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41화 (541/741)

540화

"……."

도진은 생각했다.

레서 밀리나.

현재 미국에서 신예 배우들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

존 스미스.

우벽진으로 인해 최고의 자리에서 밀려났으나 여전히 손꼽히는 명장이자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존앤집스 공방의 공동 대표 중 한 명.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눈앞에 있는 레서 밀리나의 말대로라고, 존 스미스가 그녀를 노리고 있다고 간단히 믿는 건 힘든 일이었다.

허나 레서 밀리나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며 그 눈동자가 진실되었으니 그럴 만한 근거가 있을 터.

도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명경지수와 같은 도진의 분위기에 전염되어 레서 밀리나 또한 목소리를 떨지 않고 차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 두었던 제 물건을 뒤진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두 번이나 더 일어났고…… 내가 사는 집에마저, 괴한이 침입해서 살핀 흔적이 있었어요. 더는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녀가 말했던 대로 악성팬의 소행이라고 볼 여지가 있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인기와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우선은 소속사와 상담해서 조사를 해 봤어요. 그런데 증거가 나오지 않았어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구요?"

"네. 집에 설치했던 CCTV에는 물론이고 현장에서 지문 하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었으니 저의 과민 반응이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죠. 나는 우선 그런 것 같다고 인정했어요."

"흐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말이 과민 반응이 아닌 사실이라면, 이건 일반인의 소행이라기엔 계획적이었고 수준이 높았으니까.

"과민 반응이 아닌 사실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요?"

도진이 물었다.

레서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기억력이 좋아요. 한 번 본 것을 얼마간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죠. 놓아두었던 나의 물건이, 집 안의 것들의 위치가 미미하지만 달라진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몇 번이나."

"그랬군요."

대답하는 도진은 짐작하고 있던 것을 확인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레서가 묻는다.

"알고, 계셨나요?"

"네. 어느 정도는요."

레서 밀리나는 무공 또한 제법 높은 경지에 있었다.

열일곱의 나이로 무려 A-3, 일류의 수준이었으니 숭무고에서도 우등생이라 불릴 정도다.

그것은 그녀가 무공의 천재여서는 아니고 하나의 재능 때문이었으니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었다.

흔히 창작물에서 나오는 완전기억능력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억력이 좋다고 하기에는 모자랄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고 신체 능력도 준수했기에 그에 힘입어 무공의 형(形)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따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형태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익힘으로써 숙련도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A-3의 경지에 쉽게 이른 것이다.

동시에, 그랬기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한 다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건 그녀에게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배경으로 레서 밀리나의 몸짓에서는 정석 그 자체의 자세가 묻어나고 있었다.

도진은 '전문가'가 뒤진 흔적을 알아챘다는 것에서 레서 밀리나가 결벽증이든 혹은 기억력에 관한 것이든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나는 건 아니니까."

"네. 다행이네요."

마치 생각을 읽은 듯한 도진의 말에 레서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녀가 안도한 이유 또한 도진은 이미 읽어내고 있었다.

"그 기억력을 다른 데서 말하고 다니지 않았나 보군요. 경찰에도 신고하지 않았고."

"네. 그러면 더 위험해질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녀는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신고를 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소속사는 일을 키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 역시 그걸론 해결할 수 없다 생각했죠. 하지만 이렇게 불안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익명으로 의뢰를 넣었고 단서를 잡았어요."

"어떤 단서입니까."

"…존앤집스 공방에서 일하는 직원의 얼굴과 동선이에요."

중심에 이야기가 닿았다.

도진의 시선에 레서가 말을 잇는다.

"집 안에서야 흔적이 없다지만 사람인 이상 분명히 범위를 넓히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집 주변 CCTV의 영상 확보를 의뢰했고 거기서 존앤집스 공방의 직원을 찾은 거죠."

"그의 집은 나의 집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날 굳이 우리 집 근처에서 쇼핑을 했어요. 저의 물건을 뒤진 흔적이 있던 날에도 주변의 CCTV에 그의 모습이 찍힌 걸 확인했어요."

모든 날에 그가 발견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부자연스럽게 근처에 있었던 건 충분히 의심을 해 볼만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아직 내가 여기까지 알아낸 걸 몰라요. 그 직원의 얼굴도 촬영 때문에 존앤집스 공방에 들렀을 때 스쳐 본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건데 그들은 나의 기억력이 이 정도인 걸 모르죠."

'흐음.'

"그래서 그들이, 존 스미스가 왜 당신을 노리는 것인지 이유는 알고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레서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키고선 말했다.

"그 어떤 것도 짐작가는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이유를 알게 됐어요."

"함께 출연했던 배우 중에 케이트가 있었어요."

케이트는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시즌 1에서 준주연으로 출연했던 여배우였다.

본래 시즌2에서 비중이 더 올라갈 예정이었는데 그녀가 맡은 캐릭터의 인기가 생각보다 낮았고 반대로 레서 밀리나의 캐릭터가 예상 외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비중이 거의 없는 조연으로 밀려나게 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것 때문에 케이트는 저한테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싸우진 않았지만 자주 저를 노려보곤 했죠."

