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그것은 마치 유명한 반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소천마로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독에 중독된 좋지 않은 몸 상태로도 두 발로 걷던 도진.
허나 그렇기에 더욱 극명하게, 미약하다 해도 평소와 다른 몸 상태라고 인지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비봉 서소담과 약봉 약리지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던 도진이 타인의 시선이 차단되는 개인 격리실에 들어서 세 걸음을 걷자.
"오케이."
거짓말처럼 중독되었던 모습이 사라지고 평소의 도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소담과 약리지는 놀라지 않았다.
약리지는 지금껏 도진과 함께 하며, 심상의 합일을 말 그대로 밥먹듯 하며 도진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담 또한 약리지가 중증 환자의 치료에 관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진이 직접 중증 환자가 되어 주고 회복하는 걸 봐 왔기에, 그리고 그동안 도진의 곁에서 함께 하며 쌓은 신뢰가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쉬다 갈까?"
"응!"
"네!"
도진은 침상에 앉아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세우고 결행하여 하룻밤만에 승부가 났다.
겉으로 보면, 그리고 무형독의 입장에서 보면 도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무형독은 몸통이 잡히지 않았지만 몸을 빼기 전에 아주 거하게 명치에 펀치가 때려박힌 꼴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도진이 때려박은 건 단순한 펀치가 아니었다.
* * * *
"……."
-…….
-…….
무형독을 부리는 '회(會)'의 모임.
한유성과 태무진, 카자카미 노보루를 포함하여 오랜만에 대부분의 수뇌부가 참석하였으나 누구 한 명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아 침묵이 쌓이고 있었다.
그만큼 분위기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충격! 무형독의 독은 금화에도 침투해 있었다!
-무림 독감은 무형독의 바이러스 테러.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여…….
-금화 바이오로직스, 바이러스 테러의 진원지였다!
말 그대로 전 세계가 충격에 술렁였다.
자연재해인 줄 알았던 전염병이, 무형독이 전 세계 단위로 일으킨 바이러스 테러라는 게 드러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아주 어렵게 되었군.
교양이 묻어나는 누군가의 말이었다.
부드러운 말이었으나 내용이 결코 그렇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림 독감은, 세계를 대상으로 한 그들의 계획에서 한 축을 담당해 주어야만 하는 수단이었다.
그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도록 개량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실험'이 이번 일이었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 버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아득할 정도로, 거대한 계획의 주춧돌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전염병을 인위적으로 퍼뜨려 자금과 인력의 소모를 최소화한 채 세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를 위해서는 전염병이 순수하게 자연재해라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으니 결코 바이러스 테러라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됐다는 말이다.
이로써,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
이제 전염병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무형독을 의심할 것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촉각이 곤두설 것이고 그로 인해 무형독의 운신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무형독에 대한 사람들의 적대감과 경계심이 폭증하였다.
기실 무형독은 빌런이되 '너무 거대한 빌런'이라 평범한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무언가 사건이 터져도 TV 너머로 접하는 존재이지 생활과 관련되어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된 게 아니라 무형독이 그렇게 되도록 의도했다.
한데 이게 이번 사건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할 피해 또한, 감히 산정하기 힘들다.
약리지와 구약정의 지하철에서의 마찰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관자로 있을 때와 간접적으로라도 개입할 때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당장 발생한 손해 또한 아득하다.
무림 독감을 퍼뜨리기 위하여 전 세계에 공들여 만들어 둔, 앞으로도 오래 활용해야 했던 '실험실'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시설을 폐쇄하고 자료를 소각하고 침투시켜 둔 인력을 빼냈다.
구축하는 건 십 년이 넘게 걸렸는데 잃는 건 단 하룻밤.
일이란 게 본래 그렇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번은 정말 뼈아팠다.
특히 이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던 금군(金君) 한유성의 표정이 무시무시하다.
한국의 무림 독감을 퍼뜨리기 위한 거점이 금화 바이오로직스 제 3공장이었다.
그리고 제 3공장은 몇 안 되는 위치가 들통난 거점이자 압수 수색까지 당한 곳이기도 했다.
요원은 물론이요 자원 하나 건지지 못했다.
그뿐인가.
한유성이 직접 기자 회견장에서 고개를 숙이기까지 해야 했다.
"저의 불찰로 무형독에 침탈당한 부분이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 사죄드립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것이 얼마나 큰 굴욕이었는지, 한유성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폭발할 것 같은 화가 가슴에서 들끓었다.
-금화 그룹, 무림 독감으로 피해입은 환자들을 위하여 30억 쾌척!
사죄의 표시로 30억을 내놓았다.
-여윽시 금화다. 화끈하네.
-그렇지. 사죄는 말만이 아니라 돈으로 해야지 ㅋㅋ
금화에게는 큰 돈이 아니었으나 객관적으로는 충분히 큰 돈이었고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었지만.
-그런데 금화도 별 수 없네. 무형독은 못 이기나벼.
