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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37화 (537/741)
  • 536화

    소담에게 있어 아침 등굣길을 함께 걷는 건 도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지극히 중요한 삶의 일부분이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와 도진만의 시간.

    물론 그 시간이, 일과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소담은 더 이상 벚꽃길을 둘이서 함께 걸을 수 없는 때가 와도.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야 할 때가 와도 계속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곁에서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노력하여 걷는 속도보다 도진이 나아가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기에.

    그녀의 걸음은 도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점점 뒤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담의 굳은 심지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충실했던 노력에도 흔들리고 말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멀어지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고 소담은 소년기의 끝을 고할 기말고사가 다가오는 시기에 걱정을 드러내고 말았던 거다.

    소담의 고백에 도진은 그 걱정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제법 깊게, 그 걱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도진 또한 같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경험이 있었기에.

    전생에서의 도진도 처음부터 왕따를 당하고 극심한 괴롭힘을 당했던 건 아니었다.

    친구가 있었다.

    -오, 도진이! 여기 앉아!

    -같이 수업 듣자!

    웃으며 다가오던 또래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진의 성취가 점점 뒤쳐지고 나쁜 방향으로 눈에 띄게 되며 멀어졌던 것이다.

    그래서였다.

    도진이 제법 오래 생각해오던 일에 결론을 내린 것은.

    "속도…… 위반? 어, 어? 도진, 아?"

    도진의 선언에 소담은 그 예쁜 얼굴이 완전히 빨갛게, 사과처럼 물든 채 고장나 버렸다.

    '아.'

    그 반응에 도진 또한 실수했다 생각했다.

    하필 오늘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가 바로 그 '속도 위반', 혼전 임신을 소재로 한 오락 영화였기 때문이다.

    오락 영화로 민감한 소재를 무겁지 않고 재미있게 풀어내긴 했으나 소재가 소재였던 만큼 이 상황에서의 단어 선택으로는 실수였다.

    '하필 그 영화를 봐 가지고는.'

    도진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급히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기(氣)로 막을 펼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선 말했다.

    "…진천공이야."

    기막을 펼치고 금방 제본한 듯한 책을 건네는 도진에 소담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진천공?"

    "응. 진천대를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야."

    진천대(震天隊)는 그 이름대로 하늘을 뒤흔들기 위해 결성된 부대였다.

    하늘의 부당함에 절망하였으나 부러지지 않은 이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

    그것이 진천공(震天功)이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진천공은 천마에 의해 탄생하였으나 완성은 진천대의 염원이 시간 속에서 쌓이고 쌓여 이루어졌다고 하셨어."

    투마나 독마, 용마의 무공 등은 주인이 있었다.

    천마신교의 맥을 이은 후예들과 이미 몇이나 만나게 된 지금 혹여 후예가 나타날 수 있는 무공은 건넬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부분까지 고려하였을 때 진천공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누구 한 명의 무공이 아니다.

    천마와 함께 하길 바라는 이들의 염원과 시간이 쌓여 완성된 무공.

    그렇기에 도진은 그녀만이 아니라 자신 또한 곁에서 함께 걷길 바라는 소담에게 이 무공을 주고 싶었다.

    -암산서가는 무공의 정수를 소실했어.

    나지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암산서가가 가문의 무공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음을.

    암산서가의 잘못은 아니었다.

    왕실의 잘못이었다.

    암산서가는 처단자 가문으로 경원시되었다.

    이 태도는 왕실마저 다르지 않았으니 그들은 왕실의 가장 강력한 칼이 양날검이 아닌가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였다.

    암산서가는 본가의 무공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왕실에 저당잡혔고 혼란기에 그를 수습하지 못한 채 버려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그를 익히고 있던 당대 가주는 깨달음을 전수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고 후계자였던 소담의 아버지는 온전치 못한 무공을 최대한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공이란 천재가 세월을 거듭하여, 대를 이어 쌓아온 것.

    서문호는 자질이 나쁘지 않았고 피를 쏟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것을 당대에 온전히 다시 쌓는 건 불가능했던 거다.

    때문에 소담 또한, 아버지 이상의 재능을 가졌으나 온전치 못한 무공으로 도달한 벽을 넘지 못하고 정체하고 있었다.

    무공이란 산을 오르는 과정이다.

    다만 그 산을 오르는 길은 중간중간 끊어져 있어 다리를 놓아 가야만 했고 그 다리를 만들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 그리고 깨달음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는 선인(先人), 앞서가는 이가 다리를 놓아두었다면 그것들을 단축하고 더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결국은 다리가 없는 곳에 다다르고 마니 이때부터는 스스로의 영역이다.

    일부는.

    말도 안 되는 재능을 타고난 일부는 그 과정을 생략하곤 한다.

    인간에게 본래는 허락되지 않은, 가질 수 없는 날개를 타고난 규격 외의 천재들이 그렇다.

    이 시대엔 바로 유지은이 그런 날개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무공의 한계를 깨고 초절정의 영역에 도달하였고 이내 경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담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 또한 축복받은 재능을 타고났으나 날개를 지닐 정도는 아니었기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산을 올랐으나 다리가 끊긴 지점에 남겨지고 말았다.

    사실은 그녀의 성장 또한 유례가 없는 속도였다.

    말이 초절정이지 한 나라에 초절정은 인명록이 작성될 정도로 희소하다.

    하지만 그녀가 속한 곳이,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는 것이 천마였기에 이렇게 되었다.

