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화
"…당했군."
그것은 은밀히 길을 따라 이동하던 빌리 플로이드가 내뱉은 말이었다.
함께 움직이던 유지은과 소담, 독마전과 투마전의 무인들이 포함된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이미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최대한 존재감을 지운 채 도진과 위연서가 타고 있던 트럭을 뒤따르던 그들이었다.
무려 1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그들이 멈춰선 것은 앞서 가던 트럭에 대한 습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상황을 알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빌리 플로이드의 당했다는 말 또한 트럭을 뜻하는 게 아니었으니.
"…또 안개 안에 들어와 버렸네."
신묘한 눈동자를 빛내며 주위를 살피는 유지은의 말대로, 어느 순간 그들의 주위를 안개가 완전히 뒤덮어 버린 것이다.
전조도 없이 사방이 안개로 뒤덮였고 그것은 무언가 대처를 하기도 전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그들이 휩쓸리게 만들었다.
어두웠으나 달빛으로 인해 탁 트여 있던 시야가 극단적으로 차단되었고 감각마저 어그러짐을 느꼈다.
"…심법을 운용하여 감각을 보호하십시오."
독마전의 무인 중 한 명이 말했다.
빌리 플로이드가 그 말에 다급히 내공을 운용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를 제외한 천마신교의 모두가 이미 심법에 따라 내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바할라에서 겪었던 진법이랑 비슷하지만 더 수준 높은 진법 같네요."
유지은의 말에 투마전의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 고등의 수법입니다."
바할라에 펼쳐졌던 환영미로진은 정글과 운무라는 자연적인 요소의 힘까지 최대한 활용하여 감각에 혼란을 주고 길을 잃게 만드는 데 집중한 진법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더욱 능동적으로 사람의 감각을 어그러뜨리고 시야를 제한하는 안개가 일대를 뒤덮고 있다.
"임시변통의 진법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도록 처치한 진입니다."
"존 스미스가 무형독의 일원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대한 증거가 되겠군, 이건."
빌리 플로이드가 중얼거렸다.
내용과 달리 그리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공포 영화 출연 제의를 수락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습격에 있어 진법을 배제하지 않았다.
허나 이만큼이나 거리를 두고 이동하는 중에 외부에서부터 발동하여 내부를 뒤덮는,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진법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을 열어두고 대상을 삼킬 때까지 숨죽인 채 대기하는 형태였다.
그렇게 진 안에 들어와 버린 지금 문제가 되는 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내공을 운용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공회전 상태의 차량과 같다.
지속적으로 연료를 소모하고 있는 상태.
내공을 소모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 제한이 걸려 버렸다.
다행히 긍정적인 요소가 적지 않았다.
"규모가 대단하여 부술 수는 없겠지만 생로를 찾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천마신교의 후예들은 진법에 관해 조예가 있었다.
특히 바할라의 경우 철저한 무투파(武鬪派)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독마전 이상으로 진법에 관한 지식이 있었으니 자신들의 나라에서 환영미로진이 펼쳐졌던 경험으로 인해 더욱 철저하게 배우고 대비를 해왔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기분좋은 예외가 있었으니.
"이거, 여러 갈래 중에 음수로 흐르는 갈래의 교차점을 찾으면 그게 생로가 되는 거죠?"
"…그걸 찾으실 수 있습니까?"
유지은의 물음에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유지은이 그 반응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후배랑, 어 교주님이라 해야 하나요?"
'괜찮습니다' 답하는 교도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유지은이 말을 잇는다.
"후배랑 진법 안에 들어가 봤잖아요. 그때의 경험으로 조금 공부를 했거든요. 진법도 수학으로 답을 찾을 수 있겠더라구요."
"……."
듣는 입장에서 조금 어이가 없는 소리다.
틀린 소리라는 게 아니라 그걸 독학으로 알아내고 계산할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진법은 자연을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는 학문이고 그것은 곧 수학과 과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천재는.
