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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77화 (577/741)
  • 576화

    솔직히 말해서, 고대 무림의 언어는 '언어'로서 지극히 수준이 떨어졌다.

    이걸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냐는 불만이 단순한 불만이 아닐 만큼.

    일단 '표의문자'다.

    그러니까 한자처럼 글자 하나가 음과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가진다.

    문제는 글자 하나에 뜻 하나가 아니라 글자 하나에 여럿, 심하면 수십 개의 뜻이 있는데 문맥과 상황에 따라 맞는 뜻을 찾아야 한다.

    심지어 어떤 뜻이냐에 따라 앞뒤로 다른 글자와 조사가 붙기도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걸핏하면 비유나 은유를 넣는데 그에 따라 '시적 허용'도 있어서 문법을 무시, 그냥 무시도 아니고 개무시를 해대서 사람을 돌아 버리게 만들었다.

    법칙이 있긴 한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불규칙한 법칙'이 또 여럿 있는 것이다.

    상당한 사료가 있음에도 고대 무림의 언어가 아직 완벽하게 해석되지 않은 이유이며 박사들마저 간단한 해석에도 흉기로 쓸 수 있을 만큼 두터운 해례본(解例本)을 몇 개나 끼고 사는 이유였다.

    …'도(道)'를 논하는 무공 서적까지 가면, 더 논할 힘조차 나지 않는다.

    뭐,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시험지를 건네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도진의 한 마디에 체면도 잊고 눈과 입을 쩌억 벌린 것이었다.

    글자마다의 뜻과 용례, 용법을 파고들어야 하며 그 뒤엔 조합에 따라 어떻게 그것이 달라지는지도 파악하여 가장 '그럴싸한' 문장을 만든 뒤 이윽고 문단까지 확장하여 해석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고대 무림 언어의 해석 방법이었다.

    근데 그걸, 이 자리에서 그냥 슥 보고 파악해 버렸다고?

    문제 내겠다고 저기에 달라붙은 기존 회원이 다섯 명이었고 검토까지 2주가 걸렸는데?

    '무림인이 소천마를 보면서 느끼는 게 이런 감정인가?'

    놀라운 걸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어이마저 넘어 허탈하게 만드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도진의 웃는 얼굴이다.

    "…바, 바로 해석하신 겁니까?"

    "아뇨. 그냥 대강만 파악한 겁니다. 해석은 이제부터 해 봐야죠."

    아니 그러니까 그 '대강만 파악'한 것도 해석이잖아.

    그게 왜 되냐고.

    누군가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소천마에게 적대적인 인물이었기에 자존심상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럼, 해석이 다 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시험관 일행이 떠나갔다.

    앞으로 도진은 배정된 상아탑 내부 숙소에서 머물며 일주일동안 응시자를 위하여 개방되는 제3 도서관에서 참고 자료와 씨름하며 '성과'를 내고 그 성과가 기준 이상이면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있다.

    뭐, 합격 여부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일반 응시자들이야 1%의 고대 무림 서적과 99%의 참고 자료 가운데서 씨름하겠지만 도진의 안에는.

    -양반가 녀석의 스토킹 일지로구나.

    -순박하지 않습니까, 저 정도면.

    …'네이티브 스피커'가 둘이나 있으니까 말이다.

    모국어 사용자는 난이도를 떠나 아주 자연스럽게 그 언어를 구사하는 법이다.

    문법이니 무엇이니를 따질 것도 없이 직관의 영역에서 언어를 사용한다.

    더더욱, 천마와 사신은 고대 무림 시절에 살았던 '지식인'이자 무림인이었으니 어느 양반가 자제의 나름 고상한 수사법으로 가득한 일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들에게 고대 무림의 언어를 배운 도진 또한 완벽하진 않아도 보는 순간 내용을 파악할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그들이 답안지로 준비했던 해석본보다 완벽한 해석을 써내는 것도 가능했다.

    허나 그러지 않은 건,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실력은 오히려 불필요한 경계와 소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일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되 그것이 상식을 넘어서지 않는 정도.

    필요하다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적정선.

    도진은 3일 안에 적당한 수준의 해석본을 내기로 했다.

    "후, 훌륭합니다."

    그리고 3일 뒤, 예상대로 찬사를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보안 서약서 작성 등을 포함한 절차를 거쳐 회원 자격을 얻게 되었다.

    -스무스하구나.

    -예.

    자격을 얻은 도진은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제1 도서관.'

    상아탑 내 가장 큰, 제1 도서관.

    그곳에 보관된 고대 무림 서적을 살펴 그 시대의 이야기를 확인한다.

    * * * *

    [주변 고을에서 악명을 떨치던 마두(魔頭)가 드디어 잡혔다. 무능한 관(官)의 병졸들은 소리만 컸고 결국 마두를 잡은 건 때마침 그곳에 머물렀던 무림인들이라고 했다.]

    [말썽을 부리던 무림인이 결국 관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 말이 무림인이지 실력도 없으면서 거만함만이 하늘을 찌르던 자였으니 인과응보다.]

    [부정 축재(蓄財)를 하던 무림인이 죄가 탄로 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2주.

    도진이 제1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회원은 원한다면 상아탑에 머물며 얼마든지 고대 무림의 언어를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를 돕기 위해 마련된 도서관에는 고대 무림의 서적만이 아닌 서적의 연구에 필요한 온갖 자료들도 갖추어져 있어 과연 최고의 환경이라 할 만했다.