    도진은.

    그런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직접 썼어. 너에게 주고 싶어서."

    "아……."

    소담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암산서가는, 더 이상 처단자 가문으로 남지 않으려 했다.

    어둠 속에 숨은 백정이 아닌 당당한 태양 아래 현판이 빛나는 가문으로 다시 태어나려 했다.

    도진은 진천공이 그런 암산서가의 마음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길 바랐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지만."

    소담은, 암산서가는 천마신교와 손을 잡았고 실질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있음에도 표면적으로는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소담을 포함한 암산서가의 모두가 문주 서문호를 포함한 어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가주는 소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소담이 거부했다.

    가문의 어른들 또한 아이들에게 미래를 맡기고 물러나려 했으나 아이들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들이 오랜 세월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오욕만을 지고 어둠 속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설령 물러난다 해도 당당하게 밝은 하늘 아래 명예롭게 자리에서 물러나길 바랐다.

    그러니까 이것은 속도 위반이었다.

    "이건 천마신교의 소천마로서 소담이 니가, 암산서가가 함께 해 주길 바라는 뜻이야."

    "원래는 가주님을 포함한 어른들이 계신 자리에서 해야 할 제안이지만…… 가끔은 속도 위반도 괜찮다고 생각해."

    "받아줬으면 해. 그리고 가주님이랑, 다른 분들이랑, 심사숙고해서 답을 들려줘."

    도진의 말에 소담의 손이 조심스레 책을 받아들었다.

    어쩐지 온기가 깃든 듯한 책 안의 글자들 하나하나에서 도진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소담은 소중하게 책을 품고서 말했다.

    "……응. 그럴게."

    * * * *

    나지윤은 심처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답청문의 문주이자 세이전의 전주로서 지금 정리하고 있는 건 무림 독감이다.

    일단 무림 독감은 종식되었다.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닌 인위적인 바이러스였고 전 세계에서 무섭게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자 금세 사그라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박의 겉껍질과 같아 지극히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 '진짜'는 이제 시작이었다.

    때문에 정리해야 할 관련 자료는 방대했다.

    평범한 이라면 총량을 다 볼 수도 없을 것이었고 설령 본다 해도 그 막대한 양만으로 질려 버릴 만큼.

    그러나 나지윤은 능숙하게 그것을 정리해 나갔고, 이내 한숨 돌리게 하는 자료를 보고선 스윽 웃었다.

    그 자료는 다른 게 아니었다.

    도진과 소담의 커플링을 지지하는 팬.

    하지만 요즘 아주 약간 변심해 버린 중년 남자.

    바로 어제 해산된 무림 독감 관리대책본부의 본부장을 역임했던 이에 대한 자료였다.

    의선약가의, 약리지의 기 치료법이 빠르게 긴급 승인 나도록 공헌한 그에 대한 자료를 나지윤은 다방면으로 정확하게 모았고 이내 재미있는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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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도권. 53세. 독신.

    연애에 지극히 흥미가 없는 '초식남'으로 가정을 이루지 않고 일에 집중하여 인정을 받아 높은 직급에 있다.

    다만 요즘 들어 타인의 달달한 연애를 통하여 대리만족하는 취미를 들였고 그에 따라 여가 시간에 소설 사이트를 즐겨 찾는다.

    근래 선호하는 건 소천마 김도진과 비봉 서소담의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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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재미있는 내용이지 않은가.

    김도진과 서소담 두 사람의 연애를 상상하는 팬은 적지 않았고 개중엔 창작욕을 불태우는 이도 있었으니 자연스레 팬픽이 성행했다.

    한데 거기에 공교롭게도 강도권이 그 팬픽을 즐겨 읽는 팬 중 한 명이어서 도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일이 잘 풀렸던 거다.

    그리고 여기에 이는 커다란 파문.

    약리지.

    김도진과 서소담의 팬픽을 쓰던 작가들 중 일부가 술렁였다.

    -요즘 도진님과 리지님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술렁술렁하네요.

    -사실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고민이 많았는데..

    -그러게요. 창작욕이 마구 치솟습니다..

    여기에 강도권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보건복지부장관 : 도진님과 리지님의 사이에 금단의 사랑이 싹트고 역경을 함께 헤쳐나가는 중에 더 애뜻해져서.. 그 관계를 소담님이 아시게 되고.. 상상만으로도 버티기 힘드네요.

    그런 닉네임으로.

    댓글을 보고 나지윤은 푸핫,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런 흐름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 서소담도 알고 있었다는 거다.

    이건 절대로 지켜야 할, 나지윤이 본인의 입으론 예외가 발생하지 않는 한 말해서는 안 될 정보다.

    소담 또한 그런 자신과 도진의 관계를 상상하는 팬픽을 몰래몰래 읽던 독자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그녀가 품고 있던 고민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다행히 소담의 고민은 잘 해소되었다.

    '우리 무적 완벽한 교주님이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나지윤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나지윤이 중점적으로 신경써야 할 것은.

    '무림대회(武林大會).'

    내년에 열리는 무림대회는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전 세계 규모로 열리는 진짜 무림대회 시즌이었다.

    그리고 이 진짜 무림대회에서.

    천마신교는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일말의 걱정도 고민도 나지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생각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자신이 믿는 교주님, 소천마 김도진이 무대를 다 씹어먹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자, 누구부터 시작해 볼까?'

    나지윤의 두 눈이 메스보다 푸르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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