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전생에서는 동전 노래방에 갈 수 없었다.
물질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함께 갈 이가 없었으며 그렇기에 굳이 이유를, 시간을 만들어서 가야 할 당위성 또한 없었다.
그래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담과 함께.
생애 처음으로 동전 노래방이란 곳에 왔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불러 보았다.
처음이니까 어색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낯섦이었고 그것은 곧 즐거움이 되었다.
함께 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번갈아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서로를 응시하기도 하고 신나는 노래에 노래방 탬버린을 흔들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인싸'들이 어떻게 노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재밌었어."
"응."
도진은 충분히 재밌었다고 생각했고 소담 또한 볼이 발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전 노래방을 나오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시간으로는 6시가 조금 넘은 때였지만 겨울이다 보니 낮이 짧은 것이다.
"노래도 열심히 불렀으니까…… 저녁 먹으러 갈까?"
"응. 어디 갈 거야?"
소담의 물음에 도진이 생각해 두었던 장소를 말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한 번 가보지 않을래?"
"패밀리 레스토랑?"
"어. 한 번 가보고 싶었거든."
"…응. 좋아."
패밀리 레스토랑.
이쪽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현생에서도 밀도 높은 삶을 살면서 겹치는 때가 없었다 보니 갈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번 가보기로 했고 소담도 동의해 주었다.
2층짜리 넓고 커다란 건물에 인상적인 간판이 걸린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카운터에서 인당 삼만사천구백 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입장하니 온갖 음식 냄새가 깔끔하고 넓은 실내에 가득 차 있었다.
"진짜 크네."
"응."
낯선 장소였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혼자도 아니고 둘이니까 괜찮다.
그리고 오는 사이에 '예습'을 해 왔다.
자리는 자율.
음식은 샐러드 바부터 시작하여 접시를 들고 자유롭게 덜어서 오면 된다.
중요한 건 맛있어 보인다고 그것만 엄청 덜면 다른 걸 못 먹게 되니 주의할 것.
그리고 빵 같은 건 빠르게 배가 차게 만드니 먹지 않거나 후식으로 조금만 먹을 것 등등.
주의 사항을 새기며 음식을 덜어 만났다.
도진의 시선이 소담의 접시로 향한다.
"너무 적게 가져온 거 아니야?"
"그런가?"
소담은 정말로 조금, 그러나 다양하게 퍼 왔다.
도진이 고기 위주로 듬뿍 퍼온 것과 대비된다.
도진은 씨익 웃었다.
"소담이는 이슬만 먹고 사니까. 그 정도면 되겠지."
"무, 무슨 소리야아."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하하 웃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담이 옳았다.
한 입이 다섯 번만 돼도 적지 않은 양.
적은가 싶은 수준이 딱이었으며 그것보다 조금 더 적어도 됐다.
도진의 경우엔 그러니까 정말로 많이 퍼 온 거긴 했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도진이 정말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과식하는 거 아니지?"
"괜찮아. 자기 전에 운동하면 되니까."
사실은 약간 과식이었지만 정말로 괜찮다.
연신극기공의 수련은 에너지를 블랙홀에 넣어 버리는 것처럼 해결해 주니까.
"아, 맞다."
"응?"
음식을 먹던 중 도진이 잊고 있던 걸 떠올린 얼굴이 되자 소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인증 사진 안 찍어서."
"그렇구나."
"아쉽다. 동전 노래방 때 떠올렸어야 했는데."
도진은 정말 아쉬워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소담이 테이블 위를 빠르게 살피며 정리했다.
"찍으려면 예쁘게 찍어야 하니까."
"그래."
테이블을 간단히 정리하고 도진이 팔을 쭉 뻗었다.
테이블의 일부와 소담, 그리고 자신이 나오도록 구도를 잡는 과정에서 소담이 움찔움찔하는 것이 귀엽다 생각하며.
찰칵-!
몇 컷을 찍었다.
"SNS에 올려도 돼?"
"응."
