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레서 밀리나가 배우로서 성공의 발판이 된 드라마에서 맡은 극중 역할은 철없는 부잣집 딸내미였다.
명문대에 입학한 각양각색의 학생들을 비추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철없는 부잣집 여대생이 기본 골자였다는 말이다.
본래 나이가 17살이라 극중 역보다 어린 나이였으나 크게 어색함은 없었고 시즌제 드라마라 길게 봐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더 좋았다.
어쨌든.
가난하지만 명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인 주연급 남학생을 위한 조연이었던 그녀는 그러나 스스로의 매력으로 역할의 한계를 깨 버렸다.
"내가 널 좋아하겠다는데 왜 주변을 신경 써?"
"미안."
"그래, 넌 나한테 미안해야 돼! 이 세상에서 나보다 널 좋아해 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저 철없이 들러붙는 부잣집 여학생이어야 하는데 찍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뭐지? 이게 진짜 부잣집 딸내미의 포스?..
-언니.. 왜 이렇게 멋져요?
-?언니? 동생 아님?
-멋지면 언니임.
-남자 십새키야 넌 돈내고 촬영해라.. 제발..
-그래 돈 내고 촬영하라고 부러워 뒤지겠으니까.
-부러우면 지는 거다. 참아라.
-이미 졌는데 뭘 참아 십새키야!!
-Aㅏ..
한국에도 제법 입소문이 났는지 검색하면 레서 밀리나에 관한 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레서 밀리나의 인기가 오르니 자연스럽게 대본의 수정과 함께 비중이 높아졌고 제작 예정인 시즌2에서는 아예 극의 중심이 될 예정이다.
이런 배경으로 제작진이 큰맘 먹고 돈을 들여 존앤집스 공방에서의 촬영을 추진했고 여기서 레서 밀리나가 스쳐 보았던 직원 중 한 명이 그녀의 짐과 집을 뒤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레서 밀리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수혜를 입은 배우가 있었으니 그녀의 보디가드로 출연하던 배우였다.
겨우 이름이 부여된 게 전부였던 조연은 그러나 레서 밀리나의 일상 비중을 늘리고 삼각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그가 수혜를 입게 된 것이다.
이 시도 또한 성공해서 보디가드의 인기 또한 높아졌는데, 기사 제목인 '애쉬블론드 그녀의 보디가드'는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니 레서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소천마가 보디가드를 해준다고? 아 ㅋㅋ 만화도 이렇게는 안함ㅋㅋㅋ
레서 밀리나는 한국에서 말 그대로 호감 스택을 제법 높게 쌓았다.
"비빔밥, 맛있어요."
"김치, 매워요."
"양념 치킨 좋아요!"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피지컬과 뇌지컬 둘 다 준수한 사람답게 익숙해지면서 제법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한국어로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말하니 호감 스택이 쌓이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그 체험을 함께 하는 게 안티체리와 레드슈였으니 더더욱.
그렇게 이름을 알린 레서 밀리나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소천마가 보디가드, 호위로 함께 간다고 하니 커뮤니티가 들썩이며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올리게 됐다.
폭발적인 관심 속에 연예 프로그램의 인터뷰에 도진이 응했다.
"갑작스런 결정의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학교를 졸업했고 얼마간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런 때에 외국에서의 호위를 배워볼 생각입니다."
"외국에서의 호위요."
"네. 아시다시피 한국의 치안은 유명할 정도로 좋잖아요. 아, 물론 그렇다고 외국에서의 치안을 비판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국과 외국의 호위 환경이 다른 건 부정할 수 없죠."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총.
그로 인한 절대적인 차이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진은 그렇게 말했고 리포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치에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천마신교 내에서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뒤 결정한 것이었기에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었다.
며칠 전 총괄부에 모인 자리에서 도진이 레서와 나눈 이야기를 해 주니 나지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있는 이야기네. 안 그래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걸리는 부분들이 몇 개 있었거든."
모든 사건에 무형독이 얽히진 않았겠지만 웬만큼 큰 건수에는 무형독이 관여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레서 밀리나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행동을 저쪽에서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테고."
"응."
나지윤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서 밀리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존 스미스의 눈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다못해 '기억력이 좋다'는 부분만 해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뭘 의도하고 있었든 네가 호위로 나섰으니 저쪽도 들썩이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 부분을 파고들어 볼게."
"그래. 부탁해."
"우리 교주님이 직접 행차하시는 게 쪼오금 과하긴 하지만 그 부분은 열심히 이미지 메이킹을 해볼게."
한유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도진은 이제 천마신교의 교주였다.
그에 걸맞는 신위도 의천검가를 무릎 꿇림으로써 보여 주었다.
그런 도진이 레서 밀리나의 호위로 직접 나서는 건 말 그대로 '뭔가뭔가'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도진의 나이를 포함하여 잘 꾸미면 친근한 좋은 이미지를 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부분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다시 오늘 인터뷰.
리포터가 말했다.
"정의검가의 유지은 님이 또 함께 소천마와 일을 하게 됐다고 SNS에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번 일이었군요."
"네, 맞습니다. 정의검가는 저희가 배울 수 있는 풍부한 노하우를 가진 명문검가이니까요. 후배의 입장을 이용해서 선배에게 많이 배울 생각입니다."
