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높은 무공 입문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여……."
"무림맹이 좀 더 적극적으로 세계 무림의 의견을 취합하는 창구로서 기능하기 위해……."
회의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그야말로 보여주기 위해 다듬어진 주제들이 평이하게 논의되었고 의결되었다.
과연 기사는 제법 나오지만 댓글은 거의 없을 만한 내용들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세계 무림의 대표들이 모여 결정한 내용들인 만큼 기사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그것은 이를테면 '세계의 탄소 배출량을 점진적으로 줄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같은 거다.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고 자세한 건 협의해 나가겠다 정도의.
심지어 이미 이전에 합의됐던 걸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니 거창하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흥미를 지속적으로 잡아둘 내용은 아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은 집중력이 흐트러진 채 '기대했던 일'이 언제 벌어질까 기대하였고.
"근래 무림의, 폭력이 앞서는 기조에 관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오.
-드디어 ㅋㅋㅋ
-가나요?ㅋㅋㅋ
청성파의 장로가 한 발언을 그 시작으로 보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청성파 장로의 말에 무당파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합니다. 우리는 무림인이니 무공을 행사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도에서 벗어나 폭력이 되는 걸 지극히 경계해야 하지요."
"예. 하지만 요즘은 그 도를 도외시하고 힘만을 찾는 경향이 너무 강해진 것 같습니다."
마치 이어받듯 무당파 장로 다음으로 화산파의 장로가 발언했다.
지극히 포괄적이면서 바른 말이었지만 다름 아닌 이 자리에서의 발언이었기에 그것은 에둘러 천마신교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천마신교는 너무 극단적인 거 같음.
-?
-아니, 좀 그렇잖아.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그걸 일을 크게 벌려서 소란을 일으키는 느낌?
-웃기네 ㅋㅋㅋ 아니 그러면 개막식 때도 '우리 자리가 없으니 좀 비켜주세요'라고 해야 했음?
-ㅇㅇ 그래도 되잖아. 그러면 평화롭게 해결됐을 텐데.
-엌ㅋㅋㅋㅋㅋ 와 미치겠다 ㅋㅋㅋㅋ 어디부터 설명해야 됨 이걸?
그것이 댓글 알바이든 혹은 세상물정에 어두운 순진한 이이든.
천마신교가 너무 과하고 폭력적이다, 라는 여론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은근한 시선이 소천마에게로 모여든다.
지금껏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그저 자리를 지키던 도진은 그 시선에도 평소와 같이 여유롭고 잔잔한 옅은 웃음을 지은 그대로였다.
그런 도진을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모습으로 처음 말을 꺼냈던 청성파 장로가 발언했다.
"우리는 그런 치우친 마음가짐을 바로잡기 위하여 조금 더 세상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 뜬구름 잡는 소리지?
-뭔 공격을 하려는 밑밥일까?
지켜보던 이들이, 특히나 채팅창에서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반응이 쏟아진다.
현장과 달리 채팅의 특성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즉각적으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수는 이 '빌드업'이 어떤 형태로 천마신교를 공격할까에 주목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무당파 장로의 질문에 청성파 장로가 답한다.
"힘에 취하여 그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의 수양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선업을 쌓을 수 있도록 문파 차원에서의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으음……."
"개인에 그치지 않고 문파가 세상을 위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문파가 그런 태도를 취해야 제자들도 따라오는 법이니까요."
"그렇군요. 소천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화산파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더니 도진에게로 시선이 모이게 만들었다.
-뭐지?
-천마신교도 착한 척 하라는 그런 공격인가?
무언가 공격하려는 것 같은데 의도를 모르겠어서 혼란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도진은 아니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옳고 당연한 일을 못하는 건 옳고 당연한 걸 행하지 못할 만큼 어긋나 있기 때문일 테니까요. 그걸 교정할 수 있다면 당장 시행하는 게 좋겠죠."
"……."
"크흠."
곳곳에서 불편한 기색이 감돈다.
대놓고는 아닌데 그래서 더 얄미운 발언이었다.
화산파 장로는 연륜으로 그런 기색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혹시, 천마신교는 이와 관련하여 진행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음, 그렇네요. 몇 개가 있긴 하죠."
뒤에 이어질 내용이 어떤 것일지,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기도 전에 떠올릴 수 있었다.
일단은 인위(人爲) 재단이다.
사람을 위하는 재단.
그 이름대로 인위 재단은 잠룡문 때부터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근래엔 100만 구독자 이벤트로 시작하였던, 성민혁과 성지인을 도왔던 가구를 만들어주는 봉사와 연계하여 지속적으로 당첨자들을 지원하는 재단으로 크게 유명해졌다.
바할라가 천마신교에 합류하면서는 배울 의지가 있으나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이들을 대규모로 지원하고 있으니 대문파 못지 않은 사회 공헌을 하고 있었다.
개인 단위로도 도진은 자신의 채널을 통하여 천마신교의 교도들과 함께 어려운 이들을 돕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 주었으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얼마든지 있다.
화산파 장로 또한 그런 것들을 말할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발표하기 위해 조금 빡빡하게 진행한 일이 있습니다."
