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수고했어."
"네, 선배두요."
치료법의 긴급 승인이 이루어지고 약리지가 치료한 중증 환자도 스물을 넘게 되었다.
오늘도 약리지는 옷은 물론이요 머리카락까지 땀에 젖어 그 새하얀 얼굴이 더욱 돋보이는 모습이다.
기 치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래라면 약리지가 지금의 경지에서 결코 볼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우주'를 인지하고 그 안에서 정밀한 작업을 해야 했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흔히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 하는데 그 단계마저 넘어 우주로 인식하는 것이 어찌 간단할까.
심상의 합일로 인식을 확장하고 도진이 보는 것을 함께 보는 방식에 치료를 위한 운용에도 백업을 받고 있지만 바이러스의 제거만큼은 오롯이 스스로 행해야 했으니 가해지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할 때 육체에 가해지는 부담을 정신 쪽으로 치환하면 비슷할 것이다.
그런 치료를 무려 하루에 세 번 하고 있으니 제아무리 경지에 이른 무림인이라 해도 회복이 따라갈 수가 없다.
"잠깐 눈 붙일래?"
"네. 안마해 주세요."
"그래."
때문에 약리지는 틈이 나면 운기조식만이 아닌 순수한 수면으로 체력을 회복하곤 했는데 툭, 도진의 어깨에 기대어 자투리 시간에 졸거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리에 누워 눈을 붙이곤 했다.
이때 도진이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피로 회복을 촉진했으니 약리지는 이것이 어리광이자 선배에게 부담을 준다 생각하면서도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선배."
"아직 우리 후배는 어리니까 안 미안해 해도 돼."
"으……. 분하지만 지금은 어린애 하고 싶네요."
도진은 그런 약리지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솔직히 도진에게도 치료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부담이 되거나 힘든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모든 게 수련이자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한 도진은 이 정도로 퍼지지 않으며 인간을 우주로 인식하는 깨달음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경험은 또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경험이자 수련이 되어 주었다.
좋은 일을 하며 스스로에 대한 도움도 되고 있으니 정신적으로 피곤을 더할 이유가 없다.
약리지 또한 그런 이유로 이 강행군을 일주일 넘게 계속할 수 있었다.
본래의 약리지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정밀한 작업.
그것은 당연히 약리지의 성장을 촉진하는 '수련'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인생의 경험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성장까지 시너지를 일으켜 약리지는 한 차원 높은 영역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빠른 속도로 오르는 중이다.
게임 식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큰 소모가 계속되고 있지만 레벨업을 통한 회복으로 커버를 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 식으로, 세상이 극찬하고 있는 약리지의 노력과 천마신교의 백업으로 무림 독감은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보았을 때 사실 무림 독감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심각한 전염병으로 알려졌고 그로 인해 중증에 이르러 사망자까지 나왔지만 '내 주변의 일'이 아닌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사망자가 500명이 넘지 않았고 그나마도 의료 시스템과 교육이 부족한 후진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기에 경증의 경우 시간이 지나며 기존의 약들로 제어가 가능한 병이 되면서 결국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던 것이 전생에서의 무림 독감이었다.
현생에서도 비슷한 흐름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전생보다 조금 더 규모가 커졌고 중증 환자가 늘긴 했으나 경증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약들로 제어하는 과정에 있었고 중증은 전생과 달리 치료법이 나옴으로써 치료가 가능해졌다.
이대로, 무림 독감은 정복될 것 같았다.
'이게 무형독의 수작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이제 도진은 안다.
무림 독감은 시작이자 '밑작업'일 뿐이었다는 걸.
미래에 있을 두 번의 유행, 특히나 세 번째의 대유행은 세계에 치명적이었다.
단순한 전염병의 유행에 그치지 않고 경제는 물론이요 인류의 삶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무형독이 일으킨 인위적인 테러였다는 걸 안 이상 단기적인 처방에 그치지 않고 더 멀리 보아야 했다.
무형독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항시 경계하고 추론해야만 한다.
그리고.
'받은 거 이상으로 돌려줘야지.'
무형독이 일으킨 무림 독감의 유행은 도진의 주변, 울타리 안에 피해를 끼쳤다.
몇 배 이상으로 돌려주지 않고 넘어갈 수야 없지 않은가.
이제 돌려줄 시간이었다.
* * * *
해가 짧아지는 시기.
그러나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오후의 골목을 걷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마스크에 후드까지 써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언뜻 드러나는 굴곡과 눈매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끄는 특별한 아우라가 깃든 여성.
그리고 또 한 명은 마찬가지로 마스크와 후드로 얼굴을 가렸으며 체격이 준수하지만 여성의 옆에서는 그 존재감이 지극히 옅어지는 남성이다.
검을 휴대하고 있는 것과 밸런스가 잡힌 체격에서 그들이 무림인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로에서 뻗은 골목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그리 좋지 않은 입지에 자리한 3층짜리 작은 상가 건물 앞에 섰다.
2층 창문 아래 '굿패스 경찰학원'이라 쓰인 낡은 간판이 눈에 띄는 그곳은 다름 아닌 구약정이 다니던, 공민관이 원장으로 있는 경찰 공무원 준비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원이었다.
