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서울 대연무장의 중소문파 부스 구역.
감정 싸움이 무공의 격돌로 번지는 게 드물지 않아 이벤트로까지 취급되던 곳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평소와 결이 다른 무거운 분위기가 사건 현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발단이 된 소매치기범은 한쪽에서 하오문의 무인들이 붙잡고 있다.
전서린의 뒤에서 구진청에게 피범벅이 되도록 얻어맞아 축 늘어진 소매치기범을 전혀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얼굴들이었는데, 그 소매치기범이 자신을 하오문의 문도라고 사칭했기 때문이다.
-나 하오문 문도야! 다 오해라고!
안 그래도 하오문은 호포문 못지 않게 삐딱한 의심의 시선을 받으며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버티고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날들이었다.
평소 이상으로 행실을 조심했고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인내심 강하고 똑똑한 이들만 선별하여 부스를 열었는데 그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걸 넘어 오히려 악화시킬 뻔한 범죄자를 곱게 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범행이 들키자 하오문 문도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사건을 키웠고 하오문의 문도가 즉시 대응하여 전서린에게 알렸다.
다급히 달려온 전서린이 그가 사칭범이라는 걸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다면, 전서린이 이번 무림대회에서 명성을 얻지 못했다면 일이 어떻게 흘렀을지 모른다.
그렇게 소매치기범이자 사칭범을 붙잡은 하오문의 문도들은, 전서린은 호포문의 제자를 사실상 일방적으로 구타하던 구진청의 주먹을 막아선 도진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호포문의 제자를 몰아붙이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식어 버린 구진청의 얼굴에는 배신감과 의문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진하게.
그래서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의 분위기를 바꾼 것은, 원인이 된 구진청이었다.
"소천마 님. 이곳에는 어떻게……?"
"리지가 호포문에 방문한다고 해서 겸사겸사 같이 오게 됐습니다."
약리지가 호포문의 여론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말을 꺼냈고 도진이 함께 오게 됐다.
그리고 사건 현장을 마주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사실은, 조금 더 깊은 사정이 있긴 하지만 겉으로 내세운 명분도 거짓은 아니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자세한 사정을 모르시겠네요?"
구진청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저기 저새끼는 동문입니다. 네, 그러니까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말이죠."
일진 문제는 무림이 현대에 섞이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무공의 겨룸'이 되면 오히려 처벌이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는 조금 더 세밀하게 구분하고 판단하여 학교 폭력에 관한 부분은 가중 처벌을 함으로써 주춤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구진청은 그런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정말로, 심각한 수준의.
때문에 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의 처절한 복수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받고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구진청이었기에 명분이 너무나 명확하고도 강력했다.
"저놈은 그런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 살아 있어봐야 세상에 해밖에 끼치지 않을 쓰레기들이랑 어울리던 놈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소천마 님. 소천마 님이니까 오히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소천마 님 또한 그런 해충들을 박멸해 오셨잖습니까."
논리가 부족한 감정에 기대는 호소였지만 그래서 더 강력하다.
그리고 제삼자로 사건을 지켜보던 여림의 머릿속에서 불쑥 감정을 뚫고 이틀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고.
-무슨 이야기요?
-솔직히 무림 독감 관련한 이야기는 다 끝난 이야기잖아. 피해자들도 나름 보상을 다 받았다고 했고.
-네.
-그런데 이렇게 무림대회에서 호포문을 욕하는 게, 사실은 밑작업이라는 거야.
-밑작업이요?
-어. 호포문이 중견이라곤 해도 사실상 무림 교실 업계에서는 톱이잖아. 그동안은 그걸 뒤집을 수 있는 곳이 없었는데 무림 독감 때의 일로 드디어 판도를 바꿀 기회가 생겼다는 거지.
-아……. 그러면?
-맞아. 그 이미지를 계속 가지고 가면서, 부풀리면서 사람들이 호포문의 무공 교실을 꺼리게 만드는 거지. 그러면 호포문이 차지하고 있던 파이를 나눠 먹을 수 있지 않겠어?
-그, 그렇네요.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호포문은 천마신교랑 접점이 있잖아요. 게다가 약봉도 호포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다가 들키면 오히려 역풍 맞는 거 아니에요?
-뭐, 그렇긴 하지. 근데 어디까지나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는 거니까. 그리고 만약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닐 텐데 뭔가 우리가 생각 못할 방법이 있을 테지.
'아…….'
여림은 알 것 같았다.
사실 이게 정말로 어떤 수작을 부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인지는 전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이것은 천마신교에 외통수이지 않은가.
천마신교에 대한, 소천마 김도진에 대한 강력한 지지는 '통쾌한 권선징악'에 있었다.
악을 단순히 징치하는 게 아니라 시원하게 때려부순다.
처벌이 미지근하여 악을 오히려 권장하는 듯한 시대에 그들을 말 그대로 부숴버리며 죗값을 치르게 해 온 것이 소천마 김도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김도진에게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하는 듯한 사건이 닥쳐온 것이 아닌가.
-이건.. 막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라면 몰라도 천마신교라면 그렇지.
-아 좀 뭔가 아닌데 이거..
