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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56화 (556/741)

555화

도진의 집무실은 천마전의 중층에 위치하고 있다.

중층은 총괄부와 독마전, 투마전은 물론이요 세이전 등 천마신교의 여러 부서가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는 곳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곳이다.

도진은 그런 중층에 마련된 수많은 엘리베이터 중 하나를 타고 지상으로 향했으니 바로 근처에 자리한 연무장에 가는 것이었다.

실외와 실내를 아우르는, 조금 과장을 보태면 올림픽 경기장 못지 않은 연무장이다.

천마전에는 일절 연무장이 마련돼 있지 않다.

이는 천마전이 특이한 게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인 형태로, 초급자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연무장은 따로 지어졌으니 안전 문제 때문이었다.

간단한 이야기로 흔히 발경을 구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진각만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온다.

경지에 이른 무림인의 진각은 엄청난 충격을 가한다.

그것을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수십 수백 번 단련을 위해 구사하면 건물에 가해지는 충격이 얼마나 되겠는가.

진각에서 시작하여 증폭된 무공이 가하는 충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가해지는 충격과 쌓이는 스트레스는 이윽고 건물을 무너뜨린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연무장은 아예 따로 지어지는 것이다.

자재 또한 특별하니 충격을 흡수하여 퍼뜨림으로써 구조물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손상이 가해진 부위가 서로 맞물려 어느 정도 스스로 회복되는 지극히 특수한 소재가 사용된다.

그러고서도 주기적인 점검과 교체가 이루어져야 하니 번듯한 연무장이 돈 먹는 하마로 불리며 문파의 재정 담당 탈모에 기여하는 이유다.

뭐, 해당 사항이 없는 천마신교의 연무장은 당연히 개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좋은 소재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야심한 시각이지만 천마전 주위에는 수많은 교도들이 깨어 있다.

당직과 순찰의 임무를 맡은 무인들이다.

수고에 감사하는 말에 감동하여 의욕을 발산하는 교도들을 뒤로하고 도진은 천마전을 나와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그리고 잘 조성된 정원 사이로 난 길의 중간에서 잠시 멈추어 말하는 것이다.

"선배. 착한 아이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몰래 찾아오면 안 됩니다."

새벽이 내린 고요한 정원에서 갑자기 혼자 말하는 듯한 모습이다.

허나 그 말에 반응하여 인기척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새벽의 옅은 빛에도 그 보검과 같은 자태가 전혀 감춰지지 않는 유지은으로 인해 그것은 혼잣말이 되지 않았다.

"헤헤."

유지은은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몰래 따라붙었다.

만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이렇게 몰래 따라가면서 진행되는 스토리는 흔한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도진을 대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련하러 가는 거지?"

"네. 같이 가실래요?"

"응."

모습을 드러낸 유지은과 함께 도진은 연무장 안에 들어섰다.

평소의 일과대로라면 굳이 연무장을 찾을 것 없이 자신의 개인 공간에서 연신극기공을 수련하고 잠들었을 것이다.

연신극기공은 굳이 넓은 공간에서 거창하게 움직일 것 없이, 평소의 움직임만으로도 도진의 육체마저 한계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단련공이자 신공(神功)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연무장을 찾은 건 그 자신의 수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여간, 후배는 너어무 눈치가 좋아."

"선배가 그렇게 열렬히 시선을 보내는데 모른 척 할 수 없잖아요."

'가출'까지 할 정도로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유지은을 위해서였다.

"대련할까요?"

"응!"

무언가 더 말하려 했던 유지은은 도진의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자신의 검을 뽑았다.

도진 또한 백설을 뽑았으니 진검 대련이 되었지만 문제는 전혀 없다.

도진과 유지은의 경지가 경지였으니 말이다.

파앗-!

선공은 유지은이었다.

정직한, 올곧은 쇄도.

'정의(正義)'라는 단어에 걸맞는 그 동작은 그러나 그렇기에 움직임이 뻔히 읽히고 만다.

