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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76화 (576/741)
  • 575화

    초기 조건의 사소한 변화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나비 효과.

    그리고 또 흔히 쓰이는 '스노우볼'이란 단어까지.

    도진은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바뀐 수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허나 반대로.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스노우볼이 굴러가기까지 했음에도 큰 관점에서는 바뀌지 않은 것들도 볼 수 있었다.

    전자로는 안티체리와 레드슈를 들 수 있을 것이었으며 후자로는 이은지와 권이솔을 말할 수 있다.

    안티체리와 레드슈는 도진이 깊게 관여하여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그 영향력이 한국 연예계를 넘어 세계에까지 퍼질 정도였다.

    안티체리의 기세가 1년 넘게 대한민국 연예계를 뒤흔들었고 레드슈 또한 그런 정도의 임팩트는 없었으나 한 계단 한 계단 인지도를 쌓아 '1티어'라 말할 수 있는 영역에까지 입지를 다졌으니까.

    심지어 근래엔 넷비전을 통하여 드디어 서비스된 정글 게임의 성공으로 미국의 인지도 있는 프로그램에 초대될 정도였으니 전생에서 결국 무대의 뒤로 퇴출당했던 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가 된 격의 변화다.

    반대로, 이은지와 작곡가 권이솔은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도진의 개입으로 많은 '초기 조건'이 변화했으나 그 후 개입하지 않은 사이 전생과 마찬가지로 이은지는 대한민국 음원계를 점령, 여왕이 되었고 권이솔은 그런 여왕의 곡을 쓰는 여왕의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됐다.

    그 시점이 조금 달라졌을 뿐, 이은지와 권이솔은 전생과 비슷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글 게임의 출연자로 외국에서도 인기를 끌고는 있지만 비유하자면 물살이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물길만큼은 변하지 않은 격이었다.

    갑자기 도진이 이런 것들을 되짚는 건, 존 스미스에서 시작하여 이어진 '잔챙이' 배경석까지 이어지는 흐름 때문이다.

    도진의 존재로 인해 존 스미스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터였다.

    이윽고 살아있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미국 국방부 관리 하의 깊숙한 지하에 처박힌 것까지.

    허나 과연 그것이 존 스미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마지막의 존 스미스는 버림패였다.

    일련의 정황도 그렇고 구사한 독공 또한 무인의 무공이라기보단 사용자의 목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실험'의 느낌을 받았다.

    도진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버림패로 결정난 것을 무형독이 계획에 썼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면, 방식이 다를 뿐 전생에서도 존 스미스는 비슷한 시기에 존앤집스의 공동 대표가 아니게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안타깝게도 전생의 도진은 외국의 대기업 공동 대표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둘 수 없는 처지였기에 들은 게 없어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또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존앤집스의 대표 정도나 되는 인물에 관한, 무림과도 깊이 연관되는 빅 이슈를 전혀 접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무형독의 개입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단순히 전생의 도진의 처지가 그랬던 것만이 이유가 아니라 무형독이 정보를 차단하고 축소했을 확률.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 배경석이다.

    도진의 개입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으나 흐름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존 스미스에 딸려 있던 잔챙이 중의 잔챙이였던 배경석은 신변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왔으며 전생과 마찬가지로 친척의 작은 공장을 인수하는 것이다.

    * * * *

    "7월 중순 정도가 될 것 같아."

    "그래."

    주시하고 있던 배경석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다.

    배경석이 친척에게서 공장을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일을 배우는 과정에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단번에 인수하는 대신 우선 임원으로 얼굴을 비추면서 차근차근, 확실하게 해 나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나 이사는 8월 중순 즈음으로 일정이 잡혀 있다는 부분까지 나지윤은 정리해 도진에게 알려 주었다.

    "새로 직원 몇을 고용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응. 그렇겠네."

    본래 공장이 있던 곳과 이사오는 이곳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다.

    생계가 걸린 이들이 많아 그 부분까지 감수하여 그만두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작은 공장들이 으레 그렇듯 그 소수의 퇴직자의 빈자리를 빠르게 메꿔야만 일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도진이 그런 것까지 포함하여 몇 가지 사정으로 고용된 케이스였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배경석은 제법 오래 지켜보아야 할 것 같았다.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차 그저 그것을 분출하기 위해 놈을 난도질하는 건 천마신교의 교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며 김도진 개인으로서도 그리 선택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구진청에게 해 주었던 조언을, 천마신교의 교리를 소천마로서 자신에게만 관대하여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만을 위하여 김도진 자신을 희생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다시 사는 도진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그를 통하여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노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을 철저하게 다스릴 수 있으며 그렇기에 철저하게 '천벌'을 내리기 위하여 기다릴 수 있다.

    설령 배경석이 정말로 무형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분 세탁이 가능할 정도의 잔챙이라는 게 명백하게 밝혀진다 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도진을 죽인 것에는 배경석에 그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다.

    당사자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퇴직금을 메꿀 수 있는 무언가가.

    그것은 어쩌면 다 끊어지지 않은 장기 밀매 업계와의 선일지도 모른다.

    겨우,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이 무엇이든.

    도진은 전생의 끝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과거'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다.

