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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61화 (561/741)

560화

도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지만 듣는 이에게 새겨지곤 했다.

귀를 통하여 듣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머리에 새겨지는 듯 선명하게 인식된다.

허나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던 건, 앞서 도진이 보여준 것이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기에.

허공답보(虛空踏步).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고 걷는 행위다.

검기(劍氣)라는 신비의 유형화가 현실이 된 시대였으나 허공답보는 여전히 비현실의 영역에 있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소천마 김도진이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대문파의 지극히 경지가 높고 경험 많은 이들마저 잠시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멈추고 오직 김도진만이 색깔을 가지고 존재하는 듯한 찰나의 순간.

"무슨 행패를 부리는 거냐!"

그 단단한 찰나를 깬 것은 대문파의 제자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2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30대 중반인 금발의 남자다.

소맷자락에 수놓은 매화로 화산파 제자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그는 도진과 SNS로 설전을 벌였던 1대 제자 이즈마엘이었다.

도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치솟은 흙더미의 높이가 더 높았기에 내려다 보는 형국이었다.

이즈마엘은 그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얼굴을 찌푸렸다.

"행패라……. 뭐가 행패죠?"

"갑자기 무공을 써서 바닥을 부수고 무공을 과시한 게 행패가 아니면 뭐란 말이지?"

"아, 그렇네요."

도진이 너무 쉽게 인정을 하자 오히려 이즈마엘이 당황했다.

허나 도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기물을 파손했네요. 죄송합니다. 여기에 대해선 변상을 할 테니 천마신교로 청구해 주세요. 여기의 유치함에 전염이 되어서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도대체 뭐가 그리 유치하다는 말입니까, 김도진."

다른 방향에서 나온 목소리는 무당파의 것이었다.

청색 계통의 도복(道服) 디자인을 베이스로 한 무복(武服)을 걸친 그들의 표정 또한 그리 편치 않았다.

도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천마신교의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고 이렇게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버티고 서 있으니 유치하다는 단어가 딱 아닌가요?"

"……."

직구였다.

속된 말로 '노빠꾸'에 눈을 마주하고 있던 40대의 무당파 무인은 일순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반대편의 이즈마엘이 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불만이었으면 비켜달라고 말하면 될 것 아닌가!"

딴에는, 맞는 말을 잘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일부의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으니.

"비켜달라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비켜달라고 말하기 전엔 안 비켜 줄 생각이었다는 거네요?"

"……!!"

그것은 너무나 큰 실언이었다.

누군가가 입을 벌렸으나 도진이 더 빨랐다.

"우리 천마신교가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게 그리도 탐탁지 않은데 대놓고 말하기는 뭐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비켜달라고 말하게 하자, 이런 속셈이라는 거잖아요? 소위 명문정파라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이렇게 유치해서야."

"…말을 가려서 해라!!"

버럭 소리치며 나선 것은 청성파의 검수(劍手)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는 오십이 넘은 나이로 장로의 위치에 있었으니 무림에서도 상당한 고수로 인정받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주위에 묵직하게 퍼져 나가도록 만든 내공이 그것을 체감케 만들었다.

물론, 도진의 존재감에는 전혀 미칠 수 없었다.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 부끄러워하고 사과하는 건 도(道)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지적하는 이에게 화를 내고 실력을 앞세우려는 건 소인배의 모습입니다. 청성파는 도교의 발원지 중 하나일 텐데…… 그렇게 보이지가 않네요?"

"……!!"

청성파 장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단숨에 인내심이 증발했고 검이 뽑혀 나오려 했다.

"…소천마의 말씀이 틀린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허나 검자루를 잡은 그의 손을 억누르는 깊은 울림이 있었으니 가장 뒤에 자리하고 있던 소림사 승려의 목소리였다.

높은 경지임에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외모의 승려였다.

천천히 걸어 도진을 마주하는 곳에 선 그가 나서자 다른 이들이 한 발 물러났으니 소림사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이자 승려였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

"대, 대사님!"

주변에서 경악하여 소리쳤으나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실례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노승의 사과에 도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사과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이네요. 실제로 일을 벌였던 사람들 대신 방관을 택했던 소림사가 대표로 사과를 하시는군요."

도진은 이미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무당파와 청성파, 그리고 화산파가 주도하여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문파와 계단 주변을 막아 천마신교의 진입을 방해하려 했음을.

그리고 그것을 소림사가 방관했음을 말이다.

씁쓸함을 감춘 우정한의 눈과 도진의 눈이 일순 스친다.

"……."

지켜보던 이들의 기세가 술렁인다.

허물의 지적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법이었기에.

허나 소림사를 대표로 하여 노승이 나섰기에 소리를 내지 않았다.

노승은 우정한이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쓴맛을 감내하는 얼굴로 말했다.

"방관 또한 부끄러운 일에 대한 동참이 아니겠습니까."

"대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이쯤에서 용서해야겠군요."

사아아-

도진의 시선이 점점 낮아진다.

내공으로 굳히고 있던 흙더미가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 가라앉자, 도진은 걸음을 옮겨 뒤따르는 이들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단차 위에 있던 이들 중 다수가 끝까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도진을 노려본다.

같은 높이에 선 도진이 그 시선들을 마주하며.

두웅-!

"……!!"

"커헉!"

처음으로 기세를 일으키고선 선언했다.

"무인은 무로써 말하는 법이죠. 불편한 게 있다면, 말이 아닌 무공으로 해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오세요.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

무림대회 5일차.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이 진행된 날이었으나 세계는 개막식 전에 있었던 일로 뒤집어져 있었다.

-?소천마가 허공답보를 썼다고?

-구라 아님. 영상 있음. 보셈.