본래의 목적은 존 스미스와 레서 밀리나 사이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인터뷰에서 말한 것들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도진은 외국에서의 호위에 관해 배우고 경험할 생각이었고 유지은이 정의검가 사람들과 '레서 밀리나 호위'의 의뢰를 함께 해 주기로 했다.
여기에 소담과 암산서가, 위연서와 독마전, 투마전의 무인들이 함께 한다.
공식적으로는 열두 명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서른 명이 함께 가게 됐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소천마 님."
"네, 수고하셨습니다."
연예 프로그램에서의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당연히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악플 중에는 그런 게 있었다.
-아니 ㅋㅋ 천마신교 교주가 하는 일이 겨우 어린 여배우 하나 호위하는 거임? 게다가 경험도 읍써? ㅋㅋㅋㅋㅋ
예상했었던 악플이었는데 도진이 굳이 대응할 것도 없이 다른 이들이 융단 폭격을 가해 주었다.
-이 새끼 급식임?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진짜 존나게 용감하구나 ㅋㅋㅋ
-천마신교 사람들이 이번에 웨일스 후작이 확장하는 사업 경호 계약 체결한 건 앎? 명성공방이랑 계약 체결한 건? 애초에 바할라가 이쪽 업계는 물론이고 아예 용병 업계 탑인 건 알지? 그 바할라 노하우가 이제 천마신교에 전수될 건데 경험이 읍써요? 엌ㅋㅋㅋ...
-우리 교주님이 너무 친근하시니까 이렇게 주제 모르는 것들이 기어오르는구나..
악플러는 곧 댓글을 삭제했다.
그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없이 천마신교의 이름을 선포한 게 아니다.
이미 한 울타리 내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거대한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에 따라 착실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워낙 거대한 만큼 준비가 오래 걸리는 것이었으니 준비를 마쳤을 때 천마신교의 위용은 그들이 상상하는 이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위용에 걸맞는 본단 또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도진은 시야에 두고 살핀다.
믿을 수 있는 인재들에 전권을 위임했지만 눈을 떼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금세 흘러 레서 밀리나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정글 게임과 관련된 스케줄을 끝내고 예의 드라마의 시즌2 촬영을 위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레서 밀리나의 일행에 도진이 포함되었다.
"오, 멋지네. 후배."
"하하. 그런가요."
"응응. 진짜 멋져."
"감사합니다."
도진은 특별히 정장을 입었다. 그것도 보디가드하면 흔히 떠올리는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
여기에 하얀 백설을 차고 있으니 꽤나 그림이 됐고 유지은이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소담 또한 말만 안했지 눈을 반짝이며 도진(보디가드 스킨)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기사화되어 퍼져 나가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레서 밀리나 일행과 도진 일행을 포함하여 약 서른 명은 비즈니스 석의 표를 끊었고 무탈하게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지낼 숙소를 잡은 곳은 그 유명한 베벌리 힐스였다.
연예인과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바로 그 부촌.
여기에 레서 밀리나의 저택은 물론이요 그 가족들이 사는 저택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레서의 집안 또한 존앤집스에야 댈 수 없다 해도 상당한 부호였으니 그녀의 부모는 양쪽 다 성공한 사업가였다.
"오전에는 헬스장, 오후에는 미팅 정도가 주요 스케줄이 될 것 같아요."
"네. 그럼 거기에 맞춰서 저희도 호위 플랜을 짜도록 할게요."
위협을 받고 있다지만 모든 활동을 멈출 수는 없다.
오히려 도진은 호위를 맡게 된 이상 자유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당분간 그녀가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 본가에는 자체적으로 경호를 맡은 업체가 있었는데 협의 하에 천마신교와 정의검가의 인력을 추가로 배치하게 됐다.
첫날에는 도진이 머물렀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헬스장으로 향했다.
단순히 근접 경호만이 아닌 혹시 모를 총격과 저격까지 대비한 장비를 운용했다.
일견 과한 대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의뢰주가 비싼 요금을 지불했고 그것을 원했다.
'흐음.'
도진은 정의검가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고 있는 호위 시스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지에 이른 무림인은 총구와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을 봄으로써 얼마든지 총에 대비할 수 있다.
반대로, 총구와 방아쇠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라면 총알에 당할 수 있다는 거다.
때문에 무림에는 전문적으로 총과 다양한 대처법에 관해 연구하는 조직이 있었으니 정의검가 또한 자체적으로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었다.
신안(神眼)이 그렇게 정의검가의 진형 안에 녹아든 노하우를 짚어냈다.
근중거리에서의 총격과 저격에 대비한 장비와 위치 선정.
소리보다 빠른 총알에 대비하기 위해 쌓아온 것들은 과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포지셔닝을 넘어 과학으로 정립한 진법에 가까웠다.
다만 그렇게 철저히 준비하여 헬스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특별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살펴봤는데 존 스미스의 끄나풀로 의심되는 사람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도진의 감각에 걸리지 않았으니 이건 정말로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소천마와 정의검가가 레서 밀리나의 호위를 맡게 됐다는 걸 존 스미스가 모를 리 없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설픈 수작은 제 무덤을 파는 일이 되니까.
다만 이렇게 되면 존 스미스가 물러날 수 없는 입장에서 작심하고 준비해 일을 벌일 확률이 높을 테니 경계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헬스장 안에 들어선 도진은 안면이 있는 인물을 마주하게 됐다.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