물론, 거기에 그치는 수준이었다면 정의검가는 대한민국의 명문 검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쇄도와 함께 뻗어나오는 유지은의 검.

한일자의 궤적을 그리는 그 검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힘이 담겨 있다.

올곧기에 단단하며 무엇에도 막히지 않을 기세.

일견 평범하고 단순한 가로베기에 천재들의 무수한 세월이 쌓여 깃든 이치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압도적인 속도와 힘은 일차적으로 맞설 자격이 되지 못하는 이를 단번에 패퇴시킨다.

그리고 그 속도와 힘에 따라올 수 있는 이에게는, 거기에 담긴 이치가 상대를 압도하기 위하여 파도처럼 덮쳐든다.

도진은 그 파도를.

슷-

정면에서 맞서는 대신 부드럽게 흘려냈다.

백설이 분명히 맞닿았음에도 유지은의 검은 그 힘을 폭발시키거나 이치에 따라 도진을 휩쓸지 못하고 물이 자연스레 흐르듯 그렇게 흘려진 것이다.

'아.'

단 한 수였지만 격차를 인식하기엔 차고 넘치는 일이었다.

무엇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말이다.

물론 유지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도진을 기준으로 하여 우측으로 힘과 중심이 무너질 위기.

그 위기를 자연스럽게 초식을 슬쩍 비틀어 변초(變招)로 극복하며 공격으로 방어를 대신하였다.

파파팟-!

도진이 유지은의 공세를 연신 비틀어 어그러뜨린다.

평범한 이라면 단 한 수에 스스로 균형을 잃고 빈틈을 드러내며 무너졌을 텐데 유지은은 대번에 균형을 되찾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흔들림을 수정하면서 공세를 이어나가니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재능의 화신이로구나.

유지은은 초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구사한다.

어설프게 알거나 단순히 반복 숙달하여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구사한다.

더 나아가, 변수를 발생시켜 조금 어긋나게 만들어도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즉시 변수를 수정하고 응용하여 최선의 형태로 바로잡으니 그 밀도가 차원이 다르다.

똑같이 단순한 한 마디라 해도 누가 그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담기는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유지은의 한 수 한 수는 설령 그것이 기초적인 것이라 해도 차원이 다른 위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잊혀진 고대 무림 시절의 무공을 이은 정의검가.

그렇기에 정의검가의 무공에는 무수한 천재들의 세월이 녹아들어 있는데 유지은의 재능은 그렇게 녹아든 '세월'마저 모두 이해하고 구사한다.

…정의검가 사람들에게 있어 유지은이 절망 그 자체였던 것을 절실히 이해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의 유지은은, 심지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완벽한 이해에 그치지 않는다.

카앙-!

처음으로 검과 검이 부딪치며 폭음이 터졌으니 유지은의 검이 도진의 검에 밀리지 않고 본래의 '올곧음'을 관철한 것이다.

그것은 유지은이 단순한 이해를 넘어, 그 너머에 있는 이치에 대해 궁구한 결과다.

카아앙-!

유지은의 세계는 흑백이었다.

다 알기에, 미지라는 이름의 색채가 없었다.

그러니까 궁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도진을 만나면서 유지은은 달라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생겼고 그것은 결핍을 만들었으니 색채가 되어 유지은이 궁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보통은 시간이 지나며 간극이 메꿔질 것을 확신할 수 있는데 도진을 대상으로는 그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가볍게 휘둘러지는 듯한 도진의 검을 유지은의 검이 감당해내지 못하고 이대로는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궁구가 나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으며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 유지은을 달리게 한다.

재능의 화신이 진심을 다하여 뻗어내는 검이 도진의 검에 끈질기게 따라붙어 이윽고 회심의 한 수를 내뻗고.

카아앙-!

도진이 쏘아낸 검에 막혀 정지했다.

일반적으로는, 유지은이 대련 상대에게 선사하는 경험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웃으며 도진이 말했다.