학창 시절 가해자를 잔혹할 정도로 두들겨 팬다.
'무림인 간의 대결'과 '복수'라는 명분을 가지고.
다른 이라면.
'정파(正派)'의 무인이라면 그것을 말리기 위해 개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교(魔敎)'는, 김도진은 그러면 안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마신교와 김도진은 그런 이미지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지 않는 것이 최선이 될 수도 없었다.
호포문은 어찌되었든 무림 독감 사건으로 김도진과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던가.
천마신교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아니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외면하는 건, 심지어 한 번 앞을 막어서 놓고 외면하는 건 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에서 김도진에게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판을 읽고 있는 이들은 김도진이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전에 없이 긴장하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김도진이 어떤 선택을 할까.
찰나가 주욱 늘어난 듯 했고 그 짧은 순간 김도진은.
"네, 압니다."
전혀 고민하지 않은 얼굴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구진청이 환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
'아…….'
-이렇게 되나..쩝..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다수는 실망하고 만다.
막지 않는 게 맞지만.
그래도 인연이 있던 호포문을 너무나 간단히 버리는 듯한 대답에.
그리고 은밀히 존재감을 감추고 지켜보던 이들 몇몇과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관망하던 일부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허나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조금 다른 것 같네요."
환하던 구진청의 표정에 다시 구름이 끼었다.
"다르…… 다구요?"
"네. 이번은 조금 다릅니다."
"무엇이, 무엇이 다릅니까?"
배신당한 얼굴의 구진청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도진이 말했다.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호포문에 관해서요. 그러면서 제법 알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구약정 등으로 인해 혹시 모를 무형독의 침투를 대비하여야 했다는 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호포문에는 과거를 반성하고 그 죗값을 갚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저분, 구진청 님과 동문이었던 국대만 님도 있었죠."
"국대만 님은 청소년기 방황했고 주먹다짐을 하면서 일진들과 친해졌지만……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은 건 아니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구요?"
구진청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난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진들과 어울려 놀았고 그들의 죄를 방관했지만, 가담하여 죄를 짓지는 않았더군요. 일진들과는 주먹다짐을 했지만 일반 학생들을 상대로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
그 말대로였다.
일진들과 어울려 놀았으나 일진 이외의 학생들과 싸운 적이 없었고 다른 이들을 협박하거나 돈을 뜯어낸 적이 없었다.
"다른 해충들은 다 구제한 구진청 님이, 국대만 님만큼은 찾아가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던가요?"
"……."
구진청은 즉시 반론을 하지 못했다.
허나 곧 분노와 함께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니,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높았던 다른 놈들이 죗값을 치르게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지 저놈을 잊었던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피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구약정의 부축을 받고 있는 국대만에게로 향한다.
그는 아직까지도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그를 대신하여 도진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궤변으로 참견하는 것은 그쯤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천마."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중앙에 발을 들이는 이가 있었으니 소맷자락의 매화가 소속을 알려주는 노인이었다.
빛이 바랜 적금발과 대비되는 깊고 선명한 푸른 눈동자를 지닌 그는 화산에서 제일 검을 잘 쓰는 무인.
경계를 넘어선 고수.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 리암 드가모였다.
세월이 느껴지는, 그러나 그 세월에 결코 부서지지 않은 바위와 같은 기세를 발산하는 거물의 등장에 일순 그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리암 드가모가 말했다.
"우선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당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무를 받아들였는데 거기 제삼자가 끼어들어서 변호를 하고 있는 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동감합니다. 천마신교는 지금껏 일을 행사함에 있어 거침이 없었는데 자신과 연관이 있는 이가 얽혔다는 이유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려 하는 건 아닙니까?"
리암 드가모에 이어 무당파의 장로도 발언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이거 이중잣대 같은데."
"내로남불 아닌가?"
마치 바람을 잡듯 여기저기서 섭음술을 쓰지 않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들린다.
어느새 리암 드가모를 필두로 한 이들의 존재감이 현장을 덮고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숨을 죽이고 있다가 휩쓸린 이들과 함께 단숨에 덮쳐드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엄격한 잣대로, 똑같은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그 안에서도 도진의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모든 이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리암 드가모는 아무런 기세도 일으키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지극히 선명한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이게 무슨…….'
자신만이 아닌 함께 하는 이들의 기세로 일대를 뒤덮었다.
김도진의 목소리가, 존재감이 득세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김도진 또한 기세를 일으켜야 했고 그로 인해 기세끼리 격돌하여 사람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게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그들의 기운과 충돌하지 않았다.
은연중 일대를 가득 채운 기세가 그저 공기인 것마냥 퍼져 나갔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소리를 낸 것처럼.
세상을 상대로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수레를 상대로 팔을 치켜든 사마귀가 된 것만 같았다.
그 발언 하나가 개막식의 허공답보만큼이나 미지의 공포로 리암 드가모를 덮쳤다.
그리고 도진은 '그들의 공간' 안에서 너무나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 엄격하고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면."
도진의 서늘한 미소가 일대의 기온을 낮춘다.
"당신들 또한 똑같은 죄인이 아닌가요?"
쿠궁-!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리암 드가모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