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화산파는 프랑스 파리의 뷔뜨-쇼몽구에 근거지를 둔 문파다.
-…오래 살다 보니 별것을 다 보는구나. 살아 있는 건 아니지만.
…고대 무림에 살았던 이들이 듣는다면 이게 뭔 개소린가 싶은, 위지혁과 같은 반응을 보일 소리지만 그것은 농담이 아닌 사실이었다.
화산파(華山派)는 본래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으로 꼽히는 영산인 화산(華山)의 서쪽 연화봉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게 '정설(定說)'이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고대 무림의 이야기이고 현대에서는 달랐으니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자리잡고 있는 화산파가 그 정통을 이은 대문파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근거는 하나다.
과거 혼란했던 시기 중국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사업가이자 여행가가 몇 개의 고서적을 구매했는데 그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포함한 화산파의 무공과 역사들이 기록된 고서였던 거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엔 그런 식으로 고대 무림의 언어로 쓰인 무공 서적이 골동품 취급을 받으며 거래된 일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 무려 화산파의 무공이 그렇게 프랑스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법 세월이 지나.
'파란눈에 금발 코쟁이'가 화산파의 적통을 선언하며 문주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몇 마디로는 압축되지 않을 만큼의 혼란과 충돌이 있었지만 그 비급을 내놓으라고 할 명분이나 자격을 갖춘 이는 있을 수가 없었고 중국과 프랑스의 정부까지 나선 탓에 전쟁으로 번질 뻔 했으나 가까스로 봉합이 되었다.
그런 난리통 속에서 역설적으로 프랑스의 화산파가 사람들에게 정통(正統)으로 인정받아 지금에 이른 것이다.
…배경이 그랬기에, 이 일은 제법 웃긴 일이었다.
-아니 ㅋㅋ 화산파가 천마신교를 사기꾼으로 모는 건 좀..ㅋㅋ
-그러게 ㅋㅋㅋ 따지고 보면 화산파도 그 부분에서 자유롭진 않을 텐데 ㅋㅋㅋ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사실 화산파의 적통과 정통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서적을 사서 무공을 익혔을 뿐인데 그걸로 화산파의 적통이자 정통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도진과 세이전주 나지윤, 그리고 총괄부의 오성아와 한유아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화산파가 1대 제자를 내세워 천마신교를 도발했다는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천마신교랑 얽히면서 또 한 번 자신들이 적통이라는 걸 인식시키고 싶은 거죠."
나지윤의 말에 오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걔들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손해가 아닐 테니까."
진위 여부를 가리는 논쟁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 서게 될 화산파는 그렇기에 대중들에게 무의식의 단계에서 '정통'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거다.
그런 화산파는 무림에서는 이미 인정을 받고 있지만, 반대로 천마신교는 아직 무림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도진의 '신위(神威)'에 의해 대중에 각인된 이름인 것이다.
도진은 경계를 넘어선 고수였던 의천검가의 가주 이청범의 검기가 서린 검을 압도적인 힘으로 꺾었다.
그뿐인가.
의천검가의 무인들이 달려드는 것을 손조차 쓰지 않고 무릎 꿇리며 '천마군림보'로 나아가 그 현판을 가루로 만들기까지 했다.
바로 그런 압도적인 모습과 천마군림보가 사람들이 도진을 천마(天魔)로 부르고 인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천마로 인정받은 도진이 천마신교의 부활을 선포하였으니 잠룡문은 천마신교가 되었다.
하지만 무림의 시선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단일 세력으로 무림 전체를 상대할 수 있는 압도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박혀 있는 게 천마신교다.
다 떠나서 그렇게 쉽게, 순순히 신생 문파를 '천마신교'라 인정해 주어 상상도 못할 이득을 안기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줄어드는 영향력은 곧 파이, 적나라하게 말해 밥그릇이 줄어드는 손해를 가져올 것이니 화산파만이 아니라 이번에 참여하는 대문파들 전부가 천마신교를 견제할 거라 생각하고 대비해야만 했다.