    그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조금 기다리는 건 지금의 도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부탁할게."

    "맡겨 둬."

    * * * *

    7월에 배경석의 공장이 이사를 온다 해도 즉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얼마간은,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분노에 매몰되지 않은 도진은 그에 관하여 조바심을 내지 않았으니 그 시간을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데에 썼다.

    "사하라 사막에 좀 다녀올까 해요."

    "사하라 사막? 아, 연구회 다녀오게?"

    "네."

    연구회. 그러니까 고대무림언어연구회다.

    일전 원화문과 의성문의 일에서 도진은 자신의 고대 무림어 실력을 보여준 일이 있었고 그에 관하여 고대무림언어연구회가 관심을 가지고 초청장을 보냈었다.

    당장은 응할 수 없었으나 졸업 후 방문하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보냈었던 도진은 예정대로 무림대회가 끝난 지금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하라 사막에 가려 하는 것이다.

    "하긴, 지금이 다녀올 만한 좋은 시기긴 하네."

    "우리 교주님은 보고만 받으면 되니까. 마음 놓고 다녀와."

    "네. 고마워요."

    총괄부를 맡고 있는 오성아와 한유아를 필두로 하여 지지해주는 이들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었기에 도진은 마음 놓고 제법 시간이 걸릴 '출장'을 결정할 수 있었다.

    목적은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회원 자격이다.

    본래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선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에 응시하여야 하며 그 외 빡빡한 여러가지 심사를 거쳐야만 하는데 도진의 경우 초청장이 있었기에 그 과정을 대폭 단축할 수 있으며 시험도 바로 치를 수 있다.

    그리하여 회원 자격을 얻게 되었을 경우의 메리트는, 일반적으로는 소천마라 하여도 접근하기 어려운 고대 무림 시대의 서적들이다.

    도진이 무림인이기에 무공이 기록된 서적에의 접근은 제한되겠지만 어차피 그건 도진의 목적도 아니다.

    도진이 원하는 건 하나.

    현대와 '단절'된 고대 무림 시대 그 자체의 이야기다.

    * * * *

    비행기를 타고 하늘길을 따라 한국을 벗어나 이집트로 향한다.

    상당히 작은 기체임에도 탑승객을 절반도 채우지 못한 비행기를 무려 열다섯 시간 넘도록 타고서야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시간동안 제법 도진을 흘긋거리는 시선이 많았던 건 도진이 소천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이 비행기에 탑승한 이들 중 다수가 고대무림언어연구회와 관련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공항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연구회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 인물들 다수가 비행기를 함께 탔던 이들이었다.

    버스를 타고 현대 문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포장된 도로를 통하여 길만큼은 계속 이어지는 사막을 달린다.

    멀리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이는 사막을 감상하는 사이 버스는 이윽고 도로의 끝, 거대한 상아탑 앞에 멈추었다.

    이 사막에 있기에는 지극히 이질적인 순수한 상아색의, 그래서 신비한 거대한 상아탑이었다.

    주변으로는 상아탑을 중심으로 하여 확장된 소규모의 마을과 그 마을을 둘러싼 검문소가 있으니 바로 이곳이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본부였다.

    "어서오십시오."

    천마신교의 교주, 무림의 소천마,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초청장을 받은 신인.

    신분이 확실한 도진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여러 검문을 즉시 통과하였고 상아탑 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소천마. 상아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외부와 달리 최적의 환경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아탑 내부에서 도진은 연구회 간부의 환영을 받았다.

    "예, 반갑습니다."

    인사를 하고 상당히 괜찮은 숙소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날, 요청을 하여 즉시 시험을 받게 되었다.

    "해독이 끝난 짧은 문서입니다. 일주일 내에 그 문서에 관한 성과를 검토하여 회원의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게 됩니다."

    시험은 시간을 정하고 그 안에 객관식이나 주관식으로 답을 써내는 것이 아닌, 연구회에 가장 필요한 고대 무림의 서적에 관한 '성과'를 요구했다.

    이곳이 학교도 아니니 지극히 명료하면서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그 시험을 위한 '시험지'를 건네는 간부를 포함한 직원들의 시선에는 묘한 기대감과 적대감이 섞여 있었다.

    기대감은 도진이 일전 보여주었던 '지식'에 관해서다.

    순수하게 고대 무림의 서적을 해석하고 분석하여 학문적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사람들.

    도진은 의성문이 공개했던 서적의 해석에서 틀린 부분을 그 자리에서 즉시 지적했었다.

    아무런 참고 자료도 없이.

    '천마신교의 계승자'로서 그들이 모르는 지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무언가를 보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적대감은 질투다.

    이런 곳에서까지 경쟁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런 곳에서마저 질투를 버리지 못한 이들이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진은 그런 질투를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꼭 다 해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문서를 통하여 회원의 자격을 가질 만큼의 소양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니까요."

    시험관의 역할을 맡은 간부는 도진에게 호의가 있는 인물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그 미소에 도진 또한 마주 미소를 지었다.

    "배려 감사합니다. 다행히, 문제가 어렵지는 않군요."

    "예?"

    "양반가 자제의 여염집 처녀에 대한 관심을 적은 문장이네요. 사흘이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모두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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