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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43화 (543/741)
  • 542화

    숭무동에 살면서 도진이 체감한 것들 중 하나는 부촌(富村)에서 관리비를 걷어 운용하고 있는 온갖 편의 시설과 커뮤니티 시설들이 단순 편의만을 위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커뮤니티'를 위한 시설이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헬스장.

    숭무동에도 헬스장이 있으며 이는 숭무동 내의 관리비로 운영되고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수준을 자랑하는 헬스장은 숭무동에 사는 이들의 건강 증진과 단련에 부족함이 없는 시설을 제공했는데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운동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티 공간'으로서도 기능했다.

    한 마디로 '인맥'이다.

    운동만 해서는 그 시간에 하나밖에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운동을 하며 각계에서의 권위를 가진 이들과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하나가 아닌 둘, 혹은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숭무동의 헬스장에는 운동 시설만큼이나 공을 들인 휴게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부분을 도진은 숭무동 내에 살면서 체감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곳 베벌리 힐스 내에 마련된 헬스장에 척 봐도 보통이 아닌 이들이 모여 있음에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베벌리 힐스는 유명 연예인들과 사업가들이 모인 도시였으니까.

    다만 개중에 한 무리, 그 무리 안에 구면인 남자가 있었기에 시선이 간 것이었다.

    흑인의 비중이 높은 무리였다.

    대부분이 엄청난 덩치와 그에 걸맞는 키, 근육이 돋보였고 쇠질을 하는데 그 무게가 압도적이어서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이곳 헬스장 내에서도 비할 데가 없는 압도적인 피지컬.

    그리고 그 피지컬을 자랑하는 무리 내에서도 '군계일학'이라고 해야 할 남자가 있었다.

    2미터가 조금 넘는 키에 웬만한 여성의 허벅지를 능가할 정도의 팔뚝.

    허나 그럼에도 둔중하다기보단 날렵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흑표범'을 연상케하는 남자.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듯한 몸을 지닌 그가 도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과장되게 두 팔을 펼치며 다가왔다.

    "오! 여기서 만나다니. 동양에서는 이걸 인연이라고 한다지?"

    인연(因緣).

    그 단어에 도진이 피식 웃으며 다가오는 이를 마주했다.

    "빌리 플로이드."

    웬만한 이는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에도 압도될 만한 남자.

    흑표범이라는 별호를 가진 빌리 플로이드와는 말 그대로 인연이 있었다.

    세계 장인 박람회에서 존 스미스가 내세운 후기지수로 처음 만나 그리 좋지 않은 관계로 갈등을 빚었다.

    물론 갈등의 결과는 일방적인 존앤집스와 빌리 플로이드의 손해로 끝났다.

    존앤집스는 금전적으로도 명성으로도 큰 손해를 보았고 빌리 플로이드는 에이스에서 왕따로 추락했다.

    다만 마지막 날.

    도진은 빌리 플로이드에게 변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조언을 건넸고 그 조언으로 이루어진 씨앗이 제법 발아를 하여 눈앞에 나타났다.

    빌리 플로이드의 부와 명예의 발판은 존앤집스의 후원이었다.

    존앤집스의 후원 덕분에 빌리 플로이드는 소위 말하는 '셀럽'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고 때문에 잘못된 시스템을 지적하지 못했고 존 스미스의 옳지 않은 명령조차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도진과의 마지막 대면 후 빌리 플로이드는 변했다.

    -빌리 플로이드, 존앤집스의 후원 시스템을 비판!

    -존앤집스, 빌리 플로이드의 계약 위반을 근거로 후원 중단 발표.

    빌리 플로이드는 대놓고, 거세게 존앤집스를 비판했다.

    때문에 존앤집스의 후원이 끊겼고 이대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나 했는데…….

    "소문은 들었어. 잘 나가는 사장님이 됐다고."

    "하하하! 천하의 소천마가 내 소문을 들었다니. 확실히 성공하긴 했군. 나도."

    빌리 플로이드는 갑자기 의류 회사를 세웠고 거기서 내놓은 브랜드가 대박을 쳤다.

    기반은 예의 흑인들의 강력한 지지였다.