-?..???..?????;;;;;;

-이게 주작이 아니라고?

소천마가 허공답보를 썼다.

이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악되는 사건은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행사였기에 촬영이 허용되었고 그렇기에 부정할 수 없는 영상으로 남아 세상을 뒤흔들었다.

-뭔가, 뭔가 눈속임이나 특정한 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 눈속임 같은 거 아닐까?

-눈속임으로라도 허공답보를 쓸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존나 대단한 거 아니냐? ㅋㅋㅋ

-애초에 저기 대문파 고수들까지 입 딱 벌리고 보고만 있구만 ㅋㅋㅋ 저정도 고수들 속일 정도면 걍 허공답보라고 쳐도 될 듯.

-ㄹㅇㅋㅋㅋ

커뮤니티가 활활 타오르며 허공답보가 맞다 아니다로 싸운다.

이 경우 신뢰할 만한 공식 코멘트가 있으면 좀 잦아들 텐데 누구 한 명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으니 그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한 입장에 있는 이들 중 일부는 모처에 모여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일이 아주 많이 꼬였습니다."

무당파 장로의 말에 자리에 모인 이들이 침묵으로 불편하게 긍정했다.

그들은 몰래 모였으나 모두가 무형독에 감염된 이들은 아니었으니 '정치적으로' 천마신교가 불편한 이들의 모임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너무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천마신교가 너무나 불편하다.

그러니 견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같이 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일을 꾸몄다.

무언가 아주 거창하고 화려하게 진행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천마신교가 '아직은 대문파라 하기엔 손색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을 뿐이었다.

그 일환으로 벌인 일 중 하나가 성민혁과 성지인의 비무대회 예선참가였고 말이다.

그건 계산대로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의 통보에 천마신교는 별다른 의견을 내비치지 않고 수락했다.

대중 또한 적지 않은 수가 그들이 내세운 명분에 공감하여 처음이니까 예선부터 참가하는 게 맞다는 의견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오늘 개막식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눈치껏, 알아서 대문파가 아니면 단차 위로 오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마신교라면 분명히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맞먹으려 들 거라고 생각했고 어설프게 막을 명분도 없었다.

그러니까 생각한 것이다.

놈들이 스스로 '비켜달라'는 말을 하게 만들자고.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우열을 보여주고 인식하게 만드는 장면이지 않은가.

한데 그 일이, 정말로 상상도 못할 모욕으로 점철되고 말았다.

-ㅋㅋㅋ 진짜 개사이다 십사이다 샹사이다 ㅋㅋㅋㅋㅋ

-개꼰대 새끼들 허공답보보고 어버버거렸쥬? 상상도 못했쥬? ㅋㅋㅋ

-천마펀치! 천마펀치! 천마펀치!!

보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오르게 만드는 조롱들이 온갖 커뮤니티에 넘쳐나고 있었다.

본래 그런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시선이 많은 자리에서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받아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앞서의 예선 참가 통보를 받아들였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일단 다 떠나서.

침착하고 신중하게 임기응변으로 대응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래, 맞다.

솔직히 허공답보 때문에 너무 놀라 제대로 대응을 하질 못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떻게 무례했다는 프레임을 씌우고는 있지만 그나마도 잘 먹혀들지 않고 오히려 김도진이 너무나 시원하게 사이다를 터뜨려줬다면서 지지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요즘 시대의 분위기가 그랬다.

하다못해 명분이라도 좀 챙겼으면 나았을 텐데.

"…거 제자 관리를 좀 하지 그러셨습니까."

"크흠……."

누군가의 핀잔에 화산파의 장로가 불편하게 시선을 돌린다.

불같은 성격의 화산파 장로가 지적에 아무 말도 못할 정도로 화산파 1대 제자의 말실수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말실수가 나오기 전에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놈의 허공답보 때문에.

더 환장하겠는 건 그게 진짜 허공답보가 맞는지 아닌지도 아직 판단이 안 된다.

"…어렵군요."

"예."

어떻게 보면 어린 놈이 앞뒤 모르고 날뛰는 것 같지만 곰곰이 짚어보면 또 아니다.

철저하게 명분을 챙겼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 줄 알았다.

선을 넘어도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넘었고 다른 한 발은 딱 중심을 잡고 있으니 완전히 선을 넘지도 않는다.

소림사의 고승이 사과했을 때 한 발 더 나아갔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은 것부터가 절묘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몰리면 무공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

다 아는 방법을 눈치를 보면서도 꺼내는 이 하나 없었으니 의천검가주를 무참히 패퇴시킨 김도진을 상대로 그 카드를 꺼내는 것도 리스크가 너무 크다.

애초에 경계를 넘어선 고수끼리의 싸움은 무림에서 이를테면 핵전쟁과 같으니 쉽게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이길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고.

때문에 '불만 있으면 싸우자'는 도진의 말이 더욱 얄밉지만 잃을 게 많은 그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고 천마신교는 공식적인 선언이 없었을 뿐 이번 일로 사실상 대문파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봐야 했다.

-크으으.. 여윽시 천마신교다. 정파들 우글거리는데 전혀 밀리지 않쥬?

-천마 홀로 정파를 굽어보는 구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꼬우면 덤비라는데 아무도 못 덤빔ㅋㅋㅋㅋ

이런 말들이 나오는 처참한 상황이다.

그들에 암묵적으로 동조하였던 다른 문파들도 다수가 손절하고 거리를 두는 스탠스를 취했다.

"이렇게 된 거……."

"예. 계획대로 갑시다."

결국.

그들은 미리 준비해뒀던, 무력 충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천마신교의 이미지를 흠집내기 위한 계획을 예정대로 실행하기로 했다.

"놈. 까다로운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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