작은 이벤트를 끝내고 식사를 마쳤다.
"아이스크림도 먹을까?"
"…나 살찌는 거 아니겠지?"
"어디가서 그런 말하면 흉본다."
"헤헤."
그리고 후식.
도진은 실력을 발휘하여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을 콘 위에 3단으로 쌓아 주었다.
서로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왔다.
번화가는 이제서야 시작이라는 듯 사람들로 가득했고 흥얼거리는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둘에게 압도적으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회의 분위기와 은연중 흘러나오는 도진의 기세가 시선 이상의 것이 접근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제 어디 갈 거야?"
"소담이 니가 가고 싶은 곳?"
"아."
도진의 대답에 소담이 고민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천천히 함께 걸으며 도진은 기다려 주었고 이내 소담이 무언가를 떠올리고서 말했다.
"영화."
"영화?"
"응. 영화관 가 보고 싶어."
"오케이! 그럼 영화관으로 가자."
그렇게 다음 코스는 영화관이 되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영화관조차 처음이어서 조금 헤맸지만 훌륭히 표를 예매하고 커다란 팝콘과 콜라를 들고 상영관을 잘 찾아갔다.
서로의 사이에 팝콘 통을 두고 손이 오가는 상황에 소담은 어두운 상영관 내에서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콩닥였지만.
"……."
아쉽게도 손이 스치는 이벤트는, 경지에 오른 두 사람에게는 발생할 수가 없었다.
소담 내면의 악마가 '콱 손 잡으라고!' 소리쳤지만 부끄럼의 천사가 '부끄러운 거 안 돼!'라고 소리친 탓에 실행하지 못했다.
아주 조금 불만에 찬 채, 하지만 벌써부터 기준치 초과의 '도진 성분'으로 붕 뜬 상태로 영화관을 나왔다.
영화가 제법 길었던 탓에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이었다.
"다음은…… 피시방 가 볼까?"
"피시방?"
예상치 못했던 선택지에 소담이 되물었다.
"응. 간식 먹으면서 같이 게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
"응. 가 보자."
도진의 제안에 따라 피시방으로 향했다.
소담이 보았던 '아주 오래된 이미지'와 달리 피시방은 어두컴컴하지 않았고 더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화려한 RGB가 깔끔한 인테리어와 잘 조화된, 그리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카페 같은 곳이었다.
"……."
"……!!"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미성년자도 없어 조용한 가운데 도진과 소담을 발견한 이들의 동요가 퍼져 나간다.
"어, 어서 오세요."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소담을 보고선 반쯤 넋이 나가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도진의 놀러가자는 말에 '기, 기숙사 잠깐 들렸다 가자!' 외치고선 약 한 시간을 공을 들여 꾸민 '외출(데이트)하는 소담' 스킨의 위력은 그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뭐 할 거야?"
"글쎄. 음……."
도진은 잠시 고민했다.
본래 생각했던 건 여기서 생방송을 켜서, 시청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가지를 체험해 볼까 했던 건데 막상 때가 되자 다른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이 시간을 온전히 둘 만의 시간으로 보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짧은 침묵 사이에 도진은 그쪽을 택하고서 말했다.
"이거 해 보자."
전생에서의 기억을 살렸다.
아기자기한 아케이드 게임 위주로.
쉽게 플레이 할 수 있는 자동차 게임, 둘이서 할 수 있는 협동 게임이나 소위 말하는 커플 게임 등을 찾아서 했다.
완성도와 깊이가 부족한 게임들이었지만 그렇기에 짧은 시간 동안 즐기기엔 더 좋았다.
"햄버거 먹어볼까?"
"응."
햄버거에 떡볶이, 볶음밥, 라면까지 주문해 게임을 하면서 먹었다.
-님들 그거 앎? 데이트하면서 깨볶으면 볶은 깨만큼 살이 찐대.
-?뭔개소리야?
-아니 저거 진짜임 ㅋㅋ 데이트하면 존나 먹거든..
