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무림인은 초인(超人)이다.
그 성취가 낮다 해도 내공을 운용할 수 있기만 하다면 일반인을 넘어서는 운동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운동 능력을 배가하는 무공을 익히기까지 했으니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무림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으니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강원도의 무림인 교도소 또한 외관부터가 특별했다.
교도소라는 걸 조금만 주의깊게 보면 알 수 있지만 또 다른 시선으로 보면 최첨단의 반도체 공장을 연상케 하는 깔끔함과 첨단의 이미지도 있다.
제아무리 은신에 자신 있고 특화된 무공을 익히고 있다 해도 교도소를 중심으로 그늘 하나 보이지 않게 만들어 격리된 구역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 보인다.
바로 이곳에, 암산서가의 '어른'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오욕과 고통을 감내하고 희생하였던 이들.
살업(殺業)을 쌓았으나 그것을 악(惡)이라 매도할 수 없었던 이들.
나라를 위하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늘에서 헌신하였으나 버림받았던 이들.
그리하여 수많은 선처 탄원서가 밀려들었으나 기꺼이 속죄하기 위하여 묵묵히 징역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모범수로서 다른 이들은 물론이요 교도관들의 존경까지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속죄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공부하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교화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범죄자들이 시비를 걸곤 하였으나 대부분은 시선만으로도 꺾여 눈을 내리깔았다.
그야말로 이곳 교도소의 중심이 된 암산서가의 무인들.
그들에게는 2주에 한 번 면회인이 찾아오곤 했는데 이곳에 있기엔 너무나 눈부신 소녀.
비봉 서소담이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주에 한 번 교도소를 찾아오는 그녀는 지극정성이었는데 그날은 조금 더 길게, 진지한 이야기를 아버지이자 암산서가주인 서문호와 나누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는 서문호를 포함한 어른들이, 바깥의 본가에서는 서소담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이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결론을 내렸고 이내 하나로 합쳐졌으니.
"진천공, 익히기로 했어."
소담의 말에 도진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산서가가 거취를 표명하는 건 어른들이 업보를 청산한 뒤다.
그러나 그에 앞서, 암산서가는 진천공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본격적인 수련은 기말고사 뒤에 하자."
"응."
그리고 느린 듯하지만 뒤돌아보면 어느새 훌쩍 멀어져 있는 시간이 흘러 이윽고.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도진은 수많은 관심 속에서 기어코 1등을 했다.
이론 2등, 실기 1등. 종합 1등.
심지어 성적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나지윤이 이론 1등을 이번에도 사수하였고 도진은 종합 1등으로 3년 연속 1등이라는 기록을 유지은에 이어 세우게 됐다.
그리하여 받은 성적표를 도진은 학교를 찾아온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1등입니다. 회장님, 사모님."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며 건네는 아들의 1등의 성적표를 싫어할 부모는 없었다.
그것이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 숭무고의 것이라면 더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원은 '장하다, 우리 아들' 말하며 기뻐하였고 김서우 또한 무뚝뚝한 척하지만 티가 나고 만다.
그런 부모님의 기쁨을 위하여 본래 수면에 썼던 시간 중 절반을 공부로 돌린 건 너무나도 남는 투자였다.
도진은 기뻐하는 아버지에게 학사 가운을, 어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 드렸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은 날.
따로 졸업식을 하지는 않았으나 학사모를 쓰고 학사 가운을 두른 학생들이 교내를 걷는 이날이 기말고사를 치른 숭무고 3학년들의 졸업식이었다.
집행부의 멤버들이 다 모인 가운데 사진을 찍기로 했다.
"웃으세요, 아버님, 어머님!"
약리지가 싹싹한 목소리와 태도로 카메라를 들고 도진의 부모님 사진을 찍었고.
"자, 부끄러운 표정으로."
도진이 조금은 짓궂게 소담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벽태웅은 보육원의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아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몰래 눈물을 찔끔였고 도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스윽 웃었다.
집행부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 학교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주변의 관심 속에서 그들만의 졸업식을 추억으로 남겼다.
저녁에는 멤버들끼리 모여 다 함께 고기를 구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래를 막막해하고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도진의 울타리 안에 모여 넓은 세상을 기대하고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당장 2학년들이 3학년이 됐다고 빠지진 않을 거야. 신입생들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도와줄 거니까 자신있게. 알겠지?"
"네!"
"…네!"
이제 집행부에 성민혁과 성지인 단 둘이 남는 것만이 조금 신경써야 할 부분이었는데, 이쪽도 3학년이 되었다고 해서 우서진 등이 당장 손을 뗄 건 아니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럼, 오늘은 나도 술 한 잔 해볼까?"
"어? 진짜요?"
도진의 생각지 못했던 말에 약리지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반응에 도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맛이 없기는 하지만, 가끔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잖아?"
"응응! 그렇죠. 그럼 주문해요?"
"그래."
거창하게 말했지만 주문한 건 맥주와 소주였다.
흔히 말하는 '소맥'을 타서는 모두 함께 마셨다.
특별한 날이라고 해서 맛이 달라진 건 아니었기에 쓰고 맛이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더해져 몇 잔 더 마셨고 일부러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기에 조금 붕 뜬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졸업, 이구나.'
