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적련화 전서린은 하오문에서도 핵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정보 분야에서는 한 손에 꼽히는 집단의 간부인 만큼 통찰과 추론의 능력에 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허나. 제아무리 그렇다 해도.
방금의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소천마가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회원 자격을 획득하고 사료를 살피는 데서 고대 무림에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하오문 숭무지부의 지부주 정도 되면 그것을 토대로 수많은 추론을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소천마의 목적이 '고대 무림 시대의 이야기 그 자체라고 확신'하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전서린이 이곳에서 원하던 것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꿰뚫어 본 도진에게는 더더욱 짚고 넘어가야만 할 일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는 건, 저와 조금 길게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거네요."
전서린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꼭, 시간을 내어 주셨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이 자리는 말씀을 드리기에 그리 좋지 않으니 한국에서 자리를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 상아탑 안은 조심스런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보안 유지의 일환으로 섭음술이나 전음으로 길게 이야기하는 것마저 의심의 대상이 되니까.
결국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한국으로 돌아가 자리를 마련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귀국, 우선 헤어지게 됐다.
* * * *
귀국한 도진은 집에 얼굴을 비추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아들. 잘 다녀왔어?"
"네."
일요일이었기에 출근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에겐 전화로 대신하였다.
"오늘도 바쁘신가 봐요."
-그래. 저녁을 먹고 들어갈 거 같구나.
"네."
아버지, 김서우는 요즘 많이 바빠 집보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나쁜 일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천마신교의 본단, 개중에서도 중심에 우뚝 솟은 천마전은 세계의 온갖 매채를 통하여 회자될 만큼 대단한 건축물이었는데 김서우가 새로 세운 회사가 건설에 참여 했었다.
그것을 토대로 회사를 확장해 나가려 했던 김서우에게 커다란 제안 하나가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바할라에서의 제안이었다.
-방치되어 있던 영토에 신도시를 계획하여 건설하려 합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형독을 몰아내고 나라가 건강해지면서 바할라는 이전까지 국력이 미치지 못해 흑도의 무법자들에게 점거당하였던 영토를 무서운 기세로 되찾고 있었고 이 영토를 즉시 활용하고자 했다.
산유국인 바할라에게 있어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신도시 건설이 계획되었고 이에 따라 여러 건설 회사와 인력을 유치하기 위한 국가 사업을 진행하였으니 김서우에게도 제안이 온 것이다.
번듯한 건설 회사.
그것이 꿈이었던 김서우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제안을 수락하였는데 여기에 또 함께 하게 된 문파가 있었으니 벽태웅이 세운 포부문이었다.
"응, 좋은 기회라 생각해. 잘 다녀와."
"예, 선배님."
벽태웅 또한 번듯한 회사를 세워 보육원의 아이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바할라의 거대 프로젝트는 그에 딱 맞는 기회였으니 큰 마음 먹고 바다를 건너기로 한 것이다.
모자란 부분은 경험이 풍부한 김서우와 함께함으로써 메꾸기로 하였으니 장소는 바할라에 벽태웅이 함께 하는 상황에 도진으로서도 마음 놓고 응원할 수 있었다.
'좋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동생들도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고 거기에 불행은 없으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진이다.
그리고.
"고마워, 상미야."
"아니에요, 오빠."
자리를 비운 사이 집안일을 거들고 동생들도 챙겨 준 상미에게 도진이 감사를 표하며 밥을 쐈다.
도진의 집 주방에서 앞치마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을 정도로 상미는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
"사실 나도 그래."
"소담 언니가 아빠라면 상미 언니는 엄마 같은 느낌?"
"태클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미지가 무섭도록 딱 맞긴 하네."
…도진은 모르는 이야기지만 유진이와 호진이는 몰래 그런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 '엄마'라는 이미지는 상미가 전략적으로 바라던 이미지였다.
냐아앙-
도진의 무릎 위에서 뒹구는 솜이도 상미를 두 번째로 잘 따를 정도다.
자리를 비웠던 동안 솜이의 '산책'을 도맡아 준 것도 상미였다.
꽤 오래 자리를 비워야 했던 도진에게 있어 상미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오후.
채챙-!
상미와의 점심 식사 후엔 오랜만에 유지은과 비무를 했다.
유지은이 매섭게 몰아붙이고 도진이 흘려내는 흐름이 계속된다.
지극히 높은 이치를 자연스레 구사하는 도진과의 비무는 평범한 무인에게는 벽만을 느끼게 했겠지만 유지은에겐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보물같은 경험이 되었다.
그 압도적인 재능이 도진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실시간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유지은을 변함없이 대해준다.
원없이 달릴 수 있게 해 준다.
유지은이 도진이라는 꽃을 계속,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카앙-!
"수고하셨어요, 선배."
"응, 고마워."
적절한 순간에 도진이 강하게 검을 때려 흐름을 끊고 비무를 멈추었다.
유지은이 '속도 위반'을 하지 않도록 끊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유지은의 얼굴에 잠시 스쳐간 '버벅임'을 도진은 놓치지 않았다.
"자요."
"고마워."