진법의 생로를 수학으로 계산하는 걸 실제로 해내는 게 가능했다.
천마신교의 교도들은 그래서 더욱 놀란 얼굴이 되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교주님이시다, 로 결론을 내면서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생로를 찾는 데 도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후발대는 아마 진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을 도진을 찾아 움직였고 시간 제한 내로 여유롭게 합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허나 무형독이 준비한 함정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으니.
"흐어어어……."
까각. 까각.
"…뭐야, 이건."
또 다른 방해 요소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시신경에 연결되어 덜렁이는 안구.
무언가 목소리를 내지만 구멍이 뚫려 있어 섬뜩하게 바람 소리가 새는 목.
부러져 튀어나온 뼈가 마찰하여 나는 소름이 돋는 소리.
피부는 대부분 부패하였고 이동 중에 내장이 털퍽, 땅에 떨어졌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의 그것들은 그러니까.
"좀, 비……?"
"…장르가 그냥 공포가 아니라 좀비였군.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장르인데 말이야."
자욱한 안개가 깔린 새벽에 좀비들이 스멀스멀 접근한다.
그야말로 현실에서 벗어난 상황에 빌리 플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진법만 해도 상식적이지 않았는데 좀비가 웬말이냔 말이다.
정말로 현실 감각이 어그러지고 영화 속에 처박힌 것만 같다.
물론 그런 잡생각과 별개로 대응은 칼같았다.
경계하며 무언지 모를 놈들을 철저하게 확인한다.
외견은 정상적인 게 거의 없는, 심약한 이는 보기도 힘든 방송 불가 수준의 몰골을 한 좀비다.
몇 개 안 남은 이는 누렇거나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고 손톱 또한 다르지 않았다.
팟-!
먼저 독마전의 무인들이 암기를 날려 본다.
작은 쇳조각이지만 초식에 따라 내공을 담아 날렸기에 범상치 않은 힘으로 '좀비'들을 때렸다.
그리고.
퍼퍽-!
꽈과광-!
"……!!"
암기에 맞은 몇 놈 중 둘이 갑자기 폭발을 일으켰다.
기민하게 일행이 그 파편을 피하여 몸을 뒤로 날렸고.
치이이이…….
바닥에 떨어진 파편이 부글거리며 독한 연기를 피워올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치겠군."
빌리 플로이드가 또 입을 가만두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허나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으니 나타난 좀비들의 대처가 쉽지 않음을 방금의 한 수로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몇 번의 암기를 더 던졌고 밝혀진 것은.
'…나는 도움이 안 되겠군.'
"강력한 독(毒)이 이빨과 손톱에 묻어 있습니다."
좀비들의 손톱과 이빨엔 무시할 수 없는 독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스치면 중독되었으니 단단한 쪽이든 무른 쪽이든 접근전을 펼치기엔 최악의 특성들이다.
때문에 조우한 순간 독마전의 무인들이 원거리 공격을 날려본 것인데 폭발을 해 버렸다.
여기서도 좀비들마다 특성이 조금 달랐으니 어떤 것은 물러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터지며 '독 수류탄'이 되었고 또 어떤 것은 단단하여 발경을 때려박아도 터지지 않고 사람을 물거나 할퀴려 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원거리 공격만 하자니 암기의 수에는 제한이 있었고 내공을 발출하여 타격하는, 검풍(劍風) 같은 기술도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했다.
그것을 마음 놓고 난사할 수 있는 이는 이 파티에 없었다.
결국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싸워야 하는데 주먹을 쓰는 빌리 플로이드가 그 부분에 있어 제일 취약했다.
'소모를 극대화해서 진법 안에 가둬 버리겠다는 건가.'
빌리 플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독마전의 무인이 건넨 캡슐을 까득, 깨물었다.
좀비는 민첩했으며 기상천외한,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움직임으로 일행에게 이빨과 손톱을 들이밀었다.
