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약리지는 봉황의 별호를 얻은 후기지수답게 빠르게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자 제법 기운을 되찾았고 이틀이 지나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을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도진은 그런 약리지를 만나기 위해 병동을 방문했다.
"선배!"
약속 장소인 개인 격리 구역에 방문하자 약리지가 활짝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랗고 새하얀 사모예드가 꼬리를 흔드는 듯 하여 도진은 스윽 웃었다.
"꽤 쌩쌩해졌네?"
"네! 선배 덕분에요!"
만면으로 웃으며 답하는 약리지의 태도는 전과 같아 보이지만 본질적인 부분에서 깊이가 달라졌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도진과의 '합일(合一)'.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경험이 약리지가 도진을 더욱 특별하게 여기도록 만든 것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이미 그 전에 한유아와의 경험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한유아가 철저하게 걸어 잠그고 있던 마음의 문이 작게나마 열렸음을 도진은 그녀의 미묘하게 바뀐 태도와 분위기로 알았다.
속내를 결코 드러내지 않던 그녀와 무려 심상의 합일을 경험했으니 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이 있었기에, 도진은 한유아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연을 쌓아나갈 수 있었고 지금의 관계에 이를 수 있었다.
약리지도 같은 선상의 경우였다.
다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으니 약리지는 한유아와 달리 감추는 것 없이 도진에 대한 호감을 팍팍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애들은 다르네.'
도진은 아재답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온전히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감정이었다.
이렇게나 귀여운 후배가 사모예드가 꼬리를 붕붕 흔드는 것처럼 호감을 표시하고 있으니 싫을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도진 또한 싱긋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음! 맞아요. 그 맛이에요."
"그래? 다행이네."
도진이 사 온 고구마죽을 먹으며 약리지가 행복해 한다.
처음 병문안을 갔을 때 먹었던 그 고구마죽을 다시 먹고 싶다고 해서 사왔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니 보람이 크다.
"건강이 무엇보다 큰 보물이란 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이렇게 엄청 아프고 나서야 진짜로 알게 된 거 같아요."
"애기 같던 우리 후배도 이제서야 좀 자란 거 같네. 아프니까 청춘이다?"
"우우. 전 그 말 동의 안해요."
"하하. 사실은 나도 그래."
슬쩍 장난도 쳐 가면서.
부드럽고 가벼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마냥 계속할 수는 없었으니 일견 하얗게 웃고 있는 것 같은 약리지의 눈동자 속에 까만 수심이 묻어나고 있는 걸 도진이 계속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예쁜 후배는 무얼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걸까?"
"…헤헤. 역시 선배는 못 속이네요."
"우리 사이에 속일 필요도 없지?"
"응, 그렇네요."
약리지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속에 있던 것을 털어 놓는다.
"저는 나았는데, 그 외에 다른 아픈 것들은 전혀 낫지가 않았잖아요. 그래서 저도 다 낫지 않은 거 같아요."
그 말대로였다.
약리지는 도진의 치료 덕분에 완치되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완쾌할 것이었고 다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약리지의 주변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요 이틀 사이 중증 환자는 전국에 열다섯 명이 늘었고 경증 환자는 세자릿수 이상 증가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많이 아프시고…… 구약정 씨도 중환자실로 격리되었어요."
증가한 중증 환자 목록 안에는 구약정이 있었고 그 전부터 중증 환자였던 노신사의 증세는 좋았다가 나빠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생보다 유행이 심해졌어.'
그 인과 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도진이라는 변수가 있었기에 무림 독감은 전생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생에서 무림 독감은 '남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TV 속에서나 심각함을 떠들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 정도의 유행.
하지만 그것이 조금 더 심각해졌고 조금 더 길게 이어지게 됐다.
숭무고만 해도 휴교가 일주일로 늘었다.
이런 식으로 사태가 더 심각해진 만큼.
-진짜 그 패륜남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런 새끼 인권도 챙겨주니까 세상이 이 꼴 나는 거지.
-그 새끼 정의구현하는 너튜버 어디 없나 ㅋㅋㅋ
구약정과 공민관 등에 대한 비난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주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밀접한 세대인 약리지가 그런 여론을 모를 리 없으니 더욱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도진이야 덤덤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이 업보라고. 해서는 안 될 죄를 저지른 만큼 속죄하기 위해서는 그것 또한 받아들이고 몇 배나 되는 선업을 쌓아야 한다고, 잘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진과 달리 이 새하얗게 착한 후배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을 쓰고 마는 것이다.
"어렵네요."
"아빠가, 아버지가 대단하신 분이란 건 알고 있었어요. 사람을 구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고 너무나 너무나 어렵고 내가 감히 다 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일이란 걸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도 자만이었어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무림 독감을 털고 일어나서 구약정의 잘못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노신사가 완쾌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던 약리지는 현실의 벽에서 그렇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말았다.
도진이 그런 후배의 모습에 옅게 웃었다.
"우리 리지도 이제 어른이 되려고 하는 건지, 어려운 생각을 하는구나."
리지는 불만스런 얼굴로 말했다.
"나도 이제 다 컸거든요?"