흔한 원한이다.

다만 그 결과만큼은, 흔하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케이트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케이트가 며칠 전, 저에게 메시지를 남겼어요."

그리고 그녀가 남긴 메시지를 레서 밀리나는 직접 휴대폰에 띄워 도진에게 보여 주었다.

- - - -

존 스미스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 있는 무기를 너에게 보낼게.

잘 써줘.

- - - -

"이게 레서 당신이 존 스미스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군요."

"네."

메시지만 보면 장난이라 하기도 힘들 만큼 얼토당토 않은 내용이다.

레서 밀리나가 겪은 일 또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수준이 높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쁜 방향으로 능력이 있는 악성팬의 행위라 하는 게 오히려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이야기는 심화된다.

"한 명이 아니었어요. 나의 주변을 파헤치는 이들은 조직적이었고 나는 나의 주변에 존앤집스와 관련된 이들이 자연스럽게 섞여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나는 그들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어요. 일개 배우가 존앤집스와 싸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무얼 원하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그들이 무얼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죠."

케이트의 문자를 받기 전 벌어진 일이었고 그래서 레서는 이유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어요. 정글 게임의 캐스팅을 수락한 건."

"그랬군요."

기실 넷비전은 레서 밀리나에게 출연 제의를 하긴 했으나 가능성은 높지 않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공의 발판이 된 드라마를 송출하는 지상파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넷비전의 제의였으니까.

"일부러 짐도 최소한으로 싸서, 대부분을 집에 두고 해외로 나간 거예요. 원하는 게 있으면 가지고 가라. 대신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그런데 그녀가 예상과 달리 흔쾌히 수락해 무슨 이유인가 싶었는데 이런 말 못 할 내막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문자를 받은 휴대폰까지도 집에 두고 새로 개통한 휴대폰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주변을 멤도는 존앤집스의 시선은 촬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됐어요. 그들이 원하는 걸, 찾지 못했다는 거죠."

레서는 이대로 가면 결국 직접적인 접촉이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몰래' 찾을 수 없다면 본인에게 묻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직접적인 접촉은 곧 직접적인 위협이다.

문자를 받은 뒤에야 케이트가 존 스미스에게 지극히 위험한 무언가를 레서에게 보냈고 그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걸 알고 난 뒤에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니 결정적으로 레서는 케이트에게 무언가를 받은 적이 없었다는 거다.

심지어 일부러 집을 비웠음에도 존 스미스는 필요한 걸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한국까지 오게 된 거예요. 다른 사람들 대신 내가 자원해서."

"그리고 나한테 도움을 청한 거군요."

"네. 맞아요. 미국에서는 어디까지 존앤집스의 영향력이 미칠지 알 수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지금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여기 왔고 그 희망대로 천마를 만나게 된 거예요."

존앤집스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 집단인지 레서 밀리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존앤집스라 해도.

이 시대에 부활한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天魔)'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기를 바라며 이곳까지 와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도움을 청하는 말에 도진은 망설임없이, 그러나 단 한 점의 의심도 필요치 않은 무게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 * * *

심상세계. 도진은 스승들에게서 전생의 정보를 구했다.

영성이 트이지 않은 전생의 도진은 설령 전생의 미래에서 존 스미스와 레서 밀리나의 정보를 보았더라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승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중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위지혁이 말했다.

"네가 위키를 뒤적이다 존앤집스 공방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의 대표란에서 존 스미스의 이름에 취소선이 그어져 있었지. 지금보다 3년 뒤였다."

취소선은 그가 더 이상 대표가 아니게 되었다는 걸 뜻한다.

이어서 장호가 말했다.

"레서 밀리나가 마약의 부작용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글을 그보다 1년 전, 그러니까 지금 기준으로 2년 뒤 네가 보았었다. 인기 연예인이었던 그녀는 마약에 손을 댔다가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됐고 급속히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미국의 기사를 인용한 글이었지."

"뉴스가 아닌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제가 본 것이군요."

"그랬다."

"그리고 존 스미스의 경우도…… 한국 뉴스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걸까요?"

"네가 다니던 공장의 직원들도, 길가의 사람들과 네가 본 어떤 매체에서도 언급한 적이 없었으니 그렇게 보아도 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일이라지만 그래도 미국의 존앤집스 공방 대표 자리에 변동이 발생한 대사건임에도 그토록 파문이 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즉, 지금 도진이 엮이게 된 레서 밀리나와 관련된 일이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크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토록 큰 사건의 여파를 억제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떠오르는 건 전생에서 소담의 죽음과 얽혀 있던 카자카미 가문과 무형독.

도진의 입꼬리가 작게, 그러나 날카로운 곡선을 그렸다.

그저 존앤집스의 두 대표간에 벌어지는 사내 권력 싸움일 수도 있다.

레서 밀리나가 거기에 운 나쁘게 얽힌 그런 정도의 일.

하지만 도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 싸움에 무형독이 스며들어 있을 거라고.

도진은 결론을 내렸고 그것은 곧 기사가 되어 퍼져 나갔다.

-[연예통] 소천마 김도진, 애쉬블론드 그녀의 보디가드가 되어 미국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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