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화
웅성거림이 커진다.
간결한 디자인이지만 문외한도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깊은 검은색의 무복이 성민혁과 성지인이 천마신교의 교도라는 걸 알려준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무림대회 청년부 최고의 활약을 펼친 두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적지 않았다.
여기에 비봉 서소담이 함께 하고 있었으니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문파의 무인이었다면 그 순간 주춤하며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먼 브라질에서 온, 외국의 소식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두 무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갈색 머리카락의 무인이 강하게 인상을 쓰며 나섰다.
"불쾌하기 짝이 없군. 제대로 된 상황도 모르고 우리를 비난하면서 참견하는 건가?"
제법 강한 기세는 큰 키와 근육질의 외모가 더해져 상당히 위협적이다.
그러나 성민혁은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당당히 서서 마주했다.
"제대로 된 상황을 모른다구요?"
"그래, 모르지. 우리는 그저 후기지수들의 모임에 적련화를 초대하려 했을 뿐이야. 그런데 저기 하오문의 문도가 그걸 성희롱을 한다는 식으로 우릴 모욕해서 화를 내던 상황이었지."
"그런 상황도 몰랐으면서 너희는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우릴 악당으로 몰면서 참견한 거다. 나이가 어려 잘 몰랐다고 하기엔 너무 큰 잘못 아닌가?"
완벽하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자평하며 만족했다.
물론 표정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제 저놈이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면 거세게 몰아붙이다가 재미를 보면 더 완벽해진다.
입맛이 확 돌게 만드는 게 둘이나 더 나타났다.
비봉 서소담과 용봉 성지인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예쁜 여자라면 눈을 굴리기 바쁜 성정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여기서 명분을 챙김으로써 저 둘까지도 후기지수들의 모임에 데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문파의 제자들과 좀 더 단단한 연줄을 만들 수 있을 거라 그는 기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짓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하시다니. 뻔뻔하네요."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켜는 것이었다.
즐거운 상상에 젖어있던 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거짓말? 뻔뻔하다?"
성민혁은 말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작은 화면이지만 무림인이라면 충분히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SNS의 글과 영상이 보인다.
-적련화한테 양키들이 양아치짓 하는데?
-하오문 소속이라 한 번은 터질 것 같더니 벌써 터지네.
전서린이 접근을 피하며 거듭 거절해도 끈질기게 들러붙는 두 외국인의 모습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어는 읽지 못했지만 영상만으로도 대충 내용 짐작이 가능한 게시물들을 확인한 두 무인이 뭐 씹은 표정이 됐다.
철저하게 방관하길래 좀 과감하게 나갔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SNS에 '박제'가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들의 나라에선 이런 식으로 휴대폰과 SNS를 통한 박제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렇게 되면…….'
"…어이가 없군."
"뭐가 말이죠?"
"여기는 남을 멋대로 오해하고 비난하는 게 당연한 나라인 건가?"
"헐."
"왜?"
"개 뻔뻔하네 쟤들."
영어를 알아듣는 구경꾼들이 그 뻔뻔함에 입을 벌릴 정도로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영상 또한 결국은 '정황 증거'다.
어찌됐든 두 사람은 적련화와 접촉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그저 적극적인 초대였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건 그거다.
'문제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뻔뻔함도 보유하고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어. 왜 우리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가려는 거지? 뭘 노리는 거야?"
적갈색 머리카락의 일행도 가세했다.
"동감이야. 텃세를 부리는 건가? 아니면 이런 식으로 누명을 씌워서 우릴 상대로 명성을 쌓아보려는 수작?"
강하게 밀어붙인다.
이런 식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갈등 구도로 끌고 가면,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하오문이 나서서 사과하고 끝낼 수도 있다.
그런 계산으로 떠벌이던 그들은.
"혹시 김도진이 시킨 건가?"
쿠웅-!
"…말을 조심해. 당신들."
지뢰를, 너무나 거대한 지뢰를 밟고 말았다.
드드드드…….
비봉 서소담, 그리고 성민혁과 성지인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피워올렸다.
지껄이던 두 외국의 무인이 저도 모르게 칼을 뽑아들 정도로 본격적이며 살벌한 기세였다.
"…뭐지? 싸우자는 건가?"
몰래 꿀꺽, 침을 삼키는 일행 대신 갈색 머리카락의 무인이 말한다.
소담이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소천마 김도진은 천마신교의 교주.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버릇없이 불러도 될 이름이 아니야."
"……."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불쑥 반항심이 치솟았지만 비봉 서소담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선 수준의 기세가 그것을 억누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썩어도 준치라고 중견문파의 제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fuck.'
실수였다.
소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감히 교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한 문파의 수장을, 설령 나이가 그보다 어리다 해도 문도들의 앞에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예의였다.
갈색 머리카락의 무인이 이를 악물었다.
"…인정하지. 실수를 했어."
이건 인정하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으로 순순히 실수를 인정한 그는, 그러나 그것만으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걸로 끝?"
여전히 날카로운 소담의 시선에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잘못을 인정했어. 그런데 뭘 더 바라는 거지?"
"…당신들. 정말로 기본이 안 되어 있네."