    도진은 여기서 고대 무림 시대를 기록한 서적을 살폈다.

    위지혁과 장호의 도움을 받아 얼마든지 속독으로 독파할 수 있었으나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어느 정도는 조절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3일만에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했다는 소문이 돌아 흘긋거리는 시선이 따라붙는 상황이다.

    일부러 여러 개의 참고 서적을 포함하여 펼쳐두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석을 시도하는 모습을 취했다.

    그러면서도 적지 않은 고대 무림이 기록된 책을 살폈으나…….

    -썩 시원찮구나.

    -예.

    도진이 바랐던 것은 '고대 무림' 시대의 이야기다.

    스승인 천마와 사신에게 그 시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드리고 싶었고 혹여, 그 과정에서 두 스승과 이어진 인연에 관한 단서가 혹시 없을까에 관한 생각도 있었다.

    완벽하게 단절되어 도대체 언제인지 시기조차 짐작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한데.

    없다.

    너무나 완벽하게.

    그에 관한 정보를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고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애초에 천마신교는 황실과 대립하였고 황실이 결코 존재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 집단이었으니까.

    사신 또한 그 이름대로 경원시되는 존재였으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 해도 그 편린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건 자연스럽지가 않다.

    직접적인 언급이야 하지 않을 수 있다.

    한데 그걸 논하기 이전에 아예 '무림의 구체적인 기록' 자체가 없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주변 고을에서 악명을 떨치던 마두가 잡혔다면 그 마두의 별호는 무엇인지, 어떤 무공을 썼는지, 특징은 무엇인지, 누가 잡았는지 최소한 하나라도 구체적인 기록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언급하면 경을 치는 천마신교도 아니고 이런 기록에서마저 구체적인 것 하나 보이지 않는 건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던 게 확실하네요.

    -그렇구나.

    이쯤 되면 확신이다.

    이곳에 있는 자료는 '분류'를 통하여 공개된 것이다.

    도진이 원하는 자료는 이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실적을 쌓아야겠어.'

    회원간에 '계급'은 없다지만 실적과 신뢰도에 따른 '차등'은 있다.

    실적을 쌓고 기밀 문서를 보여주어도 괜찮다는 신뢰를 쌓아야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있다는 말이다.

    거기서도 도진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확률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지레짐작하여 멈추는 건 도진의 성격이 아니니까.

    우선은 그렇게 방침을 잡고 도진은 자리를 정리한 뒤 도서관을 나왔다.

    점심을 먹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리를 비운지 한 달이 되어간다.

    이곳에서의 목적도 당장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니 길게 보고 조급하지 않게 진행할 일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이 식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익숙한 기척의 미인이 다가왔다.

    "이곳에서 뵙는군요, 소천마 님."

    아름다움만큼이나 기품이 돋보이는 여자.

    블라우스에 풍성한 머리카락을 올려묶은 모습이 지적인 면모를 더하는 모습의 그녀는.

    "…숭무지부주."

    하오문의 전서린이었다.

    세계 무림대회에서 이름을 떨치며 적련화라는 별호를 얻은 그녀와의 만남은, 도진으로서도 예상외였다.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점심을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볼일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워낙 눈에 띄는 그녀와 소천마의 조합은 자연스레 많은 시선을 끌었으나 두 사람 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의 회원이셨군요."

    도진의 말에 전서린이 예, 하고 답했다.

    "숭무지부주가 아닌 평범한 전서린으로서 3년 가량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랬군요."

    일반적으로 도진과 관련된 일이면 세이전이 사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나지윤이 전달해 준다.

    그러니까 원래 같으면 전서린 같은 인물을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니 이건 하오문이 일을 잘했다는 게 된다.

    "잠시 산책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시죠."

    식사 후 전서린의 제안에 따라 산책이 이어졌다.

    도진이 콜라를, 전서린이 블랙 커피를 든 채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고 그 자리에서야 말이 나왔다.

    "숭무지부주라는 신분이 드러난 뒤로 제법 말이 나왔겠네요."

    "예. 높은 강도의 감사가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회원 자격은 유지되었습니다. 신뢰 등급은 떨어졌지만요."

    다른 곳도 아닌 하오문의 '간부'가 역시 다른 곳도 아닌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회원으로 3년이나 활동했으니 상아탑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전서린에 대한 강도 높은 감사가 진행되었고 우려했던 일은 일절 없었음이 밝혀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 등급'은 떨어지게 됐다.

    그러니까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보안을 요하는 문서는 열람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족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심지어 내외로 혼란한 상황에서도 외부로 이야기가 퍼지지 않게 만든 데서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닫힌 성질과 더불어 하오문이 세계 최고의 정보 단체라는 걸 한 번 더 인식하게 만든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하오문은 변할 거라 했고 양지로 나갈 거라 했던 전서린의 입장에서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도로 도진은 말했으나 전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제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기에, 아쉽지는 않습니다."

    "…원하는 게 있었습니까?"

    예상 외의 대답에 도진이 물었다.

    전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예. 고대 무림의,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알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

    그것은, 흘려듣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바로 도진의 목적이 그것이었기에.

    그리고 전서린은 도진을 마주하며 말을 잇는다.

    "소천마께서도 저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오셨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소천마께서 얻고자 하시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서린을 담고 있는 도진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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