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59화 (559/741)

558화

첫 접근은 성지인을 통해서였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있던 편의점에 들른 성지인은 계산을 위해 카운터에 섰고.

"하오문에서 천마신교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것을 전해 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아르바이트생에게서 길게 뽑힌 영수증을 받게 되었다.

조금 혼란스러웠으나 성지인은 격룡신공의 구결에 따라 격룡기를 운용하며 심신을 안정시키고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영수증을 총괄부에 넘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한 오성아와 한유아에 의해 회의가 열렸다.

"…하오문이 우리와 손을 잡고 싶다는 내용이에요."

그리 말하며 나지윤이 커다란 모니터에 하오문에서 보낸 전언을 띄웠다.

영수증에 숨겨져 있던 코드를 통하여 접속한 곳에서 볼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하오문(下汚門).

그 이름대로 '낮은 곳에 모인 더러운 이들의 집단'이다.

으레 유명한 문파들이 그렇듯 하오문도 자신들이 적통이라 주장하는 집단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들이 뭉친 단 하나의 집단이 하오문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다.

숭무고 축제 때 치킨을 팔고 '일간 하오문'을 운용하는 바로 그곳이 맞다.

일반적으로 사회와 무림에서 인정을 받은 이들이 이름을 남긴 고대 문파의 후예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하오문은 거기서 예외였으니 바로 그 '적통'이니 '전통'이니를 운운할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분 이전에 그냥 가장 세력이 큰 집단이 하오문이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하오문이 정말로 그저 가장 낮은 곳의 더러운 집단 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으니 세력만큼은 '구파일방'이 아닌 '구파일문'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컸다.

현대에서 여러 문파가 나입네 아니네 고대 무림 문파의 정통성을 이었다 주장하며 싸우고 있지만 유일하게 완전히 배제된 '네임드'가 있으니 개방(丐幫)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현대에서는 '거지'들이 모여 '정보'가 중심인 개방으로서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거지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정보를 모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명문 정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도 없다.

무공이라도 전해졌으면 거지 행세를 마다하지 않을 이가 적지 않았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무공도 발견되지 않았다.

허나 마찬가지로 무공이 발견되지 않은 하오문은 오히려 이 시대이기에 성업할 수 있었다.

웨이터부터 시작하여 정말 깊게는 마약상까지.

은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밑바닥 인생'은 수없이 많았고 음지의 일은 큰돈을 만질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이 험한 무림에서, 그것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목숨과 돈을 지키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뭉쳤으니 현대판 하오문이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여전히 낮은 곳의 더러운 문파였으나 그 정보력과 자금력, 인맥이 명문 정파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구파일문'이란 단어도 농담이 아니게 됐다.

바로 그 하오문이 천마신교에 접근하였으니 중요 안건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흐음……."

그 의도를 찾으려는 듯 간결한 내용뿐인 모니터에 오성아와 한유아, 나지윤까지 시선을 둔다.

[이야기라도 나눌 기회를 주신다면 진심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간단한 내용이니 그 문장 자체보다는 문장에 포함된 의미를 찾는 시선이다.

"만나보죠."

결론은 도진의 말로 인해 간단히 나왔다.

교주의 결정에 세이전과 총괄부는 계획을 세우고 하오문과 컨택, 도진이 숭무지부주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숭무지부는 말 그대로 숭무동의 지부이고 이곳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부인만큼 지부의 장 또한 하오문의 핵심에 접근한 이였다.

바로 그런 이가 직접 나오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니 제법 진심을 보인 것이었다.

장소는 하오문의 영역인 고급 유흥가 실크 로드에서도 최고급의 요정.

그리고 도진은 그 요정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서 나타나더니.

"반갑습니다. 숭무지부주."

대번에 마주한 여성이 숭무지부주라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그저 고급스럽다.

설령 문외한인 이가 보아도 무언가 격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는 최고급 주문 제작품인 한복.

허나 그 한복마저 빛을 잃게 만드는 고귀함과 기품이 어린 여성이다.

분명히 표정 관리에 능할 그녀는 그러나 눈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말았는데, 도진이 대번에 그녀를 숭무지부주라 확정하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는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자리에 앉아 홀로 도진을 맞이했다지만 다른 곳도 아닌 숭무지부의 부주를 맡기엔 모자라 보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도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꼬지 않았을까하는 고민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 눈을 통하여 숭무지부주는 마치 자신의 속내까지 낱낱이 꿰뚫리는 듯한 감각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과연……. 감히 소천마를 의심하였는데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진은 웃는 얼굴로 아뇨, 라고 답했다.

"서로 신중할 수밖에 없는 첫 만남이니까요. 이해합니다."

신안(神眼)은 그녀가 경지를 꽁꽁 감추고 있다는 걸 꿰뚫어 보았다.

