을 한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유지은과의 대련은 도진의 향상심을 자극하며 때때로 그 천재적인 번뜩임 또한 도진에게 깨달음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이 대련은 서로에게 지극히 이로운 대련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응!"
유지은이 땀에 범벅이 되어서야 대련이 끝났다.
새하얀 얼굴에 달라붙은 까만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 모습으로 유지은은 씨익 웃더니.
슥슥-
"왜 남의 팔을 쓰다듬으시나요, 선배."
"왜 땀이 안나나 만져보고 싶어서."
"큰일나실 분이네요."
"괜찮아. 후배한테 말고는 안 하니까!"
"샤워하러 가죠."
"응!"
깔끔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난 뒤엔 해가 들어오는, 통창을 통하여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아침을 먹는다.
이 자리엔 또 한 명 천마신교의 교도가 함께 하니 스승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소천마를 보좌해야 한다는 지고의 사명을 가지고 남은 위연서다.
둘만 있었다면 결코 겸상을 할 수 없다며, 그러다 그냥 같이 먹자는 말에 성은이 망극한 기세였을 위연서였지만 다행히 이곳엔 여러 시선들이 있다 보니 평범하게 행동하고 있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와도 괜찮은데 말야.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소지존의 곁에서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나이다."
…뭐, 이런 모습은 어쩔 수 없었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따르는 모습이 결코 싫을 순 없어서 도진으로서도 위연서에게 조금 더 거리를 허락하고 만다.
이후의 일정을 말해 준다.
"오후에 현장에 가서 아버지도 뵙고 태웅이도 볼 거야."
"예."
현장이란 테러의 위협이 종식되며 재개되는 신도시 건설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와 도진의 후배 벽태웅이 일하고 있으니 빠르게 귀국하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내어 방문하기로 한 것이었다.
"저녁도 먹고 올 거야?"
곁에서 토끼처럼 옴뇸뇸 샐러드를 오물거리던 유지은이 물었고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슈미트라 왕세자님과의 시찰도 있으니까요."
이번의 방문은 공식적인 행사를 겸하여 슈미트라 왕세자와 함께 한다.
소천마와 왕세자 겸 투마전주의 격려 방문인 것이다.
그 방문이 끝나면 늦은 오후가 될 테고 자연스레 저녁을 함께 하며 회포를 풀게 되는 거다.
"그렇구나아. 그럼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돼? 아버님도 같이 뵙고."
유지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도진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거 없죠. 연서도 같이 저녁 먹을 거고."
"망극하나이다."
"응!"
그렇게 오늘의 일정이 정해졌다.
일단 슈미트라와 만날 오후까지는 조금 시간이 비어서 무얼할까 생각하던 도진에게 유지은이 제안했다.
"여기도 한 번 둘러보는 게 어때?"
"음, 괜찮네요."
이곳은 신도시 건설을 위해 먼저 재개발된 도시다.
수많은 자국과 외국의 사람들이 머무는 곳답게 베드타운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닌 상권 또한 크게 발전하였으니 볼거리가 적지 않았다.
돌아다니다 보면 선물로 사 들고 갈 만한 것도 보일 것 같아 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하여 유지은과 위연서를 대동하고 나들이를 나갔다.
히잡과 비슷한 천을 쓰고 품이 넓은 망토를 둘렀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 비슷한 차림을 한 이들이 많아 시선을 모으지 않고 여유롭게 도시를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느긋한 걸음으로 그동안 '전쟁 모드'라 즐기지 못했던 바할라 관광을 시작하려 했는데…….
'음?'
조금 걷다 보니 익숙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오대용의 기척이었다.
거기다.
-하아아압!
쿵-!
아무래도 격렬히 대련을 하고 있는 듯했다.
"왜 그래?"
멈춰 선 도진에게 유지은이 물었다.
도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대용이가 저기서 대련을 하고 있길래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의 끝에는 원형의 커다란, 콜로세움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무도관 건물이 있었다.
"한 번 가볼까요?"
"응."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었기에 도진은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고.
"오."
오대용을 포함한 무인들이 모두 웃통을 벗고 땀을 흘리는 아주 후끈한 내부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