정보로는 특별할 게 하나 없는, 그야말로 무난하기 짝이 없는 학원으로 원장이 한국에 무림 독감을 퍼뜨린 원인 중 한 명으로 지목되면서 원생들이 다 빠져 나갔다고 들었다.
여기에 여론을 의식하여 원장이 2주 넘게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둘은 그 상가 건물의 3층에 올라 벨을 눌렀다.
띵- 동-
벨을 누르고 조금 기다리자 문 안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십니까."
그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공민관 님. 정의검가의 유지은입니다."
"……."
안쪽에서 집주인인 공민관이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정의검가의 검봉이 벨을 눌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지은 씨께서 갑자기 여긴 왜……."
"다른 게 아니라, 이번 무림 독감 건과 관련해서 꼭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여성, 유지은의 답에 공민관은 잠시 침묵하고서 말했다.
"이제와서 저한테 무슨 들으실 게 있다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일이라서요."
"……."
이번의 침묵은 앞서보다 길었다.
고민하고 있다는 걸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이내.
달칵.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공민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흘긋, 공민관이 두 사람을 훑는다.
유지은과 별다른 특징이 없는 사내.
단둘이 왔으나 그러니까 별일 아니라 생각하기에는 이 방문 자체가 별일이다.
검봉 유지은은 젊은 나이이나 무림에서 이미 나이를 초월한 위치에 있었다.
만약 소천마 김도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유지은이 있었을 만큼 특별한 무림인.
그런 무림인이 공민관을 찾아온 이유가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출한 주방 겸 거실에 들어서니 가장자리에 박스가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사 가시는 건가요?"
유지은의 물음에 공민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서 지내봐야 욕밖에 더 먹겠습니까. 어차피 학원도 정리할까 싶었는데 이 기회에 시골이나 가볼까 싶습니다. 아, 차 드시겠습니까? 인스턴트 녹차밖에 없긴 한데."
"네. 그럼 그것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물이 끓고 티백을 넣는 동안 미묘한 침묵이 내렸다.
그렇게 쌓인 침묵을 깬 건, 유지은이었다.
"공민관 님."
"예."
"왜 무형독에 협력하시는 건가요?"
"……."
깨진 침묵이 마치 얼음으로 이루어진 유리조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것이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다시 얼어붙어 일대를 채웠다.
공민관은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유지은의 눈을 통하여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구약정 씨에게 바이러스를 고의로 옮겼잖아요. 그리고 격리되어 함께 있는 동안 구약정 씨를 교묘하게 다시 무너뜨리려 시도한 걸 알아요."
"……."
자신을 비난하는 이를 대신 비난하여 준다.
그 비난에 교묘하게, 상대의 마음을 의도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키워드를 섞는다.
그것은 이미 한 번 성공했던 수작.
약리지와 처음 만났을 때의, 구약정이 모든 걸 팽개치고 그런 인간이 되었던 것조차 그러니까 공민관이 원인이었다는 말이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여러가지 위장을 한 건 좋았지만, 결국 한국에서의 근원이 당신이라는 건 팩트였으니까요. 조사하다 보면 나오는 거죠."
"……."
공민관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저것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유지은 정도 되는 인간이 공민관이 원하는 정보를 줄 리가 만무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걸 물었다.
"그래서, 나를 잡으러 온 겁니까?"
"네. 가능하면 진술이 가능한 상태로 생포하려구요."
"…상당한 대비를 했겠군요."
"맞아요. 당신이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요."
공민관은, 결코 고수가 아니었다.
A-3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고 경찰 공무원 공부를 했던 경험을 살려 젊은 나이에 학원을 차렸고 지금에 이르렀다.
학원을 꾸리기 바빠 수련에 소홀했고 그 결과 A-3, 일류의 경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달리고 있는 유지은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여 준비할 리가 없다는 걸, 공민관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무형독의 일원이라 판단했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굳이 이렇게, 대화를 길게 끌었다.
"하악!"
"……."
유지은이 고통이 그득 담긴 호흡을 힘들게 뱉어냈다.
옆에 있던 남성 또한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공민관은 그 상황에서 굳이 삼류 소설의 악당마냥 지껄이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쳐 현관문을 쾅, 닫고 달려나갔다.
최대한 빠르게 1층의 비밀통로로 이어지는 2층의 비밀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문을 잠갔다.
화경에 이른 무인의 검기가 아니고서야 자를 수 없는 두터운 철문이 맞물리고 공민관은 어두운 비밀 통로를 달렸다.
A-3의 무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그의 보법이 예사롭지 않았다.
약 20분 가량을 달려 그는 통로의 끝에 다다랐고 대기하고 있던 양복 차림의 중년인에게 말했다.
"갑(甲)급 사태입니다."
"……."
공민관의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굳었다.
갑급이라는 건 최고 단계의 사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모든 자료를 폐기하고 여의치 않다면 관련자들 모두가 자결해야만 하는.
그러나 중년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기실 공민관이 신호를 먼저 보내고 중년인을 찾아온 데서부터 예상하고 있었기에 마음의 준비까지 마친 것이다.
하지만.
"갑급 사태가 뭔데?"
"……!!"
"……!!"
그렇게 미리 준비를 마쳤음에도 그들은 한 발 늦고 말았으니.
"…소천, 마!!"
그들의 뒤에 어느새, 소천마 김도진이 땅에서 솟은 것처럼 웃으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 꼬리 잡기 놀이 한 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