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524화 (524/741)

523화

"처음 뵙겠습니다, 가주님."

"예. 처음 뵙겠습니다, 소천마."

의선(醫仙) 약지후.

의선약가 역대 가장 위대한 가주라 칭송받으며 세계가 인정하는 무림의 신의(神醫).

그리고 사적으로는 후배 약리지의 아버지가 되는 그를 도진은 오늘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 명성과 달리 평범한 외모와 부드럽지만 특별함이 깃든 미소가 약지청과 친형제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거기에 의선약가 가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그리고 스스로의 커다란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쌓아온 것들로 더해진 위엄이 그를 한 집단을 오롯이 짊어진 거대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이유가 없다면 대통령조차 만날 수 없다는 그였기에 친한 후배인 약리지의 아버지였음에도 도진은 오늘 처음으로 만남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신안(神眼)으로 비치는 그의 인물됨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의선이란 별호가 결코 과하지 않은 인물이로구나.

-예.

의선의 이름은 적어도 이 대한민국 안에서는 비할 데 없이 높은 곳에 있었다.

무섭게 성장하는 호랑이로 불리며 누구 앞에서도 이를 드러내며 패도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사자군 오군성이 유일하게 존중하여 예를 취했던 이가 약지후였다는 일화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사자군을 깎아내리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자군이 앞뒤 없이 날뛰는 이가 아닌 차가운 이성으로 패도를 걷는 걸물이라는 걸 증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였으니 약지후라는 사람이 그만큼이나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약지후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살았다.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의술을 갈고 닦았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그를 위하여 살았던 약지후의 삶이 문장을 단순하지 않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그는 만족하는 대신 항상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살았다.

그리하여 갈고 닦은 재능은 그에게 의선이란 별호를 헌사하게 만든 전설의 화룡점정을 이룩하였으니 죽음을 앞둔 환자 두 사람을 동시에 살려낸 것이었다.

단순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치료비조차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이였고 또 한 사람은 나라를 운영하는 국무총리였다.

그리고 그들이 앓던 병은 손꼽히는 실력의 의사가 가장 좋은 환경에서 수술을 한다 해도 30%의 확률조차 장담할 수 없는 악명 높은 병이었다.

두 사람 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한 사람만을 선택해야 했고 그마저도 수술의 성공 확률이 10%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된 환자였다.

거기서 약지후는 눈앞에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았다.

-1%의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 1%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약지후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 말을 지켰다.

어쩔 수 없다 말하며 하나의 생명을 택하는 대신 두 생명을 다 택하여.

두 생명을 다 살려냈다.

그리고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누구도 그가 의선이라 불리는 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의선이 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전대의 의선약가주가 물려준 것이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그 또한 대인(大人)이었다.

그렇게 가주가 된 약지후는 그저 평범하게 큰 의가였던 의선약가를 지금의 규모로 키워냈다.

의선약가 역대 가장 위대한 가주를 마주하여 도진은 말했다.

"가주님. 이번 무림 독감의 연구에 의선약가가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연구요."

"예."

약지후는 사무적인 얼굴로 말했다.

"단순 연구라면 소천마께서 저와의 약속까지 잡으실 필요는 없으셨을 테니 이것은 백신을 만들기 위한 연구겠군요."

과연. 대번에 의도를 파악하는 약지후에게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백신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의선 약지후'의 이미지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도진은 막힘없이 준비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의선약가와 천마신교의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만이라면, 힘을 보태드릴 이유가 될 수는 없겠군요."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의선 약지후라면,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평범하게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의술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평범하게 훌륭한 의사'였다면 의선 약지후의 의선약가는 이 정도나 거대한 의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의선 약지후는 그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었으니 그의 시야는 비할 데 없이 넓었고 그가 원하는 영역은 그보다 더 높았다.

사람을 살린다. 더 많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그보다 단순하게, 그러나 더 위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자 살았던 것이다.

그에게 목숨을 구함받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사는 약지후에게 감화되어 힘을 보탰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어 지지하였다.

그럴 수 있는 삶을 약지후는 살았다.

스스로의 시간을 포함한 가진 모든 것을, 그를 위하여 쓰고 있다.

상상으로라도 감히 그럴 수 있을까 싶은 그의 삶에 비추어 보면, 방금의 답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 소요되는 노력을 다른 데 쓰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고.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무림 독감의 백신은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라고들 한다.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 비용이 백신을 만들었을 때의 이득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제약회사의 판단이다.

약지후의 경우엔 그 이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된다.

그의 기준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신을 만드는 데 쓸 비용을 다른 데 쓰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기에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러면서 매일 조금이라도 한계를 넓혀나가기 위한 삶을 사는 약지후의 판단이었기에.