그렇게 붕 뜬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진은 되뇌이듯 졸업을 실감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무언가를 부끄럽지 않게 '졸업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
* * * *
'백수……는 아니네.'
뜬금없지만, 도진은 백수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무림고 학생들은 대부분 2학년부터 준비하여 3학년이 되자마자 사회로 나가곤 했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그런 건 아니었으니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는 명목으로 '마지막 방학'을 즐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도진이 스스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이 아니게 되었다.
즉 학생으로서의 시간에 많은 투자를 했던 도진이 이제 오롯이 천마신교의 소교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본격적으로 천마신교가 세력을 떨쳐야 할 것 같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본단의 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한 울타리 내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조율 또한 아직은 진행 중인 단계였다.
천마신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명성공방, 덴젤 공방, 웨일스 후작가 등등 무엇 하나 쟁쟁하지 않은 집단이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도진은 예상치 못하게 시간이 남았고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무얼 했는가 하면.
"여유가 생겼으니 조금 더 본격적으로 수련을 해볼까 합니다."
"……그래, 제자야.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본격적으로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빡세게 굴리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수련을 했다.
심상세계에서 위지혁과 장호에게 가르침을 구하였고 그를 통하여 얻은 바를 현실에서 구사할 수 있도록 수련했다.
현실의 경계를 넘어 신공(神功)을 구사하게 된 영역에서의 수련은 또 매일이 새로웠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수련만 한 건 아니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수련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중 한 명이 지금 눈앞에 팥빙수를 둔 유지은이다.
폭신해 보이는 오버핏의 폴라티에 무림인이기에 가능한 멋을 중시한 스커트와 다리의 라인을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도진과의 대련으로 원없이 재능을 발산하고 샤워까지 마친 뒤라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빛나 보인다.
카페 내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그녀를 마주하여 도진은 말했다.
"그새 또 발전하셨네요, 선배."
"다 후배 덕분이지."
팥빙수를 오물거리며 유지은이 시원스런 얼굴로 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성장에는 도진이 크게 기여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남게 된 도진을 유지은이 찾아와 말했다.
-후배! 약속 지켜야지!
그녀가 말한 약속은 다름 아닌 일전 공민관을 찾아가기 전 했던 약속이다.
바이러스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공민관이 어떤 수를 쓰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의도로 일부러 그것에 당한 척을 했다.
여기에 유지은 또한 협력해 주었으니 그 보답으로 도진은 시간을 할애하여 유지은과 대련을 약속했던 것이다.
유지은은 도진과 달리 진짜로 중증을 앓았으며 연구를 위해서까지도 협조해 주었으니 보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도움이었다.
연구 후 유지은의 몸속에서 날뛰던 바이러스는 도진이 직접 쓸어 주었는데 그것을 위해 그녀와도 심상의 합일을 했었다.
유지은은 '날개를 가진 천재'답게 합일의 순간 경험한 것들을 양분으로 하여 무시무시한 성장을 보여 주었다.
무언가를 보여주면 그녀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 경계의 문 너머 도진이 보고 있는 풍경마저 이해하였던 것이다.
하루하루 대련이 말 그대로 '우후죽순'처럼 쑥쑥 자라는 유지은의 재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성장을 보여 주고 있는 유지은의 눈동자에, 문득 미약한 불안이 깃들었다.
"왜 그래요, 선배."
"후배."
"네."
"나…… 너무 빠른 거 아니지?"
언뜻 들으면 뜬금없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도진은 그 이야기에 담긴 속내를 대번에 읽어냈다.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천재는 자신의 천재성을 도진이 꺼리지 않을까 불안해진 것이다.
그녀의 삶이 그러했기에.
실제로 그녀는 초절정에 오른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진과의 대련 속에서 경계의 문에 무섭도록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불합리한 속도로 뒤를 좇는 것.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피식-
하지만 도진에게는 아니었다.
"선배."
"응?"
시선을 향하는 유지은의 눈에 도진의 검지가 펴지고 좌우로 슥슥, 얄밉게 움직였다.
유지은의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가는데.
"어림도 없는 고민하지 마십쇼."
"어?"
"저는 치타이고 선배는 귀여운 댕댕이란 말입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늦었던 유지은이 이내 뿔이 솟았다.
"…너어."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그건 정말로 귀여운 댕댕이, 혹은 고양이의 토닥이는 펀치와 같았으니 도진은 하하하 웃었다.
오래 가지 않아 유지은도 억지로 만든 표정이 풀리고 활짝 웃었으니 카페 전체가 밝아진 것만 같았다.
그녀가 평생 달려도 잡혀주지 않을 사람.
도진이 누구인가를 재확인한 그녀의 미소는 그토록이나 밝았다.
그리고 주변이 수군거린다.
"개부럽다……."
"전생에 세상이라도 구했냐 김도진은."
섭음술을 이용하여 그 자리에서만 퍼지는 소리이지만 도진의 감각은 섭음술을 구사하기 위해 만든 막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여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얼마 전에도 서소담이랑 데이트하더니."
"나도, 나도 데이트하고 싶다!"
"그래. 밖에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해도 돼. 말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도진이 피식 웃는다.
"왜?"
"아뇨."
정말로 가볍게 고개를 젓는 도진을 유지은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떠올린 얼굴로 말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