"하하!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아직은 애였네."
"우우."
나를 위로해 주려고 이러시는 구나.
그런 생각으로 리지는 도진의 장단에 맞춰 어리광을 부렸다.
하지만 도진의 목적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리지야."
"네, 선배."
진지함이 더해진 도진의 부름에 약리지도 몸을 굳히며 답했다.
"니가 원하는 거. 사람들이 다 낫도록 하는 거."
"네."
"그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정말, 요?"
"응. 정말로. 하지만 그러려면 니가 조금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할 수 있겠어?"
답을 알고 있다는 얼굴로, 신뢰의 시선으로 도진이 약리지의 눈을 마주한다.
그런 도진의 신뢰에 대한 약리지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할 수 있죠!"
* * * *
무림 독감의 유행이 유독 한국에서 심화되는 상황에서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기사가 인터넷에 퍼졌다.
-속보!) 의선약가, 무림 독감 완치법 개발 성공?!
-의선약가. 식약처에 무림 독감 완치법에 대한 긴급 승인 요청해…….
대한민국 최고의 의가이자 세계에서 인정받는 의가인 의선약가에서 무림 독감의, 그것도 완치법에 대한 긴급 승인을 식약처에 요청했다는 기사였으니 난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킹갓의가가 또?;;;
-와 ㅋㅋㅋ 여윽시 갓갓갓갓이다. 이걸 벌써 치료법을 만들어내네 ㅋㅋㅋ
-흠. 근데 쬐금 걱정도 되는데.
-? 뭐가?
-다른 것도 아니고 전염병 치료법인데 이걸 이렇게 갑자기 내놨다고 바로 승인해 줄까 싶어서.
-? 미치지 않고서야 승인해야 되는 거 아님?
-그게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 사람 목숨이 걸린 건데 검증이 돼야 승인을 하지. 만약 잘못되면 연관된 공뭔들 전부다 모가지 날아갈 텐데 그렇게 쉽게 승인 해 줄 리가 없자너.
-아니 감히 의선약가가 내놓은 치료법인데 그걸 이 상황에서 승인 안한다고? 그러면 그걸로 또 모가지 날아가는 거 아니냐? ㅋㅋㅋ
-ㅋㅋㅋㅋ 걍 승인하고 기도하는 게 나을 텐데.
평범하게 보면 그냥 팝콘 씹으며 즐기면 되는 이슈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면 의선약가가 식약처를 압박하기 위해 수를 쓴 것처럼 볼 수도 있었으니 이렇게 이슈가 퍼진 것 자체가 그러했다.
누군가의 의견대로 전염병에 대한 치료법이나 백신 같은 건 그렇게 간단히 승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의 목숨이 연관되어 있으니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 검증한 뒤에야 승인이 떨어지는 것이다.
허나 지금의 경우 그렇게 원칙을 다 지키려다가는 목숨을 잃거나 평생의 후유증이 남는 환자가 생길 판이다.
그러니까.
의선 약지후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정보를 흘려 식약처를 압박하기 위한 수를 쓴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 이런 씨발…….'
이번 치료법에 관하여 의선약가와의 면담을 책임지게 된 식약처의 '높으신 분'은 그렇게 속으로 욕을 씹어뱉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치료법의 승인에 관해서는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알려져서야 식약처에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조용히 진행되어야만 하는 일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유출된 건, 정말 어이없게도 식약처 직원의 실수 때문이었다.
그 어떤 악의도 없는 말 그대로 실수.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경험이 부족했고 무사안일주의에 절어 있었으며 경직된 조직 구조가 더해져 말 그대로 '환장의 콜라보'가 터진 거다.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책임자로서 맡은 소임을 다해야 했고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의선약가의 인물들을 맞이했다.
의선약가의 무인들이 들어서고 그 중심에 약지청이 있었다.
의선 약지후가 오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의선 약지후를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온 것이 의선의 형 약지청인 것에 의선약가가 진심이란 것도 알았다.
의선이 선계의 신선과 같은 이미지라면 그의 형은 인세의 신의(神醫)였다.
좀 더 가까이서, 사람들의 사이에서 의술을 베푸는 사람.
그런 사람이 왔으니 의선약가가 이 자리에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음?'
약리지가 있었다.
약봉 약리지.
의선약가의 직계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중 한 명.
그런 그녀가 무림 독감에, 그것도 중증을 앓았던 건 너무나 유명한 일이었으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의아할 부분은 없었다.
당사자로서 이 자리에 참여할 이유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옆에 또 한 사람, 무려 '소천마'가 함께 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
말 그대로 왜.
천마신교의 소천마가 이 자리에 참석한단 말인가.
그로서는 이 자리에 소천마가 참석해야 할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더더욱 그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소천마와 약봉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선후배 관계가 아닌 거 같다.
그보다 더 밀도 높은 무언가가. 감정의 교류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 같아 그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소천마는 비봉이랑 좋은 관계 아니었던가?'
그는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그리고 회의가 진행되고서, 그는 더욱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그러니까……."
"예. 이번 독감의 치료법은, 유일하게 리지만이 시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