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무림 독감에 걸린 환자는 무림 독감 관리대책본부의 방침에 따라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완치 판정에 음성 판정까지 받아야 퇴원할 수 있었다.
격리를 위해서는 당연히 격리 시설이 필요했는데 서울에서는 의선약가가 보유한 병동이 사용되었다.
제법 커다란 병동을 통째로 격리 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의선약가가 미리 준비를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생에서의 경험으로 도진이 빠르게 무림 독감을 알아채고 의선약가에 알렸다.
의선약가는 도진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사태를 확인, 심상치 않자 즉시 대처를 하였고 본래라면 쫓겨서 만들어 냈어야 할 격리 병동을 관리대책본부가 마련되기도 전에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선약가 부지 내에 마련된 격리 병동에는 서울의 환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은 경증 환자였고 일부는 중증 환자로 분류되어 집중 치료를 받고 있었다.
첨언하자면 경증 환자들 중에는 벽태웅이 문주로 있는 포부문의 문도들도 제법 포함되어 있었으니 도진이 복지 차원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쓴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그 두 부류에 포함되지 않는 두 사람이 섞여 있었는데 구약정과 공민관이었다.
구약정은 경증이라하기도 미묘할 정도로 미약하지만 어찌되었든 음성 판정이 나지 않은 무증상 감염자였다.
심지어 슈퍼전파자이기까지 했으니 음성이 뜨기 전까지는 결코 격리 시설에서 내보낼 수가 없었다.
공민관 역시 비슷한 경우였다.
진술에 따르면 독감을 며칠 심하게 앓긴 했으나 다 나았다고 했다.
그러나 양성이 나왔고 더더군다나 1호 감염자로 추정되었기에 아직 격리 시설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경우가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은 환자로 격리 시설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또 한 번 격리된 채 머무는 모양이 되었다.
다른 환자들과 따로 격리 생활을 하면서도 두 사람끼리는 같이 식사를 할 수도 있는 등의 생활이 대표적이었다.
처음 있는 일인 데다 예외 상황이다 보니 지침을 확정할 수 없어 이렇게 된 것이다.
"한 잔 할까, 약정아."
"네, 형님."
점심 시간.
구약정은 오늘도 공민관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는데, 평소와 달리 구약정은 소주를 한 병 들고 왔다.
낮부터 웬 술이냐는 소리를 하는 대신 바로 고개를 끄덕인 건 쓰린 속을 소주로라도 달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꼴꼴꼴…….
잔에 가득 찬 소주를 털어 넣으며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넘긴다.
구약정에 대한 비난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들리고 보이니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에, 격리된 환자들 중 일부의 피부를 직접 때리는 목소리와 시선이 특히나 아프게 그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사람들 참 너무한다, 약정아."
"…예. 형님."
비난은 '1호 감염자'로 알려지고 있는 공민관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에서 술의 힘까지 빌려.
"우리도 아무 것도 모르던 피해자인데 말이야. 개새끼들 진짜 너무하지 않냐?"
공민관은 수위가 높은 말도 껄끄럽지 않게 꺼낼 수 있었다.
"막말로 고의도 아니고 사실상 자연재해인데 그걸 우리한테 책임 돌려서 욕질이나 하는 새끼들이 오히려 가해자 아니냔 말이지."
"……틀린 말씀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지? 그렇지? 진짜 그 새끼들. 마음 같아선 확 독감 걸려서 뒈지게 앓았으면 좋겠다."
"……."
공민관의 말에 긍정하던 구약정은 그 말만큼은 동의해 주지 않았다.
소주를 털어 넣는 공민관의 눈이 그런 구약정을 슬쩍, 깊게 훑었다.
"약정이 너. 꽤 변했네."
"제가…… 말입니까?"
공민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말이야. 너, 쌓인 화도 많았었고."
호포문에 들어가던 때에 구약정은 자신이 오수하던 시절의 삶을 다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공부하던 중 사기도 당했었고 좋지 않은 소문도 돌았었던 등.
공민관의 말대로 구약정은 속에 화가 쌓일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시련을 감내해야만 했었다.
그것들이 쌓여 그런, 다 포기하고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던 거다.
말해봐야 변명밖에 되지 않고 면죄부가 될 수도 없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 삶을 다 알고 있는 공민관의 말에 구약정은 옅게나마 웃었다.
"예,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또. 형님처럼 절 믿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요. 다시 한 번 더, 해보려고 합니다."
그에게 감염되어 격리 중에 있는 형님들, 호포문의 사형들이 그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됐어, 새꺄. 뭐 이딴 걸로 사과를 하고 지랄이야.
-그래 임마. 내가 겨우 이딴 걸로 뭐 어떻게 될 것처럼 보이냐? 막내가 사형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구먼?
-우리 호포문에선 겨우 그런 걸로 사형제끼리 사과하지 않는다. 알겠냐?
말은 험하고 그 내용도 좋지 않았지만, 눈을 통하여 전해지는 마음과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 말라고.
이런 걸로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서툴지만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었다.
-아니 새끼. 겨우 이런 걸로 우냐. 푸하.
-막내 새끼 이거 마음 너무 약해서 어쩌냐. 야. 니가 사수니까 앞으로 잘 챙겨라. 알겠냐?
