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새카만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어깨를 지나 등허리까지 내렸고 새하얀 블라우스에 타이트 스커트, 스타킹은 완벽한 굴곡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 걸친 새하얀 가운까지.
위연서는 감히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드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의 존재감에 이상형으로나 떠올릴 법한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커리어 우먼의 포스를 풍기는 그녀는 현대적인 외모와 달리 오히려 '옛 무림'의 면모가 더욱 진하니 천마신교 독마전의 소전주 위연서로서 도진의 앞에 예를 취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그러하다.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던 어린 시절 인생을 바꿔준 어머니이자 스승에게 들었던 가장 이상적인 존재 천마(天魔).
그 천마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자라면서도 고스란히, 아니 오히려 나날이 키우며 자란 그녀는 정말로 나타나 버린, 천마의 이름을 이은 도진에게 키워온 마음을 고스란히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를 갖춘 채 보고한 위연서의 말은 절대로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지 않다면 그녀는 결코 도진에게 보고하지 않을 것이었으니까.
스윽-
도진이 예를 취하는 위연서를 직접 일으키고 의자에 앉혔다.
그러지 않고서는 계속 예를 취한 채 말할 것이었으니까.
"망극하나이다, 소지존."
"그래. 그러면, 계속 이야기해 줄래?"
"그리 하겠나이다, 소지존."
독마전 소속의 연구원들은 무림 독감의 존재가 밝혀지고서 바로 바이러스 샘플을 구하여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일견 독(毒)을 다루는 독마전이 바이러스의 연구를 하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도진은 그녀의 독공 개론 수업을 들었었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독과 병균을 나눠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 독과 병균은 다르게 구분되는 게 맞다.
하지만 일부 분야에서, 그리고 현대 독공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학과 결합한 현대의 독공은 '화생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독의 범주는 화학무기까지 포괄하게 되었고 생물학까지도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갑작스레 유행하기 시작한 무림 독감을 독마전이 연구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독공은 연구를 게을리하는 순간 도태되고 마니까.
"고독이란 것이 있나이다."
고독(蠱毒).
무협 소설을 제법 읽었던 도진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독충(毒蟲)들을 한곳에 가두어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고 잡아먹게 한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마지막 한 마리의 지독하디 지독한 독, 혹은 벌레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다.
위연서는 그에 관하여 간략히 설명한 뒤 말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독감의 병원균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했나이다."
"감기균을 고독의 방식으로 배양하여 무림인의 체내에서도 살아남아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연서의 말은 지금 유행하는 무림 독감의 균은 자연 발생하여 퍼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생물학 무기로써 사용된 결과란 말이었다.
지금 무림 독감은 일부 지역에서만 유행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고 전 세계에 퍼져 있었다.
이것이 의도하여 일어난 일이라면.
"…무형독의 수작, 이라고 봐야겠네?"
"저희는 그렇게 보고 있나이다, 소지존."
무형독 정도가 아니고서야 벌일 수 없는 스케일이었다.
-보통 놈들이 아니로구나.
위지혁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고 도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한 병원균을 이용한 테러가 아니었다.
이것은. 차라리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험'일 것이었다.
전 세계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감염은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전생에서 도진이 스쳐 듣고 보아 기억하지 못하는 뉴스의 내용을 위지혁과 장호가 말해 주었다.
이번 무림 독감의 경우 따로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다고.
기존의 치료제를 이용하여 증상을 억제하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병을 극복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나며 유행은 잠잠해졌었다.
문제는, 이런 형태의 유행이 두 번이나 더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세 번째의 경우 무려 3년이나 유행이 계속되었으며 인류의 삶 일부마저 바꿀 정도로 영향이 막대했었다.
거기에 분명히 무형독이 의도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대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도진의 기세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위연서는 그 기세를 느끼며 황홀한 눈동자로 소지존의 존체를 담았다.
"위연서."
"예, 소지존."
"독마전주와 함께 총괄부로 오도록 해."
"존명!"
* * * *
대책본부로 사실상 압송된 구약정은 심문에 준하는 사정 청취 절차를 거쳐 격리되었다.
그러는 동안 혈액 체취 등의 여러가지 검사에도 협조해야만 했다.
무엇 하나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구약정은 스스로를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 생각했고 그 죄를 갚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협조하려 했으니까.
그리고 대책본부는 이틀이 지나지 않아 가장 처음으로, 그러니까 구약정보다 앞서 무림 독감에 걸리고 그것을 구약정에게 전파한 사람으로 한 명을 특정하였으니.
"형, 님?"
"어, 그래. 오랜만이다. 약정아."
공민관.
그가 5년이나 다녔던 경찰 공무원 학원의 원장이었다.