-그러게. 공장 하나가 통째로 털렸는데 그걸 모르네 ㅋㅋㅋ
-어디는 왕실도 털렸는데 금화가 공장 하나 털린 거야 일도 아니지.
-아 공장 하나만 뺏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ㅋㅋㅋ
한유성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무형독이 내가 수뇌부로 있는 조직이 부리는 것이다.
털린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의도한 게 나란 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회와는 별개로 금화는 오롯한 그의 제국.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정점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제국의 절대성이 훼손되고 그 얼굴인 자신이 조롱받는 상황은 그의 심기를 끝도 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심기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기에 괜히 싸우기 싫어 회의 수뇌부들은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용한 가운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선(武線)이었다.
-이번에 큰 손해를 보았군요.
"…뻔한 소리는 하지 말지."
느긋한 목소리에 심기 불편한 한유성이 씹어뱉었다.
그는 이번 일로 무선을 포함한 '그들'에게 제법 감정이 상했다.
'병신 같은 원주민 놈들…….'
무선은 그런 한유성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럼 바로 상황을 짚어보도록 하지요.
-바이러스를 이용한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많이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게 되겠지만, 포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보려 합니다.
-밀고 나가겠다고?
수뇌부 중 한 명의 말에 무선이 긍정했다.
-예. 포기하기엔 여전히 실보다 득이 크다는 판단입니다. 공가(公家)에 그가 남긴 자료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계속 연구를 지원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건 포기하기 아깝지.
-대부분의 인력과 자원을 회수했고 압수 수색을 당한 한국의 공장 역시 자료만큼은 소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화경의 고수, 한국의 이단 집단의 수괴에게도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하였으니 여전히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
-이번 금군께서 입으신 피해에 관해서는 회의 차원에서 모두 보전해 드리겠습니다.
"흥."
한유성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손해의 보전이야 당연히, 원래 하던 것이었으니까.
그가 원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손해까지 감수하게 만든 김도진. 그놈은 여전히 건드리지 않을 생각인가?"
그의 발언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번의 일은 확실히 그들도 선을 넘었다 생각했다.
그동안이야 피해가 한국에 집중되었고 그 외엔 카자카미 노보루 정도가 얽혀 있었지만 이번 일은 그들에게도 손해가 발생했으니까.
무선은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
-그렇군요. 시간을 두고 접근하려 했습니다만, 어느 정도는. 여러분들의 분노를 감당하게 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들은 아주 거대한 영역에서 일을 벌이기에 사소한 것은 틀어져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반대로, 그렇기에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거대한 것이 무너지는 것 또한 크게 경계하였다.
그동안 적지 않은 손해를 끼친 김도진과의 충돌을 최소화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은 아무래도 그렇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리 판단한 무선의 선언에 한유성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 * * *
"놈들은 자료가 완전히 소각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을 겁니다."
천마신교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나지윤이 말했다. 회의 판단과 완전히 반대되는 발언이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그 자료가 온전히 넘어왔을 거라곤 꿈에도 모르겠죠."
발언하는 나지윤의 옆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슈퍼 컴퓨터엔 무형독이, 공민관이 분명히 소각했어야 할 자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꼬리를 잡은 순간 즉시 행동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봄으로써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 꼬리란 다름 아닌 공민관.
그를 주시함으로써 구약정을 이용하였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고 금화 바이오로직스와의 접점도 잡아냈다.
바이러스를 대번에 심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었고 그것을 터뜨리는 걸 잡아내지 못한 건 실책이었으나 그 사이 금화 바이오로직스의 컴퓨터에 침투하여 공작을 벌일 수 있었다.
단순히 자료를 빼내고 삭제해 버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료를 소각했다 믿게 만들었다.
그를 위해 자료 소각을 위한 찰나의 틈을 벌고자 중년인이 공민관의 앞으로 나서는 순간을 방치했다. 자연스럽게.
그로써 자료가 넘어가지 않았고 성과를 오롯이 빼냈다 믿게 만들었으니 그로 인해 발생하는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바이러스가 도진에게도 통한다는 믿음을 심어준 것.
독을 넘어 바이러스마저 이치를 깨달은 도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바이러스를 억누르지 않고 퍼지게 만들어 그것이 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실 유지은과 함께 평범한 정의검가의 무인으로 변장하여 공민관의 집을 찾았을 때부터.
그가 내민 바이러스 덩어리 차를 그냥 마셨을 때도 즉시 해독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무흔잠영의 이치로 모자와 마스크만으로 스스로를 감추었고 공민관이 도망칠 때 그야말로 귀신처럼 기척없이 뒤를 따라가 안가마저 잡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도진을 모른다.
오직 '기 치료'라는 한정적인 수단만으로 바이러스를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서의 자료와 이것이 더해짐으로써 무형독에 퍼지는 건 그저 그때에 아프고 마는,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고통만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이름과 같은.
'무형의 독'이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