놈들을 떨쳐내다 결국 건틀렛에 보호받지 못한 부분을 긁혀 독마전이 준비해 온 항독제(抗毒劑)를 쓴 것이다.
만능 해독제란 건 없으니 웬만한 모든 독에 내성을 가지고 효과를 억누르는 항독제를 준비해 왔다.
이걸로 버티다 돌아가 제대로 된 해독을 해야 하는데…… 좋지 않다.
모든 요소가 그들의 소모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주어졌던 시간이 내공, 체력, 물자까지 실시간으로 소모되면서 깎여 나가고 그것은 그들의 불리로 이어진다.
괜히 따라온 건가.
빌리 플로이드는 순간이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렸고.
'……?'
전혀 흔들리지 않은 유지은과 소담, 천마신교의 무인들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고 말았다.
그들은 상상 이상의 신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근래의 성공으로 자신의 재능에 자존심을 다시 드높인 빌리 플로이드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하지만 그것과 상황은 별개였다.
소수로, 그러나 어딜 가든 끊임없이 나타나는 좀비는 미로에 갇힌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확신을 가지고 그들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그 의문을 읽은 소담이 이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찬연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고?"
"응. 우리는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돼."
그리고 이어서 말하는 건 투마전의 무인이다.
"소천마께서 함께 하신다. 이깟 잡술(雜術)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독마전의 무인이 말한다.
"소지존이 우리를 이끄시니 그저 나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하."
빌리 플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비웃거나 가당찮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그 또한 한 무리의 수장이었기에.
이들이 보여주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나는 따라가는 것보단 따라잡고 싶으니까 조금 더 속도를 높이고 싶은데요."
"사실은 저도 그래요."
그리고 그저 등 뒤를 따라가는 것만이 아닌 옆에 서고 싶어하는 열망까지 더하여서.
그들은 미로와 좀비를 뚫고 도진을 향해 나아갔다.
* * * *
슷-
퍼펑!
백설의 시린 궤적에 좀비가 폭발한다.
그 폭발은 마치 자석에 달라붙듯 날아드는 여러 구의 좀비에 의해 억눌렸으나 이내 연쇄하여 더욱 큰 폭발이 일어났다.
물론 그 범위 내에 도진은 없었으니 안개도 좀비도 도진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이건 장르가 무협이 아니라 좀비 공포 영화네요.
-허허. 그렇구나.
여유롭게 농담을 던지지만 도진과 위지혁, 장호의 눈은 진지하게 현상을 읽고 있다.
-시독귀(屍毒鬼)라고 하셨지요.
-그래. 혈교에 전수되던 사술(邪術)에 시체를 독에 절인 강시로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과 닮았구나.
위지혁은 혈교와의 대립 때 보았던 강시를 떠올렸다.
-예상대로 놈들이 혈교의 후예일 확률이 높아졌다고 봐야 할까요.
-교리는 버리고 무공과 술법만을 취했을 수도 있다.
-하긴. 놈들에게선 혈교의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았지.
감정이 옅은 장호의 말에 위지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혈교는 그야말로 미친 사이비 종교였으니 거기에 물들었다면 무형독에서 분명히 그 피 냄새가 났을 것이고 이렇게나 넓게 사회에 스며들지도 못했을 거다.
다만 한 가지, 특히나 사술과 술법에 능했던 혈교의 유산을 수습했을 가능성은 제법 높았다.
'그러면…….'
"흐어어어……."
투웅-
꽈과광!
무리 중 마지막으로 남은 좀비가 다가오는 것을 도진이 가볍게 툭, 쳤다.
허나 그로 인해 나타난 현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공이가 뒤를 친 총알마냥 날아가 저 멀리서 폭발한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무리의 좀비를 처리한 도진의 눈이 안개 너머를 응시했다.
추론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며 제법 시간을 보냈다.
이제 슬슬 가도 될 시간이었다.
'얼굴 보고 인사나 할까? 존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