"그래서야!"
오성아가 탕, 책상을 치며 힘주어 선언했다.
"우리는 이번 무림대회에서 제대로 우리가 어떤 곳인지 보여줘야 한다는 거지."
"그렇네요."
도진이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번 무림대회는 한 마디로 천마신교가 무림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무대인 것이다.
이 무대엔 천마신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주판을 튕기고 있는 기득권이 즐비하니 팬 대신 경쟁자들만 주위에 가득하다.
씨익-
그래서, 도진을 따라 모두가 웃었다.
"나, 이런 거 좋아해."
"사실 저도 그래요, 언니."
오성아와 한유아는 물론이요 나지윤 또한 그 멋진 얼굴에 호승심을 드러낸다.
싸움은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승리를 자신하는 힘이 있고 그것을 발휘하고픈 때에 시비를 걸어주는 건, 오히려 재미있는 일이었다.
"오케이. 그러면 SNS에 글 올릴게요."
"응!"
곧 도진의 SNS에 짧은 글이 업로드되었다.
[화산파(화산없음)]
* * * *
-ㅋㅋㅋㅋㅋㅋ 화산없는 화산파 ㅋㅋㅋ
-야 화산에 화산이 없으면 뭐냐
-그냥 '파' 아님?
-파 ㅋㅋㅋㅋㅋ 씹ㅋㅋㅋㅋ
-누가 이 사진에 칼 대신 파 좀 합성해 줘라.
도진의 영향력은 한국에서는 가히 압도적이었고 당연히 짧은 문장은 큰 반응을 일으켰다.
그 결과 중 하나가 화산파가 내세운 공식적인 사진, 화산의 무복을 입고 검을 휘두르는 사진에서 검 대신 파를 합성한 것이었다.
-? 파?
-한국어에서 group이나 faction의 뜻을 가진 단어가 'Pa'인데 이 Pa가 한국에서는 Welsh onion이랑 같은 발음이야.
-LOL
-하긴 프랑스에는 화산이 없지 LOL
-wwww 알고보니 화산파가 보컬로이드였던 wwwww
-비기! 파돌리기!
한국인들은 그 결과를 자랑하기 위해 외국에 업로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일간 하오문에도 게재되었으니 되로 주로 말로 받는 결과가 나왔다.
[십만대산이 아닌 한국의 동산에 자리잡은 사기꾼에게 동요할 이유가 없다.]
화산파는 나름 반격을 하긴 했지만 의미가 없었다.
[정보. 화산파는 화산이 집이지만 천마신교의 집은 십만대산이 아닙니다. 여러분, 무협지와 현실은 다릅니다.]
딜 교환에서 프랑스 파리의 뷔뜨-쇼몽구에 있는 화산파는 계속 손해를 보았고 이내 '두고 보자'라는 의미가 담긴 한 마디를 끝으로 설전을 포기했다.
천마신교와 화산파 사이의 전초전은 그렇게 3일만에 끝이 났고 도진은 그러는 동안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두웅-!
세계와 세계가 부딪친다.
심상(心象)이 깃든 세계는 그렇기에 의지를 가지고 길항하며 그 근원에는 위지혁과 도진이 있다.
천마군림(天魔君臨).
위지혁이 새로이 정립한 천마신공의 첫 걸음이자 정수.
도진은 어느새 그 천마군림의 대결에서 자신의 영역을 오롯이 지킬 만큼 성장해 있었다.
…비록 그 영역이 자신의 주변이 전부인 수준이라 해도 말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초식이라기보단 차라리 현상이자 이치.
사람이 제아무리 칼을 휘적여봐야 무너지는 하늘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지만 도진은 그것을 해냈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자신의 머리 위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였으니 위지혁의 '파천(破天)'은 도진을 집어삼키지 못했다.
'허허…….'