-예, 형님.
-사형이라고 불러, 임마!
부끄럽게 눈물이 나왔는데, 그게 또 이상하게도 부끄럽지 않았던 거다.
그런 경험이. 경험들이.
화로 인해 켜켜이 쌓였던 안 좋은 것들을 다 날려 버려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공민관은 그런 구약정의 진심이 진하게 묻어나는 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구나. 그래."
주억이던 그와의 점심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구약정은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저녁도 공민관과 함께 먹었다.
이곳에 격리된 뒤로의 일상이었다.
공민관은 구약정을 비난하는 이를 비난하고 구약정은 그것을 조용히 듣는다.
며칠 동안 반복된, 말 그대로 '일상'이 하루와 함께 저물었고.
"허억, 허억!"
잠이 들었던 그는 산소에 허덕이며 눈을 떴다.
'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마치 고열에 흐물해진 것처럼.
공포와 위기감에 무거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한다.
그의 명확하지 않은 시야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존재감의 누군가가 비쳤다.
새하얀 가운에 검디 검은 색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빚어진 듯한 여성.
그는 누구인지 모르는 그녀는 독마전의 소전주.
위연서였다.
"혈액 채취 하겠습니다."
* * * *
의선약가 내 무림 독감 격리 병동에 비상이 걸렸다.
사이렌이 울리는 등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는 모조리 배제되어 고요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극명하게 의료진의 움직임이 치열해 보였다.
"경증 환자 네 분의 증상이 중증으로 악화되었습니다."
"무증상 감염자였던 구약정 씨가 갑자기 중증으로 발병하였습니다."
다급히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모습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리지가 중증으로 악화되었다고."
"…그래."
다른 장소인 쌍둥이 빌딩 내 천마신교 총괄부 내의 분위기도 심각해져 있었다.
격리 병동 내에 무림 독감으로 인한 중증 환자가 넷 늘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는, 그 안에 약리지와 구약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의 불행에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감정을 가진 인간인 이상 자신과 연관 있는 이들의 불행에 더 크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리에 참석한 위연서가 말했다.
"중증을 앓았던 환자들의 후유증으로 폐 기능 약화, 성대 기능 약화 등이 보고되었습니다."
중증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망하는 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기저 질환을 앓던 노약자는 많이 위험하지만 약리지와 같은 건강한 사람이면서 경지가 낮지 않은 무림인은 대부분 완치된다.
문제는, 그렇게 완치된다고 해서 몸의 기능까지 다 회복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많은 완치자들이 폐와 성대 기능의 약화를 호소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건강하지 않게 되었으며, 심각한 이는 벙어리가 되었다고 SNS를 통하여 호소했다.
한국보다 앞서 무림 독감이 유행했던 미국에서의 사례였다.
목소리는.
그나마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거의 회복될 수 있다고 했지만 폐의 경우는 영구 손상되어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무림인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약화된 육체를 되돌리기 위해 소모되는 시간은 극단적으로 말해 '도태되는 시간'이다.
여기에 제아무리 내공이라 해도 영구 손상된 폐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환골탈태라도 하지 않는 한.
약리지에게는, 최악의 경우 무인으로서의 삶에 사형 선고가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
도진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건 증거가 없음에도 명확한 일이다.
무형독이, 또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로 인해 도진의 주변에 있어서는 안 될 불행이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었다.
백신은 기대할 수 없다.
바할라에 독마전, 의선약가까지 가세하였다지만 백신이란 게 하루아침에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자연 치유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야 불행을 다 막을 수가 없다.
약리지의 미래. 구약정의 미래.
그리고 선인(善人)인 노신사의 목숨까지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냥 쳐죽였어야 했나.'
도진은 그런 생각을 찰나 했다.
무형독의 끄나풀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붙잡으면 잔털을 뽑는 것과 같은 일이 되기에 두고 보는 중이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지켜보고 있었기에 잔털만이 아닌 이번 일을 벌인 놈들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 성과를 이것과 상쇄하여 기뻐하는 건 도진에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도진은 생각했다.
일어나 버린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그것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고 이내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위연서."
"예, 소지존."
"이번 바이러스는 고독과 같다고 했지?"
"분명히 그리 말씀드렸나이다."
경증 환자가 중증 환자가 된 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경증이지만 그들은 독감을 오래 앓고 있었으니까.
당장 약리지가 그러했다.
허나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건 '고독'이, 바이러스가 특정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협지로 보면 그런 거다.
흔히 등장하는 모종의 수로 상대에게 심은 고독을 활동시켜 고통을 주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
그리고 여기까지 짚은 도진이었기에 떠올린 생각을 실행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위연서. 구약정 씨의 혈액에서 채취한 바이러스를 나한테 주사하도록 해."
"도진아?!"
함께 있던 소담이 놀라 도진을 불렀다.
그러나 위연서는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존명, 고개를 숙이고서는 준비를 위하여 움직였다.
그녀에게 있어 도진은 어릴 적부터 상상해 온, 그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천마'였으니까.
소담의 도진을 지극히 위하는 마음에 뒤지지 않는 믿음이 위연서를 소지존의 명령에 즉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도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담아."
두 사람의 마음을 모두 짊어져야만 하는 소천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