도진의 신안에 무공을 '감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경지는 초절정 이상이라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장호를 통하여 배운 '사람 보는 법'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통하여 보이는 심상의 깊이가 숭무지부주임을 확신하게 했다.

"술을 즐기지 않으신다고 들어 음료로 준비하였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음료라고 하지만 콜라 등의 탄산 음료가 아닌 고급 차 등이 진수성찬과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지 않고 왔기에 도진은 마다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독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식사하는 도진의 모습에 먼저 수저를 들려던 숭무지부주가 오히려 늦게 식사를 시작하게 됐으니 벌써부터 말리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어느새 아무도 없게 된 자리에서 조용히 식사가 이어졌다.

도진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여성과 남성들이 물러가고 정말로 숭무지부주 한 명만이 도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침묵이 내린 가운데 식사가 적당히 끝나고 도진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차인지 모르겠지만 단맛이 돌면서도 풍미가 깊은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마인드 컨트롤로 다시 심신을 무장한 숭무지부주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전서린이라고 합니다. 이곳, 하오문의 숭무지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천마신교의 소천마, 김도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정중히 모신 것은 이번 무림대회에서, 저희 하오문이 정식으로 문파로 인정받는 데에 도움을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정식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요."

"예."

"하오문은 뒷세계에,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 적지 않을 텐데요. 굳이 정식 문파로 인정 받으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하오문의 구성원이 구성원인 만큼, 하오문은 양지보다는 음지에 더 많은 것들을 두고 있었다.

양지로 가는 선택인 정식 문파로 인정받으려 한다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도진의 물음에 전서린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하오문은 힘없는 이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뭉친 집단입니다."

천대받는 일을, 법에 도움을 받기 힘든 일을, 혹은 아예 법을 어기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 뭉쳤고 돈으로 산 무공을 익혀 '하오문'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그렇게 알려진 문파다.

"이 실크 로드의 색은…… 붉은색입니다."

그리 말하며 자신이 입은 한복의 붉은 소맷자락을 전서린이 쥔다.

"이 비단길을 한 땀 한 땀 자아내기 위하여 저희는 많은 돈을 썼고 그 이상으로 많은 모욕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스며든 것들로 인해 완성된 비단길은 붉은색이라고.

전서린은 담담한 척 했지만 안에 담긴 감정이 흔들거린다.

도진은 그 감정을 드러내게 만드는 과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뇌물조차 당당하게 건네지 못했을 것이다.

권력을 차지하는 건 대부분 더러운 놈들이며 그 더러운 놈들 중 더 더러운 놈이 더 높은 곳을 차지한다.

하오문은 이곳 실크 로드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그들에게 돈을 바쳤을 것이고 그러고도, 말로 하기 힘든 일들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건가요?"

도진은 담담히 물었다.

담담하지만 시험하는 시선이었다.

그 처지에 동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오문이 단순히 '피해자'가 될 수는 없었으니 그들의 활동에는 분명히 해서는 안 될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전서린은 그 의도를 읽어내고서 예, 라고 답했다.

"저희는 필요악이 되겠습니다."

필요악(必要惡). 악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존재.

"감히 판단하자면, 소천마께서는 선(善)을 추구하고 계십니다."

과연. 전서린은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착각하기 쉽지만 천마신교는 덮어놓고 약자(弱者)의 편을 들지 않는다.

천마신교가 그 힘을 행사하는 건 약자가 아닌 선한 자를 위해서다.

권선징악(勸善懲惡).

무관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천마신교에게 있어서, 하오문에 대한 시선은 철저하게 회색이었다.

"저희가 정식 문파가 된다 해도 음지의 일에서 손을 떼지 않겠습니다."

"그들을 통솔하여 선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불합리한 일이 있다면 나서서 시정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음지는 청소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더러운 것들이 흘러들어 고인다.

청소해봐야 금세 다시 더러워지며 그곳을 지켜보고 있으면 다른 곳이 더러워진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느 정도 더러움을 인정하되 그것이 더 심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낫다.

세상은 그것을 뭉뚱그려 필요악이라 한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대답. 그러나 전서린은 안심할 수 없었으니 도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잔잔한 그대로였던 것이다.

"지금 바로 결정을 내려달라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시간을 두고, 저희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굳이 우리 천마신교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담담하지만 깊은 곳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천마신교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전서린은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소천마께서 보여주시고 천마신교가 내걸은 기치가 저희가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약자가 선한 자가 아니라는 건 저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문이 하오문인 이상 그것을 완벽하게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바뀌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나아질 수 있으리라 저희는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도록, 이번 무림대회에서 소천마께서 저희에게 힘을 보태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 * * *

자리가 파하고 도진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천마신교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나지윤과 오성아, 한유아가 모였다.

나지윤이 물었다.

"어땠어?"

도진이 옅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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