    그 지지를 등에 업고 대기업, 백인 등의 잘못된 시스템을 비판하고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은 '자유(Freedom)'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런칭했고 그게 크게 성공한 거다.

    그러니까 지금 빌리 플로이드는 잘 나가는 회사의 사장이면서 동시에 무림인이었다.

    이런 신흥 사업가인 빌리 플로이드였으니 베벌리 힐스의 헬스장에 나타나는 게 이상하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보를 도진은 출발 전 이미 나지윤에게 들었고.

    다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다면.

    "친구! 친구는 여전하군."

    씨익 웃으며 다가와 친하게 군다는 거다.

    그것이 조롱이나 다른 의도를 위한 게 아니라 '진짜'라는 게 예상 외였다.

    '이걸 힙하다고 해야 할지…….'

    "네 덕분에 내가 변할 수 있었지. 조언을 받아들이길 잘 했어."

    "변하는 건 어려운 거니까. 모두 니가 한 일이니 나에게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하하!"

    그날 해 준 조언으로 스스로가 바뀔 수 있었던 데 대한 감사가 이유였던 모양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태도가 대번에 바뀌는 건 역시 좀 신선하다.

    "나도 이야기는 들었지. 넌 여전히 인기가 많아."

    그렇게 말하는 빌리의 시선은 소담과 유지은, 위연서, 그리고 레서 밀리나를 차례로 짚는다.

    그러고 보니 그때 있었던 일본 쿠사나기 공방의 후원을 받는 후기지수들은 도진을 '하렘왕'이라고 했었다.

    '하렘왕…….'

    허허, 지금 생각해도 속으로 웃음이 나오고 마는 단어다.

    이렇게 된 것 제대로 인사를 나눴다.

    그날 빌리 플로이드와 인연이 있었던 상미나 클로에, 우서진 등이 없는 멤버였기에 별다른 감정 없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소천마.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지. 그런데, 생각보다는 여리여리한 걸."

    빌리 플로이드의 일행 중 한 명이 그런 소리를 하며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음, 그건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한 명까지 그들의 덩치는 그야말로 거대했다.

    2미터 10은 될 법한 키가 전혀 크게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근육.

    빌리 플로이드의 일행 중 피지컬이 좋지 않은 이는 한 명도 없었는데 그 수준이 가히 압도적이었다.

    190의 키에 100키로가 넘는 이가 오히려 평범해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는 서양에서 '외강내초(外强內超)'의 개념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인데 풀어 쓰자면 외공을 단련하여 내공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1차원적으로 외공으로 내공을 뛰어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공을 단련하되 외공을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내공에만 치중하는 무인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과학적인' 개념이다.

    같은 체급이라면 결국 외공에서 승부가 갈린다.

    체급은 절대적이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요소였으니까.

    그렇다면 내공과 뜬구름 잡는 깨달음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그 시간에 외공을 단련하는 게 이득이지 않은가.

    이는 생각 이상으로 실전에서 극명하게 증명되었고 서양은 그렇게 피지컬을 키우는 쪽으로도 크게 발전하였으니 그 일면이 빌리 플로이드의 무리였다.

    그런 배경으로 볼 때 그들이 겨우(?) 180을 조금 넘는 키에 겉으로 보기에만 좋은 수준으로 근육을 키운 것 같은 도진을 '여리여리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던 거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도진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당연히 소담과 위연서의 심기를 건드렸고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도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방식이 있으니까 말야. 다만 한 가지, 정정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내 근육이 너희들의 근육보다 백 배 정도는 더 셀 거야."

    가벼운 도발이었다.

    "오?"

    "……."

    하지만 효과는 대단했으니 처음 말을 꺼냈던, 고릴라와 퓨전한 건 아닐까 싶은 덩치가 앞으로 나섰다.

    "그거 흥미로운 걸? 한 번 증명해 볼 텐가?"

    "남자라면 여기서 빼선 안 되지."

    "뭐, 고추가 없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말야."

    대번에 그런 소리들이 나온다.

    그들은 신사적이라기보단 할렘가의 뒷골목이 어울리는 분위기를 품고 있었으니 예상했던 일이다.

