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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75화 (575/741)
  • 574화

    세계 무림대회 일반부 준우승자 전서린은 하오문의 일과 엮여 여전히 큰 주목을 받으며 이슈를 몰고 다녔다.

    중간에 기권하였으나 소천마와 얽혀 크게 이슈가 되었던 선효문의 구진청 또한 회자되었으니 호포문의 국대만을 용서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언했기 때문이다.

    "…많이 고민을 하였습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민될 때엔 솔직하게 마음 속에서 어떤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지 보라고 하셨던 소천마의 조언을 받아들여 보기로 하였습니다."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건 피해자뿐이다.

    국대만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가해자였으나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가해자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구진청은 피해자로서 국대만이 더 이상 가해자이지 않을 수 있도록 그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그 또한, 엄격한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가해자라는 걸 알게 되고 참회와 고뇌로 가득했던 시간을 보내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로 인해 생겼던 '피해자들'을 천마신교의 인위 재단이 케어해 주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 부분은 천마신교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더욱 좋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우승자 서소담의 이야기다.

    서소담은 분명히 크게 이슈가 되었다.

    비봉으로서 유명해졌고 소천마와 얽혀 더욱 많이 회자되었으나 정작 '무림인'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준 적이 없어 후기지수로는 유명했으나 이후 자연스레 평범한 무림인이 되는 테크를 타는 게 아닌가 했다.

    그런 우려를 서소담은 이번 비무대회에서 초절정의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우승함으로써 완전히 불식시켰다.

    무려 스무 살에 초절정이다.

    어디까지나 소천마가 말도 안 되는 '먼치킨'인 거지 스물에 초절정은 그 자체로 역사에 남을 성취인 것이다.

    비봉 서소담이 후기지수에 그치지 않고 무림에 그 이름을 빛내기에 차고 넘침을 증명하는 경지였다.

    그러니까 서소담은 얼마든지 비무대회에서의 우승을 자랑스러워해도 됐을 텐데…….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비봉 서소담의 우울, 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진이 모를 수가 없었다.

    "시장 데이트하러 가지 않을래?"

    그래서 시간을 내어 제안한 것이었고.

    "응! 갈래!"

    소담은 봄에 피어난 꽃처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 * * *

    지금 세간에 퍼진 '소천마(小天魔)'의 이미지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겠지만 사실 도진은 집돌이였다.

    그러니까 여유 시간에 어딜 나가는 등의 활동적인 일을 하기보다는 집 안에서 웹 서핑을 하거나 소설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등의 일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이건 전생에서의 삶이 큰 영향을 끼친 거긴 한데, 사실 이쪽이 더 성격에 맞기도 한 도진이었다.

    단지 도대체 잠을 언제 자냐고 할 정도로 천마신교의 일과 개인적인 수련, 그리고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학업에까지 집중하였기에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소담은 도진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곁에서 오래 지냈기에 그걸 알고 있는 많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때문에 도진이 자신의 속내를 짐작하고 바깥에 함께 나와 준 것이 고마웠고 시장 데이트라는 또 하나의 '처음'을 함께 해 준 것이 기뻤다.

    전혀, 무엇 하나 대단한 걸 하지 않았다.

    그저 생소한 재래 시장의 풍경을 일상의 영역에서 천천히 걸으며 두 눈에 담고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소담에게는 특별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되어 주었다.

    "점심 먹으러 갈까?"

    "응."

    "뭐 먹을까?"

    "돈가스."

    몇 번이고 함께 먹었던 돈가스가 바로 떠올라 말했고 시장 내에 있는 작은 돈가스집에 들어갔다.

    두어 명 손님이 있었고 소천마와 비봉의 등장에 제법 놀라긴 했으나 다가오진 않았다.

    개인의 사생활을 지극히 중시하는 시대.

    설령 '연예인'이라 해도 개인의 시간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잘 잡혀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고구마 치즈 돈가스 두 개 주세요."

    "네."

    주문을 한 도진이 티슈를 한 장 뽑아 반으로 접어 소담의 우측에 두고는 숟가락과 젓가락, 나이프를 그 위에 놓아 주었다.

    그 후 자신의 앞에 같은 세팅을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소담은 물컵에 물을 따라 하나는 도진의 앞에, 하나는 자신의 앞에 두었다.

    "고구마 치즈 돈가스 나왔습니다."

    주문한 돈가스가 나오자 각자의 앞에 놓인 커다란 접시의 돈가스를 자른 뒤 미리 약속했던 것처럼 서로 교환했다.

    숭무고에 다닐 적에 이미 몇 번이나 했었던 일이라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김도진이랑 서소담 사귀는 거 아니라면서?

    -?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사귀는 게 아니라고?

    -ㅇㅇ 아니래.

    -돌겠네.

    …숭무고 에타에서는 그런 말이 돈가스를 먹을 때마다 돌곤 했었다.

    어쨌든.

    소담은 그토록 따듯한 시간이 이어짐으로써 마음의 빗장을 풀고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말야."

    "응."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하고 싶었어."

    도진이 건네준, 그리고 자신이 받아들인 마음.

    진천공을 익혔고 그것으로 멋지게 우승을 하고 싶었다.