겉으로는 무뚝뚝한 얼굴로 세상을 쪼개는 공세를 이어가는 위지혁이었으나 속으로는 흐뭇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놀랍다.
신공(神功)의 영역에 발을 들인 이들 중 소수는 거기서 한 번 우뚝 멈춰서고 만다.
너무 낯설어서.
너무 넓어서.
현실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 보게 된 것들이 너무 낯설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거대하기 때문이다.
위지혁은 그런 세계를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딛은 제자에게 쏟아 부었다.
믿고 있었으니까.
나의 제자는 멈춰설 리가 없었고 거기에 짓눌릴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제자는 훌륭히 그 믿음에 보답해 주었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짓눌리고 부서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다.
유지은과 같은 천재가 아니기에 감당하지 못해 짓눌렸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몇 번이 되었든.
그리고 나아가려 한다. 두 눈을 뜨고 자신을 짓누르는 것이 무엇인지 정면에서 마주한다.
이번에는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더라도.
몇 번이고 거듭하여 이내 그 한 걸음을 내딛어 더 나아가고 만다.
'그래, 그것이다.'
천재는.
세상이 칭송하는 천재는 이미 무수히 보아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늘 너머의 길을 계속 나아갈 수 없다.
위지혁이 원했던 것은, 그리고 장호가 눈을 빛내게 만든 것은 이렇게 꺾이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자 했던 심지다.
'기대가 되는구나.'
무림대회란 것에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들 거라고 했다.
개중에는 경계를 넘어선 이 또한, 몇이나 올 거라고 들었다.
문득 떠올리는 건 정사마(正邪魔) 모두가 모였던 자리다.
그때 위지혁은, 누구보다 높은 곳에 서 있었으나 공허했다.
친우였던 무림맹주 혁련휘 등과 달리 '내 뒤를 이을 제자다'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후계자가 없었기에.
당시엔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솔직히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면 내심 허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였다.
비록 지금 육체없이 영혼만이 남았지만, 그래도.
이 현대에 부활한 무림의 무인들이 수없이 모인 자리에서 기적처럼 만난 자신의 제자가 얼마나 당당하게 소천마로서 자신을 드러낼 것인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
무림대회가 3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서울의 무림맹 한국지부는 세계 무림맹의 지원과 각국 기업의 후원까지 모두 활용하여 무림대회가 열릴 장소를 섭외했고 숙소들과 계약까지 마쳤다.
중소문파 일부는 이미 도착하여 비슷한 입장의 문파들 중 도움이 될 만한 곳을 가려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런 때에, 도진은 조용히 고급 유흥가를 걷고 있었으니 '실크 로드'였다.
어중이떠중이는 받지 않으며 소란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
온갖 전자 기기에 대한 대책까지 완비하고 있기에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이 선호하는 바로 이곳에 도진이 찾아온 것이다.
완숙에 이른 사신(死神)의 무공은 타인이 도진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고 일절 시선을 받지 않으며 도진은 자연스럽게 어느 고급 요정 안에 들어섰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양식을 섞어놓은 듯한 묘한 외관의 건물 내부를 도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걸었고 이내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물 앞에 서서야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양복 남성이 도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미미하게나마 놀람이 얼굴에 드러나고 마니 정말로 이렇게 아무런 기척없이, 그것도 정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수련과 마인드 컨트롤, 여기에 미리 언질을 듣지 못했다면 분명히 더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을 거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두 남성이 장지문을 열었고 도진이 디딤돌을 지나 안에 들어섰다.
또 한 번 앞을 막은 장지문을 이번엔 한복을 차려입은 두 여성이 양쪽에서 열었고.
"어서 오십시오, 소천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수성찬 너머 고귀함마저 느껴지는 한복 차림의 여성이 도진을 맞이했다.
소리없이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깊이 고개 숙인 여성과 도진만이 남았다.
도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숭무지부주."
"……!!"
고개 숙인 여성의 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