소담은 먹으면서 문득 그런 댓글들을 떠올렸고, 오늘 밤에는 정말 열심히 수련해야겠다 생각했다.
"재밌었어."
"응."
그와 별개로 피시방에서의 시간 또한 즐거웠다.
신나게 이것저것 즐기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날이 바뀌어 새벽이 되었다.
즐거운 시간은 그 즐거움에 비례하여 빨라진다더니 사실이었다.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었고 소담은 아쉬운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소담에게 도진이 말했다.
"카페 갈까?"
"…응."
소담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번화가인만큼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뭐 먹을까?"
"도진이가 먹는 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의 커피 주문은 아싸에게 있어선 너무나 어려운, 대마법의 캐스팅에 준하는 난이도였다.
다행히 도진은 일전 성지인의 자존심 뿜뿜 작전 과정에서 어느 정도 지식을 쌓았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앱을 통하여 주문을 해도 됐지만 일부러 카운터의 알바생에게 주문했고 잠시 기다려 캐러멜 마끼아또를 한 잔씩 들고 가장 윗층으로 올라갔다.
"컵이 엄청 크네."
"그러게. 비싼 만큼 많이 주네."
한 잔에 7200원.
전생에서는 엄두도 못낼 가격이며 그때의 기억이 있기에 현생에서도 비싸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제아무리 소담의 손에 들린 컵이 엄청나게 크게 보이며 실제로 크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뭐, 오늘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쪼오옥.
빨대를 물고 귀엽게 음료를 당기는 소담의 모습만으로도 그 가치는 차고 넘쳤으니까.
여기에 옆의 유리벽을 통하여 내려다 보는 새벽 거리의 풍광도 나쁘지 않았다.
"엄청 놀았네."
"응."
"고마워."
"어, 뭐가?"
"같이 놀아줘서."
"어, 음. 그건……."
소담이 입술을 우물거린다.
사실 놀아줘서 고마운 건 나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진은 소담을 보며 웃었다.
"처음이었거든."
"처음?"
"어. 동전 노래방에 간 것도,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것도, 이렇게 새벽에 카페에 앉아서 비싼 커피를 먹는 것도."
"그리고 시험 기간에 공부 안하고 이렇게 일탈을 하는 것도 말야."
"아……."
소담의 얼굴이 아주 잠깐, 멍해졌다.
그리고 웃었다. 기쁜 얼굴로.
"그렇구나……. 응, 그렇네. 처음이었구나. 나도 그랬어."
"그래? 그러면 우리는 꽤 많은 처음을 같이 한 거네."
"응. 맞아."
순수한 얼굴로 기쁘게 웃는 소담의 얼굴에는, 그동안 묻어났던 어두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얗게 웃는 얼굴 가득한 기쁨에 다 지워진 것처럼.
그렇게 웃는 얼굴로 잠시간 말없이 캐러멜 마끼아또를 마시다 소담이 말했다.
"사실은, 고민이 있었어."
도진은 소담의 이야기를 조용히, 그러나 눈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계속 함께 걷고 싶었어.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저 등굣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났고, 더 많은 곳을, 더 오래, 가능하면 계속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 수련했다.
소담이 가장 잘 하는 것은 무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으로 도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가장 강한 원동력으로 소담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게 밀어 주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요즘, 상당히 흔들리고 말았다.
벽에 막혔다.
조급해서는 안 되고 그로 인해 시야가 좁아져서도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도진이 계속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알면서도 감정이 잘 조절되지가 않았다.
거기에 약리지와의 모습이었다.
심상의 합일.
그리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도진의 곁에서 도움이 되는 약리지가.
소담을 크게 흔들고 만 것이다.
내가 과연, 도진이의 곁에서 계속 함께 걸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머지 않아 등굣길을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을 수 없게 되는 시기에 소담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보여주기 힘들었을 감정을.
소담은 용기내어 '처음'을 나눈 자리에서 풀어놓았다.
도진은 그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소담아."
"응?"
"우리, 한 번 속도 위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