유지은의 급소에 도진의 백설이 닿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유지은 정도 되면 승부가 났다는 걸 읽을 수 있으니 중간에 서로의 검이 교차한 지금 한 번의 비무를 끝맺을 수 있었다.

어느새 땀으로 샤워를 한 듯한 유지은이다.

까만 머리카락이 새하얀 얼굴에 들러붙었고 펑퍼짐했던 수련복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낼 만큼 젖었다.

그리고 유지은이 불만스런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수고하셨습니다아."

불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향상심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상대가 도진이기에 보여주는, 볼 수 있는 얼굴이다.

"도대체 어떻게 수련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유지은이 검을 내리고선 접근하더니 도진의 드러난 팔뚝을 슥슥, 자신의 손으로 더듬는다.

패배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개중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게 순수한 근력이었다.

유지은 정도 되면 근력의 문제를 거의 겪지 않는다.

그리고 도진은, 그런 유지은에게 남녀를 떠나 아예 인간으로서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 근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선사해 버렸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완벽한 진리는 아니니 부드러움 또한 굳건한 뿌리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매일매일 열심히, 죠."

"어우. 그놈의 노오오오오력."

"하하하."

"뭐, 그래도."

유지은의 도진의 팔뚝을 더듬는 손길에 더 감정이 담긴다.

"이 근육은 좋네. 단단한 거 봐."

"…웬 주책이십니까, 선배."

"왜애. 좋은 걸 좋다고 하는데."

도진이 팔뚝을 떼자 유지은은 벌러덩, 차갑지만 그래서 열기를 식히기 좋은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길지 않은 대련이었지만 무려 도진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검을 휘둘렀으니 체력 소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게 누운 채 유지은이 말했다.

"후배."

"네, 선배."

"나, 이거 할 수 있게 됐어."

유지은이 누운 채 검을 위로 들었다. 그 검에서.

파아앗-!

신비가 유형화되어 빛이 어렸으니 검기가 피어났다.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었으나 그것을 보여주는 유지은도, 보고 있는 도진도 잔잔한 분위기다.

"벌써 그렇게 되셨어요?"

"응."

경계를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를 넘기 전, 모자란 간극을 유지은이 재능으로 메워 검기로써 성립시킨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우 부족한 부분을 수많은 천재들의 이치가 깃든 뛰어난 무공으로 메꾼다는 걸 생각해 보면 또 한 번 그것을 대신하여 검기를 성립시켜 버린 유지은의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후배가 보여줬으니까. 그걸 따라가다 보니 이렇게 됐어."

일전 유행병 사태 때 유지은은 도진의 부탁으로 일부러 그것에 감염되었고 치료하기 위해 '심상의 합일'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그 심상의 합일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유지은의 재능과 맞물려 또 한 번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장을 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출은, 그래서였다.

"집에 있으면…… 안 좋을 거 같아서."

도진을 만나 변화한 유지은은 일가의 구성원으로 정의검가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모든 것이 이해될 수는 없었다.

사람이니까.

곁에서 유지은의 질투조차 하지 못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꺾여 버릴 듯한 발전 앞에서 상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아이들이 보는 동화와는 다르니까. 현실이니까.

어느 순간 유지은이 '화경에 올랐어요'라고 하는 건 차라리 괜찮다.

'다른 세상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허나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내 주변의 일'로 피부에 와닿는다.

유지은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범하게 무리 속에 함께 하지 못할 만큼의 재능을 타고났기에 감당해야 할 일.

그래서 도진의 전생에서 그녀는 시리디 시린 고독에 뒤덮인 '냉검후(冷劍后)'로 살았다.

물론, 이번 생에서는 그 차가운 고독이 그녀를 뒤덮는 일은 없다.

"어쩌면 너, 추월할지도 모르겠네."

도발하듯 입에 담는 건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는 말.

그녀의 바람에 도진은 씨익 웃었다.

"귀여우시네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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