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52화 (552/741)

551화

예상치 못했던 도진의 발언에 사람들의 몸이 굳는다.

실례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니, 무슨 뜻인지 당장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퍼진 동요를 도진의 무게가 담긴 말이 진정시킨다.

"무형독은 진법 내부의 일이 기록되는 경우를 상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대로였다.

진법의 작용으로 인해 전자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뒤집히지 않을 전제였으니까.

아직 이 세상은 '기(氣)'에 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이를테면 양자역학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존재는 알게 됐지만 그걸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애초에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단순히 아는 걸로는 안 되는, '깨달음'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과학자가 아닌 도인(道人)의 궁구가 필요한 일이었고 도인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하나의 영역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평생을 바쳐야 하는데 그 두 가지를 양립할 수는 없었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기가 연구되는 분야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지은 선배 정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유지은은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다.

그 외에 설령 양립하는 이가 있다 해도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깨달음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

개인의 깨달음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논문으로 치환하는 데서 그들은 또 절망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조차 진법의 영향에서 전자 기기를 보호하는 기술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무형독이 자신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입니다."

"……음."

몇 명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 자리에 책임을 지고 나올 정도의 인재들이었기에 도진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벌써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깨닫지 못한 빌리 플로이드를 포함한 일부를 위하여 도진이 설명했다.

"이 동영상은, 동영상을 찍을 수 있다는 건 무형독에게 있어 지극히 위험한 정보라는 소립니다."

"아……!"

상식인이 믿을 수 없는 '사술(邪術)'을 사용했으나 그것이 퍼지는 걸 바라지 않았음을 진법의 특성으로 읽을 수 있었다.

한데 그걸 도진은 찍었고 찍을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걸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알게 되었다.

도진의 눈이 다시 한 번 자리에 모인 이들을 한 번씩, 정확하게 마주한다.

"저는 여러분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하여 이 동영상과 정보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속은 모르는 것이니까요."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무형독에 넘어간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는 말.

그러나 화를 내는 이는 없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례를 이미 너무 많이 보았으니까.

제 3세계의 왕가는 물론이요 프랑스의 귀족, 대기업의 총수마저도 무형독과 연관되어 있는 사례가 바할라 사건 이후 쏟아지면서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고 심장을 멈추게 만드는 독을 뒤늦게 자각한다면 이럴까 싶은 서늘함이었다.

전 세계가 힘을 합쳐 무형독 대책 본부를 설립한 이유다.

"…만약, 이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이 자리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하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전에 말씀드리지 않고 부담을 드리게 된 것을."

도진이 보았을 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는 무형독에 '감염된' 이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위에 있었으니 그 아래 수많은 이들 중에는 무형독에 감염된 이가 필연적으로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 가운데 조금 다혈질인 성격이 얼굴에 드러나는 이가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천마신교 또한 의심해도 되겠습니까?"

"…펠커스!"

국방부측 사람이 크게 놀라 외쳤으나 도진은 괜찮습니다, 힘이 담긴 말로 그를 안심시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만 특별하게 생각해 달라는 건 오만이고 독선이니까요. 오히려 안심했습니다. 펠커스 대령……님이신가요? 당신은 더욱 믿음이 가는군요."

"…크흠."

예상치 못했던 신뢰에 펠커스 대령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부하들을 믿기에 그들을 의심하는 도진에게 반발한 것이었으니 좋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도진은 오히려 그를 신뢰한 것이었고 분위기가 제법 좋아졌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여기 오성아 좌부주(左府主), 그리고 정의검가 분들과 논의해 주세요."

* * * *

동영상에는 모든 내용이 찍히지 않았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좀비라 불리는 시독귀를 도진이 처치하면서 진을 돌아다니는 장면이 짤막하게 녹화된 게 전부였다.

허나 그 내용만으로도 대응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들었으며 무형독이 현실 같지 않은 '사술(邪術)'을 쓸 수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여기에 그것을 전자 기기를 활용하여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무형독에게는 지극히 위험한 정보였다.

"이 동영상으로 낚시를 하는 것도 제법 괜찮을 거 같아."

-음. 나쁘지 않겠어.

바로 그런 정보를 도진은 나지윤과 상의하여 '미끼'로 쓰기로 했다.

이 정보를 독점하는 건 그리 메리트가 크지 않았다.

무형독은 지극히 거대한, 그러나 그럼에도 모습을 철저하게 감출 수 있는 조직이었으니 혼자 싸우는 것보단 함께 싸우는 게 좋았으니까.

그러자면 정보를 공유해야만 했고 그러면 어차피 오래가지 않아 도진이 영상을 촬영할 수 있다는 걸 무형독이 알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선수를 쳤다.

'호신강기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영상의 길이를 제한하여 무형독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한정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정보가 흘러들어가는 루트를 추적할 수 있도록 낚싯줄을 연결한 것이다.

이건 무조건 걸릴 수밖에 없는 미끼다.

문제는 무형독이 미끼를 물었을 때 그것을 낚을 수 있느냐이고.

"그 부분은 너와 세이전을 믿을게."

-하여간. 이래서 유능하면 피곤하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도진은 나지윤과 세이전을 믿었다.

* * * *

며칠에 걸쳐 논의가 마무리되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확정되었다.