말이 원장이지 A-3 자격증을 딴 뒤로 20년이 넘도록 경지를 올리지 못한 그저 그런 인물이 차린 그저 그런 학원이었기에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큼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허나 구약정에게 있어서만큼은 은사(恩師)라 할 만한 인물이었으니 그가 5년 동안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격려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책본부의 격리실에 함께 있게 된 구약정은 그와의 만남에 아주 조금,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가 무림 독감을 옮겼다고 했지만 그것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구약정이 그러했듯, 그 또한 고의로 구약정에게 무림 독감을 알고서 옮긴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보다는 힘든 시기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공민관이 면목없다는 얼굴로, 진지하게 구약정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아닙니다, 형님. 형님 때문이 아니잖아요."
"아니기는. 나 때문에 네가 지금 이렇게 된 건데. 정말 미안하다."
"아뇨, 정말 아닙니다, 형님."
구약정이 극구 손사레를 쳤지만 공민관은 쉬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네가 속죄하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진심으로 노력했는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 독감 때문에 사람들한테 그렇게나 심한 비난을 받으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잖아.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있겠니."
"……."
그 말만큼은 구약정도 간단히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구약정 또한 사람이었다.
반성하고 뉘우치고 속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지만 모든 게 너 때문이라며 쏟아지는 상상도 못할,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무겁고도 거대한 비난을 감당하는 건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런 구약정의 귓가에 공민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이렇게까지 비난 받아야 할 일이 아닌데. 네가 그런 비난을 받는 게 나로서는 더 견디기 힘드네, 약정아."
* * * *
"구약정은 무증상 감염자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총괄부.
도진과 독마전주 위취련, 부전주 위연서, 한유아, 그리고 영상으로 슈미트라까지 모인 자리에서 나지윤이 말했다.
"무증상이라고 하지만 완전히 무증상은 아니었고 가벼운 감기와 가래 정도였다고 진술했다는군요."
"그 상태로 며칠을 지냈고 완전히 잦아들었지만 바이러스는 남았고 그 상태에서 단체 생활까지 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무증상 감염자.
전생에서는 비할 데 없이 큰 규모로 오래 유지되었던 세 번째 유행에서야 본격적으로 대중에 오르내리던 단어였다.
감염되었지만 증상이 그리 크지 않아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고 일을 키우곤 했다.
실제로 몇 명이나 되는 무증상 감염자가 폭발적인 증가세에 공헌한 슈퍼전파자가 되었었다.
하필.
그런 무증상 감염자가 구약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약정에게 바이러스를 옮긴 것이 공민관.
"소규모의 경찰공무원 학원의 원장이야.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구약정에 앞서 독감을 앓았는데 그 시기 베트남을 방문했던 이들을 초기 전파자로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추정하고 있었다.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었고 거기서 무림 독감균이 발견됐다는 거다.
"그래."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평범한 유행이었다면 거기서 끝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지금의 유행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무형독의 수작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독마전이 함께 한 자리에서 도진과 위취련이 설명했고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일단은…… 티나지 않게 접근하는 쪽으로 방침을 잡을 겁니다."
무형독의 수작은 무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도진은 제법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올리버 웨일스 후작부터 시작하여 프랑스라면 덴젤 공방에 넷비전의 CEO인 크리스토프 뒤몽도 있다.
제아무리 무형독이 대단하다 해도 그만큼 큰 일을 벌이는 이상 틈이 없을 수는 없었고 도진이 가진 영향력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그 틈 몇 개 정도는 찌를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틈을 찔렀을 때 핵심에 이르는 길이 대번에 단절되는 것이다.
틈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무형독은 그 틈을 찌르는 순간 즉시 껍데기만 남기고 몸체를 숨길 능력이 있는 집단이다.
그것까지 감안하여 몸체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이번 일을 벌인 굵은 꼬리 정도는 잘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 부분에 관해서 투마전주와 세이전주가 힘을 써 줬으면 해요."
투마전주 슈미트라, 그리고 세이전주의 자리를 맡은 나지윤에게 도진이 말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슈미트라와 나지윤은 망설이지 않고 신뢰가 가는 얼굴로 '존명'이라 답했다.
"독마전주는 이번 바이러스의 백신에 관해 연구해 주세요."
"존명."
본래 백신을 개발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인력은 물론이요 그 이상으로 자금의 문제가 있으며 목숨이 관련된 일이기에 관련 규제 또한 엄격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높은 현실의 벽이 제약 회사가 무림 독감의 백신을 '안 만들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무형독의 수작이란 걸 알게 된 이상 해야만 했다.
물론 독마전에만 맡기지 않았다.
바할라가 보유하고 있는 제약 회사와 협업할 것이었으며 여기에 한 곳 더,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회의를 끝낸 도진은 외출을 준비했다.
혼자가 아니라 한 명 동행이 있었으니 독마전의 소전주 위연서였다.
송구하다는 듯 슈킨팍시의 조수석에 앉은 위연서를 데리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의선약가다.
미리 연락을 넣었던 도진은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약속을 잡았는데, 그 약속으로 만날 사람은 약리지의 아버지.
의선(醫仙) 약지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