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가출'한 유지은은 도진의 장기 출장을 아쉬워했다.
그것은 비교적 짧지만 객관적으로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군중 속에 있음에도 혼자 살아오다 처음으로 '함께'라는 걸 알게 해 준 도진의 빈자리였다.
동등한, 아니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이의 뒤를 따라 마음 놓고 전력을 다해 달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데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다.
허나 그렇다 해서 유지은이 다시 혼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유지은이 혼자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천장을 눈을 뜨며 보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씻고 식당으로 가면 숭무고 동기인 한유아를 볼 수 있다.
"안녕."
"응, 안녕."
간단하지만 색채가 깃든, 그러니까 감정이 깃든 인사를 나누고 메뉴를 정하고 있자면 몇 명이 더 다가온다.
어느 날은 오성아다.
"밤새셨어요?"
"응. 결재해야 할 게 좀 있어서."
물음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문득 도진이 말했던 '슈퍼 울트라 레어 도비'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말았으나 인간 관계에 대해 익힌 유지은은 그 단어를 꺼내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대신.
"그래도 언니 피부는 매일 윤기나네요."
그녀의 칭찬을 했다.
"우리 교주님이 그러라고 준 단련공이 있거든."
"와, 그거 팔면 돈 엄청 많이 벌 수 있겠네요."
"가능하다면 연구해서 화장품 쪽으로 사업을 벌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해. 난 안 할 거지만."
앞서 불사마공의 내공 거부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연구 프로젝트에 끌려간 약리지의 사례가 반면교사가 되어 주었다.
그때 도진은 그야말로 사악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교주는 맷돌 손잡이를 잡을 뿐이다.'
유지은은 그 명대사(?)를 떠올리며 한유아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응, 그런 쪽은 기업 출신인 유아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난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람이야."
또 어느 날은 우서진과 클로에.
"안녕. 오랜만에 보네?"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우서진과 클로에는 무림인이면서 명장의 제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무림인만 하기도 힘든데 명장의 제자이면서 가업을 잇기까지 해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어 얼굴 보기가 힘들다.
다만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로 인한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아 역시나 즐겁다.
차이는 있지만 도진에게 구원받았다는 공통점이 하나로 묶어준다.
"오늘도 도진이네 집에 가?"
"네."
이곳에 함께 살고 있는 상미와는 여러 번 얼굴을 보게 된다.
거의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들고 도진이네 집에 가 동생들을 챙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냐아앙-
상미의 어깨 위에서 재주 좋게 식빵을 굽고 있는 새하얗고 귀여운 솜이의 존재가 어쩐지 강력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게 만든다.
솜이는 저 기분 좋을 땐 놀자고 냥냥 펀치를 날리지만 내키지 않으면 눈길도 잘 주지 않는 도도한 녀석이다.
소소하고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 버리는 시간들.
허나 그 시간이 유지은에게는 소중하고도 특별했다.
세상에 색이 입혀지고 더 이상 혼자는 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 버린 도진과는 잠시 떨어졌지만 그것을 메꿔주는 감정을 매일 느낄 수 있었기에 유지은은 색채가 깃든 미소를 지은 얼굴로 살 수 있었다.
무(武)의 길을 걷는 것 또한 그랬다.
도진이 이미 알려주었다.
때로는 걸을 줄도 알아야 한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보고 느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치였다.
"의뢰요?"
"그래."
"네. 같이 갈게요."
말이 가출이지 사실은 외박. 아니, 그냥 아는 남자 후배네의 커다란 집에서 머무는 중이었으니 집에서의 연락이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집에 간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집이 마치 살을 에일 듯한 설원(雪原) 같았던 때가 있었다.
혼자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으나 누구 하나 색을 가지지 않았고 온기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의식 중에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하고 있던 재능의 부작용,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사실은 자신 또한 타인을 밀어내고 있었음을 깨닫고 바뀌면서 이제 집에도 온기가 피어났으며 꽃이 피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서로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된 친척들과의 의뢰도 거리낌없이, 웃으면서 함께 갈 수 있었다.
"화산파의 의뢰야."
"화산파요?"
"응. 그 화산이 없어서 라면 끓일 때 넣으면 좋은 파의 의뢰."
"……네에."
사촌 오빠, 하지만 마음 같아선 아저씨라 부르고 싶은 30대 중반의 너무나 재미없는 농담에 유지은이 짜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도진이를 떠올리게 한다.
도진이도 가끔씩 유아랑 저들만 재미있는, 그러나 지켜보는 사람은 전혀 재미없는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근데 그래도 도진이는 멋있었는데.'
이 사촌 오빠는 완전히 아저씨가 되어 가는 거 같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의뢰 내용을 들었다.
"화산파가 소탕 작전을 펼쳤던 흑도 조직의 일부가 미국으로 도주해 숨어들었대."
"화산파 입장에서는 명예 때문에라도 무조건 자기들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미국은 화산파의 영역이 아니잖아?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긴 한데 미국의 다른 대문파 손을 직접적으로 빌리기는 꺼려진다는 거지."
그게 뭘 그렇게 따질 부분이냐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
번거로운 절차에 따라 빙빙 돌리고 보여주기 식으로 일부러 돌아가는.
'도진이였으면 애초에 돌아갈 일도 안 만들었겠지만.'
"그러니까 미국 쪽에 인프라가 있는 우리에게 의뢰를 넣었다는 거네요."
"응, 그렇지."
미국은 정의검가의 주무대다.
오래 활동하였고 상당한 명성을 쌓은 만큼 대문파까지는 아니어도 근래 뒷골목에 숨어든 흑도 잔당을 소탕하는 데엔 충분할 만큼의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 화산파의 제자들과 합류해 의뢰를 수행했다.