"뭐라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감히 한 문파의 수장을 이렇게 드러난 자리에서 예의없이 불러 놓고 사과 한 마디 없이 끝내려는 거야? 당신들은 그게 당연한 삶을 산 거야?"
사과를 해라.
모두가 보는 이 자리에서.
그 요구에 결국 두 무인은 말로 상황을 풀기를 포기했다.
"FUCK! 그걸 원한다면 실력으로 하지 그래!"
"더 이상의 모욕은 넘어가기 힘들어."
두 무인도 기세를 피워올렸다.
그들 또한 브라질에서 어딜 가든 꿀리는 입장은 아니었다.
대문파는 아니지만 대문파의 위세를 등에 업은 유서 깊은 중견 문파의 인정받은 후기지수였고 그랬기에 이곳 무림대회까지 온 것이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닐 성격이 아니었다.
"싸움이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누군가가 외치고 구경꾼들이 우르르 물러나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만들어진 무대 안에서 소담이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대신, 더 비참한 꼴이 될 건 각오해야 할 거야."
평소 이상으로 엄격한 얼굴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었다.
치근덕대고, 더러운 시선으로 훑고.
소담에게 그것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혐오감마저 옅어지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여기에 도진을 함부로 입에 올리기까지 했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은, 제가 해도 될까요? 언니."
그리고 그 마음은 성지인 또한 다르지 않았으니 이미 격룡기를 일깨운 그녀에게 소담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봐주지 마."
"네, 언니."
소담과 성민혁이 물러나고 성지인이 중심에 섰다.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의 무인이 마주했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으나 내심 안도했다.
'청년부 따위가.'
솔직히 서소담은 부담스러웠다.
승리를 전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지인은 아니었다.
청년부.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애이지 않은가.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20대 중반의, 무림에서 제법 경험을 쌓은 후기지수다.
그 격차가 얼마나 큰지 몸으로 몇 번이나 체감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본때를 보여주자.
보는 눈이 많으니까 즐기지는 못하겠지만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좋지 않았던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킬 수 있다.
테에엥-!
누군가가 커다란 소리를 냈고 비무 시작과 동시에 그는 내공을 두른 채 몸을 날렸다.
그는 190에 달하는 키에 근육질의 몸을 자랑한다.
서양에서 유행하는 외강내초(外强內超), 내공의 단련과 함께 외공의 단련에도 힘쓰는 기조에 따라 피지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눈앞의 소녀는 어떤가.
그의 턱에도 미치지 못하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다.
안 그래도 내공에서 열세일텐데 피지컬에서도 지극히 열세이니 이미 승부는 난 것이다!
쿠웅-!
강렬한 진각을 밟고 그로 인해 생성된 힘을 단련된 거대한 근육으로 증폭하여 쏘아낸다.
리치의 차이까지 더해져 소녀는 닿지 못할 거리에서 휘둘러진 베기는.
쿠오오오오오-!!
꽈앙-!
갑자기 들려온 용울음 소리와 함께 상상도 못할 거력(巨力)에 튕겨나갔다.
'……?!'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인성과 달리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본능이 몸을 움직여 넘치는 힘은 해소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은 초식에 따라 역이용, 허리를 틀며 왼 다리를 차올리게 만들었다.
마치 트리거를 당긴 총에서 총알이 쏘아지듯 다리가 튀어나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정통으로 맞으면 여리여리한 소녀는 그대로 갈비뼈나 골반이 으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허나.
빠각-!
"……!!"
그 자리에서 소녀가 들어올려 내리친 발에 그의 굵은 다리 속 정강이뼈가 부러진 건 아닐까 싶은 격통이 뇌리에 몰아쳤다.
훅-!
그대로 다리를 내리누르는 힘에 남자의 거구가 앞으로 기울었다.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그것을 무위로 만드는 폭력적이고도 말도 안 되게 거대한 힘의 흐름이었다.
'이게, 무슨…….'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소녀의 뒤로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용의 형상이 보였다.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
그는 저도 모르게 그런 단어를 떠올렸고.
그의 다리를 그대로 디딤돌 삼아 가볍게 뛰어올라 사각턱을 찍어 버리는 성지인에 의해.
빠각!
정신줄을 놓게 되었다.
쿠당탕-!
정신을 잃은 거구가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지고 성지인이 그 옆에 가볍게 내려섰다.
"아……."
그리고 실수했다는 얼굴로 살짝 목소리를 흘렸다.
"사죄, 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 * * *
축제가 한창인 오후.
도진이 의자에 앉아 편한 자세로 태블릿을 보고 있다.
[천마신교의 후기지수 성지인 vs 금련문의 후기지수 대니얼]
태블릿에 띄워진 건 일간 하오문의 사이트다.
개중에서도 바로 몇 시간 전 일어난 일임에도 대번에 베스트에 올라간, 한창 난리가 난 사건이었다.
이름있는 문파와 하오문, 그리고 천마신교가 연관된 현재 복잡하면서도 민감한 무림 정세까지 건드린 사건.
그저 방관자의 입장에서 즐기면 되는 이들과 달리 도진은 그 사건의 핵심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스윽-
천마신교의 교주인 소천마는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