소식을 들은 빌리 플로이드가 찾아왔다.

"빌."

"여, 친구."

빌리 플로이드는 여전히 도진과는 맞지 않는 성격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성향적으로 맞지 않는다 해서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빌리 플로이드는 도진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시간을 쪼개어 찾아올 정도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열었던 파티에서의 사진을 빌리 플로이드가 SNS에 업로드했고 제법 화제가 되면서 둘의 사이가 알려졌다.

-와.. 김도진은 클럽에서도 콜라를 마심? ㅋㅋㅋㅋ 다 술마시는데? ㅋㅋㅋ

-김도진 술 안 먹는 건 전나 유명함. 회식에서도 콜라만 마심 ㅋㅋ

-근데 저런 자리에서까지 콜라 마시면 눈치 주고 찐따 되는데 진짜 대단하긴 하다.

-너도 천마 되면 그래도 됨.

-아.

-Aㅏ.

-ㅋㅋㅋㅋㅋㅋ 천마면 민트초코 먹어도 됨.

-ㅡㅡ그건 아님.

-선넘지마라.

-미쳤나 진짜 ㅋㅋㅋ

-그런데 소천마랑 사진 찍었다고 자랑까지 하고.. 빌 사장 진짜 출세했네.

-그러게. 후기지수에서 소천마랑 사진 찍는 회사 사장이라니. 부럽다..ㅋㅋ

빌리 플로이드와 사이 좋게 지내는 건 긍정적인 일일까.

객관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도진은 고민을 그만뒀다.

분명히 세계 장인 박람회에서의 빌리 플로이드는 결코 가까이 하지 않을 인간이었으나 이곳에서 다시 만난 빌리 플로이드는 변했고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인간으로 자랐다.

빌리 플로이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희 회사와 함께 일하고 싶은데, 어떡하면 되지?"

도진이 하하 웃었다.

"몇 개월 뒤기만 해도 어려웠겠지만…… 빌 너는 운이 좋아. 지금은 아직 자리가 남아 있거든. 우리 총괄부의 번호를 줄 테니 상담해 봐."

"좋아! 역시 잘난 친구를 둬서 나쁠 게 없군."

전생에서는 전혀 몰랐던, 연이 없었던 인물.

그러나 이번 생에선 제법 인연이 짙게 연결되었고 긍정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한국에 찾아갈 테니 그때 새벽 시간 정도는 비워 달라구."

"그래. 노력해 볼게."

그리고 그렇게 전생에선 인연이 없었던, 그러나 이번 생에선 인연이 생긴 또 한 명의 인물.

"정말 감사해요."

레서 밀리나 또한 도진을 찾아왔다.

"도진. 당신 덕분에 나는 잃었던 일상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

깊이 고개 숙이며 감사하는 레서 밀리나에게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에 대한 보수를 받았고 이렇게 진심이 담긴 인사까지 받았으니 뿌듯하네요."

이번 일은 공짜가 아니었다.

정식 의뢰였으니 당연한 일로, 레서 밀리나 개인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부모가 적지 않은 의뢰비를 지급했다.

여기에 의뢰인이었던 레서 밀리나가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방문했으니 이번 일에 대한 보수로는 충분했다.

레서 밀리나는 충분하다는 도진의 미소를 잠시간, 말없이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도진."

"네, 레서."

"혹시 미국에 지사를 세울 계획은 없는 건가요?"

"지사요? 바른 엔터?"

"네. 만약 지사를 세운다면, 나는 거기와 계약하고 싶어요."

사실 지금 회사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레서 밀리나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도진은 잠시 생각하고선 말했다.

"그렇네요. 만약 미국에서의 활동이 충분한 메리트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지사를 세울 것 같네요."

기실 미국 시장은 한국 엔터계에 있어 꿈의 땅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고배를 마시며 포기해야 했던 땅이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 슬슬 바뀌어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게 되었던 전생에서의 미래를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모르는 일이지.'

정글 게임은 넷비전을 통하여 수많은 나라에 서비스된다.

그걸 계기로 하여 바른 엔터가 미국에 진입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말하니 레서 밀리나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도진. 그렇다면 그 메리트, 내가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레서가요?"

"네! 나는 크게 성공해서, 나만으로도 당신의 회사가 이곳에 지사를 세울 만큼의 메리트를 창출해 내도록 할게요!"

"하하하! 그렇네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레서."

"네!"

전생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 레서 밀리나.

그녀가 과연 얼마만큼의 나비 효과를 일으킬지 기대하면서.

도진은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

-무형독과의 악연에 관하여 대중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이에 관해 한 말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무형독은 나의 주변에서 나쁜 짓을 저질렀고, 그것을 사과하고 속죄하기는커녕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죠.

-그러니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무형독을 징치할 것이고, 귀를 붙잡고 죗값을 치를 장소로 끌고 갈 겁니다.

제법 겨울이 깊어졌다.

귀국한 도진은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을 피하지 않았고 가능한 선에서 인터뷰를 해 주었으니 그것은 제법 오래 회자되었다.

허나 그런 분위기와 달리 도진은 조용히, 평화로운 일상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모험만이 삶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꾸준하게 걸어 나아가는 걸음이 도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으니 학생을 졸업하고 새로운 봄을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도진이 끊임없이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밥 먹어,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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