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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79화 (579/741)

578화

단아한 자태로 앉은 전서린이 말했다.

"저는, 일곱 살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말한 진실이었다.

하오문의 숭무지부주.

세계에서 손꼽히는 정보 단체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으레 이런 인물들은 필요한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는 재능, 혹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장하며 그 재능을 과중한 업무의 연속에서 더욱 갈고닦으니 전서린의 말은 결코 자랑이 아닌 것이다.

"그러하니, 저에게 있어 일곱 살 이전의 공백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담담히 말하는 전서린의 깊은 눈동자와 도진의 눈동자가 마주한다.

잠시 말이 멈춘 사이. 그 간극에 도진이 나지윤에게 들었던 정보를 다시 한 번 검토할 수 있도록.

그 또한 정보를 다루는 이의 특징이었다.

도진이 세이전을 통하여, 나지윤을 통하여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상세히 들었음을 안다.

동시에 그것이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정보를 다루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숨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대화 사이에 자연스럽게 서로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어느 정도의 역량이 있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동시에 그런 결정 또한 결코 읽히지 않도록 행동하니 그야말로 대화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비무이자 생사결인 것이다.

허나 이 자리는 그런 정보를 다루는 이들끼리의 자리가 아니었기에 전서린은 말하고자 했던 것을 그대로 풀어놓는다.

"저의 가장 첫 기억은 전대 숭무지부주의 손을 붙잡고 아직은 이만큼 번성하지 않았던 숭무지부에 온 것이었습니다."

"전대 숭무지부주의 손을 잡고 온 것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녀도 도진도.

그 말이 지극히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그 부분부터 기억이 시작되는 게 어떻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녀는 진무(眞武), 그것도 현대에 발전하여 그 영역에 이른 게 아닌 고대 무림 시절에 만들어진 진무를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다.

어디서 얻은 것이지, 왜 외운 것인지도 모르는 것들을.

위지혁이 알아본 무용공이 그 일부였다.

"처음엔, 주변을 의심하였습니다."

불가해한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변에 대한 파악이다.

전서린은 그렇게 배웠고 배운 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하오문은…… 의심할 대상이 아니라고 이성적으로,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결론 내렸습니다."

전대 숭무지부주는 전서린을 스승이자 부모로서 극진히 키워 주었다.

가진 모든 지식과 지혜, 경험을 전수해 주었으며 하오문에서도 전폭적으로 전서린을 지원해 주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하오문의 정수를 다하여 키워낸 신비 고수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하물며 전서린의 머릿속에 든, 이 세상에서 비할 데 없이 귀중한 보물인 진무를 빼앗으려 들지 않았으며 묻지도 않았다.

받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오문을 의심하였고 조사하였으나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받았는가만 더 자세히 알게 될 뿐이었다.

하오문주와 전대 숭무지부주는 당연히 그런 전서린의 의심과 행동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며 서로 믿기 위한 과정이니 원없이 조사해 보라며 힘을 보태주기까지 했다.

"그 끝에서 저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마치 일곱 살에 세상에 처음 나타난 존재라고."

나지윤은 말했다.

-지금의 세이전이나 하오문 정도 되는 규모로 정보라는 걸 다루다 보면 바로 알게 돼. 이것이 숨겨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없는 것인지.

제아무리 세이전이라지만 조사를 부탁한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전서린의 일곱 살 이전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 결론내릴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라고 했다.

-있는 걸 철저하게 숨긴 것과 없는 걸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꾸민 것의 차이도 그렇지. 물론 우리가 틀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답청문의 능력 이상에 바할라의 자금력 이상을 동원해 꾸몄을 그런 경우.

-하지만,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저라는 존재의 일곱 살 이전 흔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지윤이 해 주었던 말이 전서린을 통하여 되새겨진다.

나이는 어리다지만 나지윤보다 연상에 하오문의 핵심에 가까이 있는 이가 십 년을 넘게 조사한 결과를 불신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다 스물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분위기가 바뀐다.

도진이 집중력을 높였고 전서린이 말한다.

"제 기억에 없던 장면들이, 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장면들이요."

"예.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장면이었습니다. 마치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사진으로 만들고 사진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둔다면 그럴까 싶은,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기억을 '동영상'의 형태로 저장한다.

그렇기에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이 사진인 것은 또한 기묘한 부분이었다.

"시대는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무협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일치하는 시대였습니다."

무협을 소재로 하는 만화나 소설, 영화에서 차용하는 시대. 한 마디로 삼국지 시대를 예로 들 수 있는 시대다.

"한데,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상당히 기묘했다.

"몇몇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으며 대리석 탁자 위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커피가 든 일회용 컵을 들고 있었고 무복 대신 청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

그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청학동.'