"?"
"의선약가와 협력하여 진행한 연구입니다."
"??"
발언하는 도진에게로 약리지와 클로에 덴젤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도진이 발언했다.
"제가 잠룡이라 불리던 시절에 약속한 것이 있었죠. 제가 자격을 얻게 되면, 내공 거부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어?
"천마의 이름을 이었음을 당당히 공개할 수 있게 된 지금, 저는 그 자격을 획득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준비해 왔습니다."
-어어?
"무공에서 내공 거부 체질 개선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의선약가와 협력하여 연구,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 정리하였습니다. 제자인 클로에 또한 유일한 무공의 계승자로 큰 도움을 주었죠."
-어어어???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연구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공을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해 나가는 쪽으로도 단서를 얻었습니다."
-...뎃?
"내, 내공을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요?"
자리에 동요가 퍼져 나간다.
내공을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똑같은 수련으로 더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 파급력은 상상을 아득하게 넘어선다.
마치 터지기 전 화산과 같은 분위기에서 도진은 언제나처럼 옅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세한 건 자료에 다 정리해 두었으니 회담이 끝나고 한 부씩 받아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 * * *
공개 회담은…… 종료당했다.
절차를 거쳐 종료되긴 했는데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게 어울리는 형태로 끝이 나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시발 내공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 개선 방법을 찾았다고? ㅋㅋㅋㅋㅋ
-엌ㅋㅋㅋ 어어어어엌ㅋㅋㅋㅋ 시발 표정들 봐라 ㅋㅋㅋ
-저럴 수밖에 없지ㅋㅋㅋㅋㅋ 다른 것도 아니고 내공인데 ㅋㅋㅋㅋ
내공(內功).
무공의 원천이자 신비의 원천.
'제5의 에너지'라고도 불리는 세계의 격변을 가져온 힘이다.
그리고 무림인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근원이기도 했다.
무림인들은 이 내공을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모으기 위하여 수많은 것들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돈 있는 이들은 미미한 효과를 보기 위하여 억 단위의 돈을 우습게 썼고 말이다.
그런 것이 내공이었는데.
근본적으로 내공 증가 효율을 늘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단서가 나왔다니 눈이 안 뒤집어질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때부터 누구도 회담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청성파와 무당파, 화산파, 심지어 소림사마저도 도진이 손에 든 서류에 정신을 빼앗겼으니 회담은 모두의 암묵적 동의하에 끝이 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
천마신교의 부스 앞에서 자존심마저 꾹꾹 억누르고 대문파의 무인들이 앞다퉈 줄을 서서는 천마신교가 건네는 서류철을 받아들고 돌아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등에 공개하는 건 오늘이 아니었기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자료를 획득하는 것이 문제였다.
약리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몰래 웃었다.
"선배 공격하려고 무지 준비했을 거 같은데, 완전히 밥상이 엎어졌네요."
약리지의 말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밥상이 엎어졌다라. 딱 맞는 비유였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건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읽을 수 있었다.
도진은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기보다는 상상도 못할 것을 준비하여 그들이 밑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던 판 자체를 아예 엎어 버린 것이다.
"존경합니다, 소천마 님!"
갑자기 다가와 그렇게 외치는 이에게 도진이 시선을 향했다.
번듯한 하얀 무복을 차려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도진보다 두어 살 정도 많지 않을까 싶은 그는 그러나 존경이 가득한 시선으로 도진을 대하고 있었다.
"저는 선효문의 구진청이라고 합니다. 평소부터 소천마 님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도진은 담백하게 그의 말을 받으며 인사했다.
어떤 뒷마음도 보이지 않는 그저 동경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받은 것이다.
"다시 뵐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선효문이면 한국의 중견문파다.
시선이 적지 않은데도 대놓고 천마신교에 호감을 표하는 그의 모습은 크게 눈에 띈다.
"음, 괜찮은 걸까요?"
약리지가 소곤거리듯 물었다.
도진은 글쎄, 라고 답했다.
깔끔한 차림에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는 청년.
그러나 그런 겉과 달리 눈을 통하여 들여다 본 내부는.
'꽤 일그러진 인간.'
이었다.
그가 떠나가며 인파에 섞인다.
그리고 인파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 중 누군가가, 구진청과 도진을 흘끗 훔쳐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 잘난 얼굴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김도진.'
* * * *
2주간 계속되는 무림대회는 그렇기에 2주를 꽉 채워 부스를 운영하는 문파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단 하루만 참가하는 문파가 있는가 하면 3일, 일주일 등 가능한 만큼 기간을 적어 내는 문파들의 일정을 취합하고 조율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일주일간 자리를 채우고 떠난 문파를 대신하여 또 다른 문파가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서울 대연무장을 찾았고.
"뭐야."
"역병 새끼잖아."
일부의 노골적으로 꺼리는 시선과 목소리를 들었다.
유서 깊은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한 문파.
그러나 지금 일부에게서 좋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그 문파는.
"막내야."
"예, 괜찮습니다."
구약정을 품은 호포문(虎咆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