    초절정에 올랐으니 자신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오문이 칼을 갈고 그 정수를 다 투자하여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도는 사람이 무려 초절정이었고 그런 사람이 상대였다는 건 소담 스스로에게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소담은 전력을 다했으나 전서린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가진 바 힘을 최대로 발휘하긴 했으나 그것을 증폭할 수 있는, '절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소담은 손을 섞으며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오문의 출신.

    자신을 드러내긴 했으나 온전히 다 드러내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입장이라는 걸 고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 모든 걸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게 사람이니까.

    "잘 말은 못하겠지만…… 그냥. 그냥 조금 생각이 많아졌어."

    이 정도면 잘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말하는 듯한 현실이었다.

    도진은 그렇게 속내를 털어놓는 소담을 진지한 눈으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지금처럼 계속 곁에 있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든든해."

    "……어?"

    "우리가 처음 돈가스를 먹을 때만 해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이 참 멀었잖아."

    "……."

    "그런데 어느새, 여기까지 왔어. 여전히 가야 할 곳은 멀기만 하지만…… 그래도 꽤 빠르게 걸어왔다고 생각해."

    그랬다.

    처음, 함께 돈가스를 먹었던 게 언제였던가.

    소담은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멀게 느껴질 만큼 아득한 거리를 걸어왔다.

    "하지만 넌 지금도 내 곁에 있어 주고 있고, 계속 그렇게 해 줄 거잖아. 그렇지?"

    부끄럽지만.

    소담은 꼭 대답해 주고 싶었고 응, 하고 분명하게 소리 내어 답했다.

    도진이 씨익 웃었다.

    "꽤 마음에 드는 말이 있거든. 어쨌든 계속 나아가라, 고. 잠시 멈춰도 되고 천천히 가도 돼. 중요한 건 걷는 걸 포기하지 않는 것. 나는 그렇게 걷는 옆에 소담이 니가 있을 거라 믿고 있어."

    "아……."

    소담의 입술을 스치고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 목소리에는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짓눌렀던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순간의 깨달음이 스며 있었다.

    '응.'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벽이, 감당하고 있던 무거운 것들이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처럼 자그마한 것이 되어 있었다.

    답이 보이지 않던 무수한 고민들이 사소한 것이 되어 답을 찾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소담은 그럴 수 있는 '이치' 하나를 마음 속에 깃들이게 된 것이다.

    '계속 함께 걷고 싶어.'

    소천마의 곁을 함께 걷는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부담스레 여기고 있었다.

    그 부담이 부정적인 생각을 낳고 쌓이고 또 쌓여 앞을 가로막는 벽이자 스스로를 짓누르는 짐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달리한다.

    함께, 계속 도진의 곁을 걸을 것이며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 또한 의무가 아닌 즐거움이 된다.

    그러니까.

    이제 걷는 것이 힘들어 멈추는 일은 없는 것이다.

    도진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갈까?"

    소담이 거기에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 *

    시장 데이트의 마지막은 쇠락해 가는, 잊혀진 시장이었다.

    둘이 함께 걸은 시장은 달동네인 문월동에서 나와 큰 도로를 건너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재래 시장이다.

    도진은 그 재래 시장의 길을 나름 꿰고 있었으나 깊은 곳 끝자락에 있던 '잊혀진 시장'은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시장을 기준으로 하면 깊은 곳 끝자락이었으나 정작 그 위치는 큰 도로가 채 2분도 걷지 않아 나오는 곳이었다.

    뒤로는 소규모라 하지만 지어진 지 오래 되지 않은 아파트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도로와 아파트 사이에 위치한 그 구역은 무려 반세기, 50년 전에 지어진 큰 건물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도로 맞은편이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어 한창 공사가 되던 때에도 그곳은 격리되어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었다.

    그야말로 잊혀진 것처럼.

    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잃었고 넓은 반지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대형 마트도 폐업하여 비었다.

    바로 그곳에, 전생의 도진이 다녔던 공장이 들어섰었다.

    그 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알게 되었던 이 구역을 도진은 소담과 함께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도진은 나지윤과 마주했다.

    "어때?"

    "무언가 낌새랄 만한 건 전혀 없어. 추세로 봐서는 아마 확정적으로 배경석이 공장을 인수하게 될 것 같아."

    "그래."

    오늘의 데이트는 소담과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지만 거기에 아주 조금, 도진의 감상이 섞였으니 공장이 이사하기 전 그곳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업무'는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삶을 살게 된 지금 근처에 살면서도 전혀 몰랐던, 잊혀져 가는 시장을 소담과 함께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허나 순수하게 그런 의도였다 해도 소천마가 된 지금은 그것마저 큰 영향력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늘 소천마랑 비봉이랑 시장 데이트 함 ㄷㄷㄷ

    당장 오늘 낮의 일이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정보'가 퍼지는 만큼, 영향을 받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그저 잔챙이처럼 보이는 배경석이 무형독과 연관이 있다면, 말이다.

    무형독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소천마가 왜, 굳이, 이 시기에 공장이 이사할 곳으로 예정되어 있는 그곳을 방문했을까.

    아무것도 아닌 흔해빠진 공장이 들어설 그곳을.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무언가 움직임이 있다면 날카로운 세이전의 감각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배경석이 정말로 신분 세탁에 성공할 정도인 평범한 잔챙이라는 게 밝혀지든, 아니면 그렇게 보일 정도로 잘 위장한 무형독의 감염자라는 게 밝혀지든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 위한 포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부탁할게."

    "그래."

    어느새, 봄을 지나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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