    당연히 도진은 빼지 않았다.

    "증명이야 어렵지 않지. 팔씨름으로 할까?"

    "좋지!"

    덩치 또한 흔쾌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결이 성사됐다.

    도진과 덩치, 카톤이 마주보고 섰다.

    서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 맞닿게 하고 오른손을 악수하듯 잡았다.

    덩치의 차이 때문에 정말로 사람과 고릴라가 악수한 듯하다.

    둘이 말했던 '팔씨름'을 위한 자세로, 흔히 생각하는 팔씨름이 아닌 일종의 스포츠와 같은 느낌의 대결이었다.

    이 자세에서 시작하여 상대를 넘어뜨리면 승리다.

    중요한 건, 이 팔씨름에서는 특별한 룰이 하나 추가됐으니 내공을 사용하면 패배였다.

    '근육'의 싸움이었으니까.

    "시작!"

    각자의 일행들만이 아닌 헬스장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빌리 플로이드가 외쳤다.

    꽈아악-!

    지켜보는 이도 알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힘으로 카톤이 도진의 손을 압박했다.

    부풀어 오른 근육만 보아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나 도진은 그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흥!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꽈아아아악!!

    카톤이 자극받아 더욱 힘을 주었으나 도진의 표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처음의 얼굴 그대로 도진은 카톤의 안간힘을 없는 취급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하질 않았네. 내가 이기면 넌 뭘 줄 거지?"

    "뭐, 라고?"

    "그렇잖아. 승부인데 상품이 안 걸리면 재미없잖아?"

    빠득-!

    카톤이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안 그래도 힘을 쓰느라 시뻘갰던 얼굴이 더 붉어진 채 외쳤다.

    "까짓거, 저녁이라도 쏘도록 하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외침이었다.

    그러나 도진은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네. 그럼, 길게 끌어봐야 재미없으니까 바로 할게?"

    경고한 도진이 비로소 손에 힘을 주었다.

    드드득-

    "……!!"

    카톤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그에 따라가듯 입도 벌어졌다.

    '……!!'

    머릿속임에도 단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저 엄청난 고통에 본능이 몸을 뒤로 빼도록 했다.

    콰악-!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도진에게 붙잡힌 손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분쇄기에 손이 빨려 들어가 버린 것만 같다.

    "으, 그, 그!"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잊은 듯 필사적으로 카톤이 손을 빼려 했다.

    미친듯 몸을 뒤틀었고.

    …….

    도진은 처음의 얼굴 그대로 편안하게 서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 아니라 편안히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서 있었고 그래서 더 경이적이었다.

    손을 맞잡은 카톤이 미친듯이 몸을 뒤트는데 그 힘이 중간에서 완전히 차단된 비상식적인 광경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지은이 말했다.

    "많이들 착각하더라고. 우리 후배가 테크니션인 줄 알아."

    테크니션. 그러니까 기술을 위주로 하는 무림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진을 그런 타입으로 보았다.

    무림인치고는 평범한 키와 덩치.

    여기에 내공 또한 부족했던 게 학생 시절의 도진이었으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후배 저거 진짜 완전 사기꾼이라니까. 근데 말야. 기술 이전에 힘이 차원이 달라."

    유지은의 말에 소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진짜…… 단단해요."

    진천공을 배우면서 대련도 병행했었다.

    거기서 소담은 도진과의 대련을 위한 신체접촉에서 이렇게나 단단하고 힘이 넘치는 게 또 있을까 싶었고 대련 중임에도 볼이 붉어졌었다.

    어쨌든.

    유지은도 알고 소담도 알았다.

    도진은 비유하자면 '중성자별'이었다.

    겉보기와 다르다.

    극도로 질량이 압축된 중성자별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차라리.

    "끄아아아아!"

    블랙홀이었다.

    카톤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는 블랙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저 부피만 큰 별처럼 보였다.

    "……."

    지켜보던 모든 이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든 것이 그렇게 빨려들어갈 것처럼 긴장이 팽팽하던 순간에.

    슥-

    도진은 카톤의 손을 놓아 주었다.

    쿠당탕-!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긴 걸로 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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