약지후를 아는 이라면 감히 약지후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도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는 약지후와 그를 따르는 의선약가의 무인 몇 명, 그리고 도진과 위연서만이 있었다.

그리고 모습을 감춘 사람이 다섯 명.

주위를 훑는 도진의 감각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가 읽힌다.

믿을 수 있는 이들로 보였다.

과연 약지후의 주변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의심을 할 만한 이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기에.

도진은 전음으로 말했다.

-이번 무림 독감이 독(毒)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예. 무형독의 바이러스 테러입니다. 여기 제 곁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독에 정통한 독마전의 소전주가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번의 유행은 평범하게 넘어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형독이 그저 단발성의 평범한 유행을 의도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가주님. 저는 더 철저하게 연구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주님께서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이 세상을 좀먹고 있는, 무색무취의 독을 정화하기 위해서요.

* * * *

의선과의 만남은 채 15분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는 짧은 만남이 끝나자마자 또 한 명의 환자를 살리기 위하여 떠났다.

그리고 도진은 약리지를 만났다.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쉬이 무림 독감이 낫지 않고 있는 약리지는 철저히 격리된 공간에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렇기에 유리 너머로, 멸균복까지 입고서야 도진은 약리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리지야."

"와 주셔서 고마워요, 선배."

리지는 마치 말라가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그것도 오래도록 괴롭히고 있는 극심한 독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약해진 몸을 따라 소모된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찌르는 외부의 일이 약리지를 그렇게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많이 안 좋으셔요."

할아버지.

친할아버지가 아닌, 얼마 전 중증으로 병이 심각해져 입원한 노신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약지청과 오래 알고 지낸, 약지청에게 있어선 존경하는 형님이었으며 그가 살던 동네에서도 존경받는 노신사였다.

그런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독감이 중증으로 번져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음을 약리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호포문과 구약정이 거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것까지도.

어떻게 보면 남이었다.

한 다리 건너의 일이었고 알게 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깊은 교분을 쌓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리지는 마음 아파하였으니 그녀가 그만큼이나 순수한 심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도진은 기운이 다하여 땅을 향하는 나뭇잎과 같은 약리지가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말했다.

"리지야."

"네, 선배."

"이 상황을 바꾸려면…… 우선 건강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제가, 요?"

"응. 너까지 계속 아프면, 일이 더 나빠질 테니까."

"저 때문에요?"

"구약정 씨가 독감을 옮긴 사람 중에는 너도 있으니까. 너는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는 만큼, 니가 독감에 걸린 것 때문에 욕하는 사람도 많거든."

"아……."

"그게 잘못된 거라는 걸, 니가 건강해져서 말을 해 줘야지. 그 사람이 나빴던 게 아니라고. 호포문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좋은 일을 했다고."

"응."

"나쁜 생각만 하고 주저 앉아 있는 건 좋지 않잖아? 그러니까 리지야. 밥 잘 먹고 잠 푹 자고 빨리 나아. 알겠지?"

"네, 선배. 그럴게요. 빨리 나아서, 사람들한테 욕하는 건 잘못됐다고 말하도록 할게요."

"그래. 그리고 지금 고급 의료 인력이 많이 아쉬운 상황이잖아. 니가 다 나으면, 어르신의 치료도 도울 수 있을 거야."

"네!"

그저 허황된 희망뿐인 위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위로를 받은 이가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면.

그것은 실체를 가진 현실이 된다.

* * * *

쌍둥이 빌딩으로 돌아온 도진은 총괄부의 모임에서 의선 약지후가 제의를 받아들였음을 알려 주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준 것이다.

"독마전과 바할라, 그리고 의선약가가 협력해서 연구를 진행해 주세요."

"존명."

-존명.

말로는 백신이라고 했지만 이 연구는 그 이상으로 깊은 영역을 목표로 한다.

독마전의 연구로 무림 독감이 무형독의, 상상을 넘어선 거대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음모의 일환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전생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저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했던 세 번의 유행이 음지의 세력이 일으킨 인위적인 테러라는 걸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을 이제 알게 됐다.

아는 걸 넘어, 그토록 무시무시한 세력이 진행하고 있는 거대한 음모를 쳐부술 거라 결심하고 실행할 수 있는 위치에.

지금 도진은 서 있었다.

지극히 넓어진 도진의 세계.

그 세계를 침범하려 드는 것만으로도 실행할 이유는 충분하다.

아마도 수십 년을 준비하고 상정하여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을 계획.

이 연구는 그 계획을 쳐부술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해야 할 것.

도진의 시선이 향하자 나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잡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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