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꽤나 크게 흥한 세계 무림대회의 폐막식이 진행되었다.
의례적인 절차로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기에 관심도는 당연히 바닥을 달렸는데 그래도 개중에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는 게 없지는 않았으니 무림대회의 시상식이었다.
일견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왜 결승의 결과가 나온 날이 아닌 폐막식에서 청년부와 일반부의 시상식을 하느냐고.
하지만 알고 보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부분이 있었으니 시상자의 '컨디션'에 관한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격투기 선수가 트로피나 벨트를 들어올릴 때 얼굴이 엉망인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
하물며 그것이 무공을 겨룸에야.
생명에 지장은 없다지만 며칠 요양이 필요한 경우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시상자들은 개인의 체면과 문파의 명예까지 포함하여 가능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고 주최측에서도 폐막식에 함께 진행하는 것이 이득이 되었기에 시상식은 폐막식에 포함된 것이다.
청년부 8강에 든 성민혁은 대문파를 견학할 수 있는 투어 참가권 등의 부상을 획득했고 우승한 성지인은 상금과 우승 트로피에 각종 부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상금을 포함한 여러 혜택은 인위 재단에 기부하여 꿈을 펼치지 못한 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트로피를 제외한 모두를 기부해 버렸다.
준우승을 차지한 청성파의 제자 또한 체면 때문에라도, 질 수 없다는 얼굴로 기부를 해 버렸고 3위 결정전에서 힘겹게 3등을 차지한 학생도 눈물을 감추며 기부를 택했다.
떠밀리듯 기부를 하는데 그게 옳다는 걸 알면서도 아까워하는 모습이 밉다기보단 현실적이면서 정감이 가는 모습이어서 제법 이름을 알렸으니, 선행의 보답을 받았다면 받은 것이었다.
그런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있었던 청년부와 달리, 일반부에선 핵폭탄이 터졌다.
우승한 소담은 지극히 평범하고 정석적인 말을 남겼고 성지인과 마찬가지로 인위 재단을 통하여 상금을 포함한 것들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터뷰가 돌아온 적련화 전서린이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셨지요. 제가 비무대회에 출전한 이유. 그것은, 하오문이 이제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에서 옳은 일을 하며 무림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문파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전혀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무림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이 확실한 폭탄 선언에 폐막식이 술렁였고 여파는 세계로 더 크게 퍼져 나갔다.
폐막식에선 진행 요원들이 허둥지둥, 당혹감을 억누르며 얼버무렸지만 작심한 하오문은 따로 기자 회견을 열었고 전서린이 선언했다.
"하오문은 시궁쥐였습니다. 천대받고, 더러운 일을 하고, 그 시선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이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뜻있는 이들은 이제 그런 시궁쥐가 아닌 양지의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빛을 받으며 사는 이들이 되고자 하였고 바뀔 의지가 있는 사람들 또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문파로 하오문이 거듭나기를 바랐습니다."
"낮은 곳의 더러운 문파가 아니라, 낮은 곳을 살피는 문파로서 하오문은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니 여러분들의 응원을 감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요 쉽게 믿기도 힘든 선택이었다.
하오문이 하오문일 수 있었던 건 그 정체성에 적지 않게 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뒷세계'에 살기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제외하면 하오문은 더 이상 하오문(下汚門)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음지가 아닌 양지의, 하오문(下午門)으로 불리고자 합니다. 허나 그렇다 해서 음지의 것들을 외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 속해 있었기에 보고 듣고 아는 것들이 있으며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돕고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문파가 되겠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가장 앞에 서서 계도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전서린은 실제로 하오문(下汚門)이 아닌 하오문(下午門)이 되겠다고 했다.
하오(下午)는 정오부터 밤 열두 시까지를 뜻하니 이름에서부터 그 의지를 잘 나타낸다.
여론은…… 혼돈이었다.
깊은 생각없이, 그 뜻이 올바르고 적련화가 외치니 그냥 지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범죄자가 당당하게 양지에서 설치겠다는 게 역겹다는 이들도 있었다.
생각을 좀 하는 이들은 하오문 내부의 분열을 걱정했는데 그것은 곧 가시화되었다.
-멋대로 우리를 양지로 끌어내려는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성명을 내며 더욱 깊은 음지로 숨어들겠다는 하오문 내의 세력이 있었고.
"원하지 않는 이들을 강제로 끌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이며, 믿음을 주지 못한 저희의 부족입니다."
전서린은, 전서린과 함께 하는 하오문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것은 곧 하오문의 약화와 정보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하오문은 그 부분마저 감수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의지를 표명했다.
"솔직히, 의도가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해."
시끌시끌한 가운데 나지윤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이전주 나지윤이 그렇게 말할 만큼 전서린을 대표로 세운 하오문의 의도가 아리송한 게 사실이었다.
"그렇네."
"양지로 나오고 싶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음지로 굴러떨어진 이들을 돕겠다는 발표가 사실이라면 그게 답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난 직업병이 있으니까 말야."
씨익 웃으며 말하는 내용이 곧 혼란의 이유이다.
순수하게 표명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허나 다른 곳도 아니고 하오문이다.
그것이 아무런 속내 없는 순수한 결정일 거라고 믿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며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다.
"일단은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할게."
"그래. 고마워."