외국의 뒷골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섞여들지도 못한 잔당을 소탕하는 건 단 3일이면 충분할 정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일상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슷-
"……."
헤어지기 전 화산파의 2대 제자가 누구도 모르게 건네 준 쪽지로 인해 그 끝은 일상이 아니게 되었다.
40대의 남자였다.
대문파답게 초절정의 문턱을 두드리는 수준, 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쪽지를 건네주는 그 순간의 은밀함은 초절정의 끝자락에 달해 있었으니 자신의 감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 유지은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진짜 무(武)의 세계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쪽지에 적인 문구, 그리고 만날 날짜와 시간에 조금 더 흔들리고 말았다.
누구도 모르게. 은밀하게 나오라는 뜻이었다.
함정…… 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글씨를 이루는 필체에서 지극한 무리(武理)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나 되는 무리를 획에 담을 수 있는 이가 보낸 편지는 그러니까 그동안 모르던 다른 세계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그래서 유지은은 홀로, 아무도 모르게 정해진 시간에 누구도 찾지 않는 작은 산에 올랐고.
"와 주었구나."
상상도 못했던 이들의 모임에 크게 놀라야 했다.
'리암 드가모.'
빛이 조금 바랜 적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노인은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 경계를 넘어선 고수인 리암 드가모였다.
그리고 그 옆에 도복을 두른 노인 또한 무당파의 경계를 넘어선 고수, 무당제일검이었다.
무려 대문파의 경계를 넘어선 최고 고수가 둘이나 이런 한국의 이름없는 산에 있었다.
허나 그보다 더 유지은을 놀라게 만든 것은,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그 역시나 경계를 넘어선 고수였다.
하지만 유지은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경계를 넘어선 고수인데.
적어도 이 시대에 알려진 경계를 넘어선 고수를 유지은은 모두 알고 있었는데.
또 한 명. 화산파와 무당파의 고수들과 함께 있는 세 번째 경계를 넘어선 고수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노인이 말했다.
"놀랄 것 없다. 그동안 네가 알고 있던 세상의 밖에 내가 있는 것 뿐이니."
마치 유지은의 생각을 꿰뚫은 듯 말한다.
무복은 번듯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과 기세가 야인의 풍모가 강한 노인이었는데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곳에 같이 계시는 건가요?"
유지은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바로 핵심을 관통하는 것을 물었다.
노인이 답했다.
"우리가 너의 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의 재능이요?"
"그래. 이 시대 최고로 꼽히는 너의 재능에."
그러고서는 다가오며 기세를 일으키곤 말했다.
"어디 한 번, 나와 겨루어보지 않겠느냐?"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으나.
스르릉-
"네."
유지은은 거절하지 않았다.
* * * *
그 비무에서 유지은은 패했다. 압도적으로.
놀랍게도 노인은 화산제일검 리암 드가모보다, 무당제일검보다도 강했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의 경지가 대문파 최고의 고수들보다 높았던 것이다.
이는 약 10일 동안 화산제일검과 무당제일검까지 겪어보았기에 짐작이 아닌 몸으로 안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한 달 정도 머물 생각이다.
-어? 그래도 돼요?
-장문인이나 다른 업무가 많은 녀석들과 달리 우리는 제법 자유로우니 말이다.
화산제일검과 무당제일검은 그리 말했다.
사실은 그 말대로였다.
그들은 문파의 상징이었으나 또 그만큼 높은 곳에 있었기에 의외로 자리를 비워도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니 안 될 이유가 없지.
조금은 거칠고 무뚝뚝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노인은 그리 말했다.
그렇게 남들 모르게 산에 머무는 노인들 덕분에 유지은은 도진이 없는 사이에도 힘껏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매일같이 천마전을 나가 그들이 있는 산에 올랐다.
경계를 넘어선 고수들.
지금의 유지은보다 훨씬 앞에 있는 무인들.
그들과의 비무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앞서 있는 이들의 검을 보고 겪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채애앵-!
그리고 전날보다 훨씬 뛰어난 한 수로 리암 드가모를 놀라게 하고 이름도 아직 모르는 노인과 백 수(手)가 넘게 검을 교환한 날.
"우리는 천외천(天外天)이니라."
유지은은 처음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는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천외천, 이요."
"그래. 우리는 하늘에 올라 그 밖의 하늘을 보는 무인들의 모임이다."
노인은 말했다.
그들의 시중을 드는 일부를 제외한 천외천의 모든 무인이, 경계를 넘어선 화경의 고수라고.
"하늘 아래 무림은 하찮은 이들의 모임이다."
"하찮은 재능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며 진짜 재능이 있는 이들을 시기하고 배척하려 들지."
"……."
"우리는 그런 아귀들의 시궁창을 떠나 진실로 하늘에 다다른 이들, 그리고 다다를 수 있는 이들의 무림을 살고 있다."
노인이 유지은의 속내를 꿰뚫는 듯한 눈으로 보았다.
"너는 이미 겪었을 것이다. 재능없는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그들의 배척을."
"그들로 인해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서도 그것을 인정받지 못했고 감추고, 스스로를 하늘이 아닌 바닥으로 내리눌러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는 너와 같은 재능을 가진 자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곳, 하늘에 올라 하늘 밖의 하늘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우리와 함께 한다면 너는 머지 않아 하늘에 오를 것이며 그 하늘 밖의 하늘을 보고, 또 목표로 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유지은. 천외천으로 와라."
노인의 말에 유지은은 깊이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즉시 대답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얼굴에서 노인은 유지은의 긍정적인 대답을 예상하였다.
그리고.
"죄송해요. 저는 그곳으로 가지 않을래요."
유지은은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