편하게 누워 호흡을 고르던 유지은이 도진이 건넨 물을 마신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도진은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엄청 느셨네요."
"응. 그렇지?"
"네. 저 모르는 사이 좋은 걸 하신 거 같은데?"
유지은은 씨익 웃었다.
"응, 맞아. 하지만 미안. 비밀이라 뭘 했는지는 말 못 해 줘. 아직은."
"그렇군요."
도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은은 마치 작은 동물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것만 같은 얼굴로 물었다.
"서운해하는 거 아니지?"
"하하. 그럴리가요. 선배랑 저 사이잖아요?"
"응! 그렇지."
진심이었다.
그런 걸로 서운해하고 밀어낼 정도로 도진의 도량이 얕지 않다.
다만, 유지은의 실력이 '예상 이상으로 는 것'에 관해서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유지은은 비할 데 없는 재능의 소유자다.
서른이 되기 전에 천하제일을 논하게 될 만큼의.
심지어 현대가 아닌 고대 무림 시절 태어났어도 그랬을 것이다.
허나 그런 재능을 감안해도 한 달 사이 늘어난 실력은 범상치 않았다.
도진과의 대련으로 가속도가 붙었을 때와 비슷할 정도였는데 거기에, '도진의 것이 아닌 흔적'이 묻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진이 대련을 멈추었을 때의 버벅임까지.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유지은이, 도진 이외의 존재와 비무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는데 그 상대는 유지은이 과하게 기(技)만이 앞서 가기 전에 제지하지 않았다는 거다.
혹은 그것을 알아볼 만큼의 능력이 안 되었든가.
어느 쪽이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누가 경계의 문턱에 선 유지은을 상대로 이 정도나 되는 속도가 붙게 만드는 비무를 한 달이나 했을까.
짐작가는 이가 없다. 그 목적 또한.
"네가 상아탑에 있는 사이 선배가 자주 외출을 하시긴 했지. 신경쓰여?"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스토킹을 할 정도는 아니야."
나지윤의 말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니 관심을 두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것이 선을 넘어선 안 되는 법이다.
무엇보다 참견을 해야 할 이유, 부정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으니까.
좋은 관계에서 신뢰는 기본이 되어야만 한다.
도진의 뜻을 읽은 나지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장의 이사가 진행중이야."
상아탑에 다녀온 사이 7월이 되었다.
배경석의 공장이 이사를 시작하였고 새로 사람도 뽑는 중이라고 했다.
특기할 만한 부분은.
"경리로 강예지가 뽑혔어."
"…그래."
사무실에서 일할 경리로 강예지가 뽑혔다는 것이었다.
강예지. 도진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일진 강치환의 여동생이다.
죗값을 치르고 있는 강치환과는 달리 강예지와는 접점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는데.
전생과 달리 이번 생에서는 간접적이라고 하나 제법 접점이 있었으니 바로 얼마 전 전생의 유진이와 관련한 사건으로 얽혔었는데 이렇게 또, 얽히게 되었다.
세상이 좁다면 좁은 거긴 한데 논리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긴 했다.
문월동에서 가까운 공장이고 젊은 인력을 원하는 공장.
강예지는 현재 알바를 전전하고 있는 상황.
나쁘지 않은 직장의 구인 광고를 본 강예지가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가까운 곳에 살며 젊은 인력인 강예지를 공장이 채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허나 묘한 기분이다.
전생에서는 강예지가 아닌 다른 30대 초반의 여자가 채용됐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도진이 채용됐었는데 이번엔 강예지와 40대의 남자가 채용되었다.
본래 자신이 살았던 공간에 다른 이들이 있는 것을 보는 건, 그야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전서린에서 관해서인데."
대화의 주제를 옮겨 나지윤이 전서린에 대해 말했다.
"응."
"어릴 적의, 정확히는 일곱 살 이전의 흔적이 전혀 없어."
"전혀 없다고?"
"어. 정보를 차단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예 존재하지가 않아."
전서린에 관해 좀 더, 최대한 상세한 정보를 요청한 도진이었다.
한데 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아직 시간을 더 두고 조사해봐야 하는 거긴 한데 이것만큼은 확실해. 감추든 차단했든, 어떤 형태로든 조작을 가했다면 흔적이 남아. 가치가 전혀 없어 방치해 뒀다 해도 '주변 정보'만은 남아야 하고."
"그런데 전서린은 그런 게 없어. 일곱 살 이후로는 단편적이고 희미하게나마 흔적이 있었어. 하오문이 감췄다는 흔적이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일곱 살 이전은,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어."
* * * *
며칠 후.
도진은 전서린과의 대화를 위하여 실크 로드를 방문했다.
일전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온 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당시의 일 때문인지 오늘은 더욱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하오문도들은 그러나 이번에도 도진이 자신을 드러내기 전까지 방문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천마."
안에 들어서 마주한 전서린은 그날과 다른, 그러나 마찬가지로 기품이 느껴지는 고급 한복 차림이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이야기였던 만큼 테이블 위엔 차만이 놓여 있었고 그것을 한 모금 넘기고서, 바로 전서린이 본론을 꺼내놓았다.
"저는,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