도진은 판단을 위한 근거의 수집을 나지윤에게 맡겼다.
그리고 혼자가 되었을 때.
외부가 아닌 내부의 문제를 머릿속에 풀어놓았다.
후회와 불행으로 가득했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고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지독하게 도진을 괴롭혔던 강치환을 중심으로 했던 일진 패거리들이 죗값을 치르게 만든 것부터 시작하여 삶을 완전히 나락으로 밀어 버렸던 뺑소니범도 붙잡아 감방에 처넣었다.
유진이의 삶을 망가뜨린 놈 또한 그 배후까지 천벌을 내렸으니 전생엔 볼 수조차, 닿을 수조차 없었던 것들을 보고 또 해결해 왔다.
허나 아직 한 가지.
결코 잊지 않았으나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전생의 끝. 도진을 살해했던 인간에 대한 문제였다.
배경석. 전생에 10년을 넘게 다녔던 공장의 사장이자 범인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무형독의 꾐에 넘어갔던 존 스미스와 연관된 뒷세계의 상인들 리스트에서 볼 거라곤 역시 도진이라 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동명이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으나 첨부된 사진의 얼굴이, 기억에 있는 얼굴보다 젊지만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얼굴이 그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었다.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이어졌네.'
도진은 결코 자신을 죽인 인간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 그를 찾지 않은 건 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진이 사장에 관해 아는 건 당시의 얼굴과 이름뿐이었다.
공장의 위치 또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나 당장은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이 그 공장이 문월동에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이 입사한 것이다 보니 이사 이전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방법이 없었던 건 아니다.
회귀 후 당장은 불가능했지만 천마신교의 세이전이 탄생한 뒤로는 사장의 젊었을 적 얼굴을 추측하여 몽타주를 그리고 이름과 함께 수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사로이 막대한 자원을 소모하는 일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었으니 차라리 도진은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장이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이 여름에 취직을 하였다.
서른다섯에 죽었던 도진이 15년을 다녔던 공장.
그것은 즉, 도진이 스무 살 여름에 공장에 취직을 했다는 소리다.
아주 많은 것들이 뒤틀리지 않았다면 도진의 기억 속에 있던 공장의 이사가 곧 있을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다.
-공장 망하는 건 아니겠지?
-사장 친척이라 어릴 적부터 어깨 너머로 배웠다잖아. 괜찮겠지.
-어깨 너머로 본 거 가지고 될 거였으면 걱정 안 하지. 외국 가 있었다면서?
사장은 '예전 사장'의 친척이었으며 회사를 넘겨받은 거라고 수군거리던 아주머니들의 말을.
배경석은 검은 돈을 잘 숨겨 들고 한국으로 귀국하였으며 친척을 찾아갔다는 조사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도진이라는 변수가 있었음에도 그의 삶은 전생과 비슷하게 흐를 것처럼 보였다.
배경석에 관한 전생의 기억을 꺼내어 본다.
아주머니들의 걱정과 달리 공장은 그럭저럭 돌아갔다.
적당히 잘생긴 얼굴에 적당히 잘생긴 키, 적당히 잘 어울리는 양복의 사장.
나름 큰 규모의 중견 기업 회장이 또 회장으로 있던 어떤 모임에 들었고 그 연줄로 일감을 받기도 했다.
그 기업의 유니폼을 만들어 납품했는데 검수 직원의 '사이즈가 일정치 않다'는 불만에 뒷짐을 지고 웃는 모습에서 부하 직원 앞에서 체면에 스크래치가 간 일에 대한 멋쩍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진을 고용해 주었고 도진과 함께 직접 납품할 물건을 들고 간 날이었으니까.
입사 초기.
또 다른 곳에 함께 물건을 납품하고 점심 시간이 늦어 사장과 둘이 밥을 먹을 때.
-그러니까 말야, 글 써서 밥 먹고 사는 것들까지도 든이랑 던을 구분 못한다니까?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나도 그걸 아는데 요즘 젊은이들 국어 수준이 심각하지 않나 싶은 거지.
젊은이도 젊은이지만 고등 교육을 받기 힘든 환경에서 자란 중장년의 국어 교육도 함께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전생의 도진이었으나 당연히 말로 꺼내진 않았다.
철저하게 을인 도진이 철저하게 갑인 사장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으니까.
그저 예, 하고 대답했었다.
초기엔 그런 살짝 경박하면서도 꼰대스런 모습들을 보였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니까 나름의 위엄을 세운다고 많은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툭하면 요즘 사정이 어렵다 어렵다 하는 데서 이미 위엄이나 존경심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는데 말이다.
뭐.
딱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도진을 계획적으로 질식사하게 만들어 죽일 거라고는.
허나 사람 속은 본래 모르는 법이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전생의 도진은 알지 못했다.
삶에 여유가 없어 배움에 투자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몰랐다.
설령 법을 모른다 해도 잠시 고민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이 있었다.
당사자가 죽더라도, 줘야 할 퇴직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까 왜.
'그 부분에 관해서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나를 죽인 거지?'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풀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
세계 무림대회가 끝났다.
하오문에 관한 일로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운 가운데 도진이 나지윤에게 몇 가지를 부탁하고서 소담을 만났다.
"소담아."
"응?"
"시장 데이트하러 가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