"과거의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마을, 같은 곳일 수 있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꿈에서 본 장면들은 많지 않았다.

허나 단서가 될 것들은 많은 편이었다.

집이라기보단 단체가 머무는 곳 같았다.

유복함을 짐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심(愁心)이 깊은 표정을 한 이들이 자주 나왔다.

눈높이 등을 통하여 일곱 살 이전으로 추정되는 자신에게 웃어 준 이가 등을 보이고 있을 때엔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무언가 해결할 수 없는 근심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단서를 쥐고 우선은.

"고대 무림 시대의 풍습을 따르고 있는 곳들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그런 곳은 많았다.

특히나 중국이 무림의 색채가 강했다.

당장 도진으로 인해 인생이 꽤 달라진, 전생과 달리 바라던 대로 이름을 떨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유룡 우정한이 속한 소림사가 그랬다.

현대의 문명을 완벽히 배척하지는 않지만 그 삶은 현대보단 고대 무림에 훨씬 가까웠다.

그러니까 전서린은 그런 형태의 마을만이 아니라 문파까지도 능력이 닿는 곳까지 조사하였고.

"원하는 것을 아직까지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도진은 어느 정도 전서린의 속내를 짚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기원을, 존재를 찾고 싶어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만큼 중요한 것이다.

평생을 기억하는 전서린은 그러나 단절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끝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갈구해 왔다.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혹시, 나는 정말로 고대 무림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무언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혹은 사고로 미래에 와 버린 것이다.

"어쩌면 과학이 지금보다 더 발달한 세상이어서 타임슬립 같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 냉동수면이라는 현실적인 조치에 의해 이 시대에 깨어난 것은 아닐까."

냉동수면(冷凍睡眠)으로 얼어붙은 채 있다 깨어났다면 어느 순간 갑자기 뇌가 기능하고 그 순간부터 기억이 이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성적인 전서린에게 있어서는 그렇기에 그런 생각들은 모조리 도피였다.

"그리고 현실에서 방법을 찾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고대 무림의 서적을 택한 것입니다."

하오문으로서도 접근하기 힘든 정보 중에 전서린이 꿈에서 본 장면들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고대 무림의 사료들이다.

그녀가 말했던 허무맹랑한 방법들과 별개로 단절된 시대의 정보 일부가 어떻게든 이 시대로 이어졌다.

그 정보에 접근하기 위하여 전서린은 상아탑에 입성한 것이었다.

고대 무림의 기록을 통하여 이 시대까지 이어진 것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어진 것들 중 전서린과 연관이 있는 정보가 있을 수 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좋다.

그것을 시작으로 정보를 더듬어 나가 이윽고 원했던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특기였으니까.

그런 기대를 품었던 전서린은.

"허나 그것은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제가 원했던 정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신뢰 등급을 높여 더 중요도가 높은 사료도 보았으나 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무얼 바라고 상아탑에 왔는지를 알아보았던 거군요."

"예."

같은 기대를 가지고 같은 행동을 했었기에 전서린은 도진이 목적했던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저는, 이것이 거대한 세력이 의도적으로 관련 정보를 차단한 것이라 보았습니다."

"거대한 세력이요."

"예."

말하지 않았으나 둘은 같은 세력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형독(無形毒).

실체가 보이지 않으나 이미 전 세계에 깊이 퍼져 버린 무시무시한 독.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다면 과거, 무림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서적을 빼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각국이 그 가치를 알고 국력을 동원하여 고대 무림에 관한 서적을 확보하기 전부터, 말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겪은 무형독의 지식과 술법 등이 그렇게 만든다.

그들은 고대 무림에 관해 좀 더 많이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을 선점하여 지금에 이르렀을 수 있다.

"무형독은 당연하겠지만 각국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 정보를 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 그렇겠죠."

그러니까 전서린이 그랬듯 도진 또한 원하는 정보를 결코 얻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숭무지부주께서는 어떤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단순히 하소연이나 하자고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을 거다.

전서린은 도진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럴 성격도 아니었다.

분명히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었고 거기에 도진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과연 전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연히 닿은 정보가 있습니다. 세간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초대받지 않고서는, 초대받은 후로도 결코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이들의 모임."

"아마 고대 무림에 관하여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을 이들."

"그들은 스스로를……."

* * * *

"우리는 천외천(天外天)이니라."

조용히, 그러나 천지(天地)의 기운이 깃든 듯 선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이 발한 목소리가 내려앉는 건.

"천외천, 이요."

방금 노인에게 패배한.

모든 힘을 다하고 어깨를 들썩이는 희대의 천재.

유지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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