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
남자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정경태의 의도를 알고 싶다는 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오랜 세월의 연륜을 가진 정경태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남자의 생각이 무언지 모를 리 없었다.
흥, 웃고선 말했다.
"내가 말했었지. 자네 같은 무인이 커서 된 게 나라고. 기억하고 있지?"
"……예."
어느샌가부터 정경태에게 존대를 하고 있는 남자다.
"그래. 나도 그랬어. 자네처럼 문제아로 살았단 말이야."
그 말은 어쩐지 설득력이 강했으니 은연중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젊은 시절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지. 나쁜 의미로 말이야."
요즘 '가부장적'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을 그대로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당시 시대 기준으로 '신세대'였던 정경태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고 그래서 반항적이 되었으며 그 길이 조금, 엇나가 버렸다.
"동네에 꽤 민폐를 끼쳤지. 나름 명문가였던 호포문의 이름에도 먹칠을 했고 말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보았던 광경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아버지가 말이야. 그 시대를 못 따라가는 꼰대라고 욕했던 아버지가 일일이, 내 잘못을 대신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다니셨다는 걸 알게 됐단 말이야."
그것을 계기로 정경태는 바뀌었고 지금에 이르렀다는, 그의 나이만큼이나 전형적이고 낡은 이야기였다.
"뭐 중요한 건 그거야. 우리 호포문은 나만이 그런 게 아니라 나랑 어울리던 못난 놈들도 몇 명이고 갱생시킨 문파라는 거지. 거기에 자네 한 명 더해지는 것도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지 않겠나."
"……."
"내 보아하니 자네도 그리 본성부터 안 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 공시생 준비를 오래 했다니 끈기도 좋을 테고 무공도 오래 익혀 제법 탄탄하고. 눈에 안 차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리 호포문이 그래도 지역 명문 아닌가. 자네만 생각이 있다면 한 번. 다시 시작해 볼 만한 곳 정도는 되지 않겠나?"
"……."
진심이 담긴 말에 남자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돌려주어야 했기에 대답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정경태는 씨익 웃었다.
"어렵겠지. 생각도 많을 게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네 같은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물려주는 게 우리 같은 늙은이들 역할 아니겠나. 내 많은 걸 알려줄 테니, 자네는 마음만 고쳐먹으면 되는 거야."
"정말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어렵사리, 아직 마음을 다 열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경태는 그에 믿음을 줄 수 있도록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믿어 보게. 물론 힘들겠지. 그러니까 공증인이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군."
그러면서 정경태의 시선은 약리지와 도진에게로 향했다.
"어, 저요?"
약리지가 스스로를 가리켰고 정경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지청이 조카. 대한민국 최고의 후기지수 아닌가. 자네가 공증인이 되어주면 이 친구가 더 믿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디. 해 주겠나?"
정경태의 부탁에 대한 약리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할게요!"
물이 너무 맑아 소꿉친구임에도 남사현과 그 그룹에 완전히 융화되지 못했던 약리지는 그러나 오랜 세월 어울려 지낼 정도는 되었던, 그 이미지만큼이나 새하얀 인성의 소유자였다.
본래 무언가 말을 하면 바뀔지도 모른다고 했던 게 자신이었던 만큼 문제 해결에 공헌할 수 있는 역할을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고맙네. 그리고……."
약리지에게 인사한 정경태의 시선이 이번엔 곁에 앉은 도진에게로 머물렀다.
"이 자리에는 그 유명한 천마도 계시지 않은가. 무언가 내가 옳지 않은 일을 한다면, 천벌을 받지 않겠는가."
정경태의 말에 도진은 그저 옅게 웃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고 남자는 이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신사에게.
"잘못, 했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 태도가 어색했고 진한 진심이 담긴 건 아니었다.
진심이 아니어서, 라기보단 말 그대로 그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신사는 그런 어색한 사죄에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맙습니다."
"왜 감사를……."
생각지 못했던 답에 남자가 당황하며 물었다.
노신사는 그 푸근한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어려운 사과를 해 주었으니 고맙지 않습니까. 내 친구를 믿어 주고 어려운 사과를 나에게 해 주었으니 고맙습니다."
"……."
남자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꿈지럭거렸다.
그것은, 남자가 오랫동안 받지 못했던 호의. 그리고 포용.
지극히 겪기 어렵고 귀한 것들을 받았기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나온 모습이었다.
* * * *
남자는 호포문의 신입 문도가 되었다.
호포문의 무공을 익히게 되었고 호포문 문도로서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배워야 했다.
"앞으로 잘 해 보자, 신입."
"예, 선배님."
소싯적 좀 놀았을 것 같은 선배님들은 조금 거칠었지만 거기에 배려를 담아 남자를 대해 주었고 남자는 바뀔 수 있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용서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경태가 직접 남자를 데리고 동네에 사과를 시켰다.
물론, 그 사과를 받아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쌓인 게 많았으니까.
오히려 남자가 지역 명문인 호포문에 붙어 있기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
정경태가 함께 있지 않았다면 무슨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엇나가려 하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르긴 쉽지만 용서받긴 어려운 법이지. 이놈아, 앞으로 많이 노력해야 한다."
"예, 태상문주님."
남자는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통로에 이렇게 쓰레기를 쌓아두시면 안 됩니다."
"뭔 상관이에요!"
"모두가 함께 쓰는 공간이지 않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같이 버리러 가시지요."
"아니, 뭔 진짜 꼴값이야! 나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면 저기 아줌마네 것부터 해결해요!"
"예. 이것들을 버리고 나서 아주머니네 쪽도 해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나."
빌라의 복도에 쓰레기를 방치했던 여자는 남자의 말에 어디 한 번 보자는 얼굴로 쓰레기를 같이 버리러 갔다.
더럽고 냄새나던 남자가 깔끔하게 이발과 면도를 하고 무복을 차려입은 모습 또한 약간은 그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대부분은 여자가 말한 '아줌마네'를 남자가 어떻게 할 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 아줌마는 이곳 빌라촌의 유명한 '빌런' 중 한 명이었다.
남자가 독보적 원톱이긴 했지만 아줌마도 어디 가서 빠질 정도는 아니었으니 제법 흥미진진한 모습이 나올 것이었다.
"자! 버렸으니 약속 지켜요."
"예."
쓰레기를 버린 뒤 남자는 정말로 그 아줌마네로 향했다.
여자가 슬금슬금 따라갔고 남자는 망설임없이 벨을 눌렀다.
띵-동-
"뭐야."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니."
"…그래요."
이 '지랄견'이 무슨 수작이지?
그런 얼굴의 아줌마에게 남자가 말했다.
"여기 복도에 이렇게 물건을 쌓아두시면 통행에 방해가 되고 유사시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리를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줌마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이런 문제로 말이 나오고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대번에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다니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남의 집 앞에 물건 두는 데에 참견이야!"
"안 그래도 혼자 살아서 정리도 힘든데 이런 거 하나 이해 못 해주고!"
다다다다.
그야말로 기관총처럼 말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남자가 간단히 막았다.
"그러셨군요. 그럼 제가 정리를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얼 해 드릴까요?"
"……어?"
"확실히 아주머니께서 혼자 정리하시기엔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어. 그, 그러면……."
그리고 남자는 약 세 시간을 그녀의 집 정리에 써 주었다.
"총각 무공 오래 익혔다더니 진짜 힘 좋네?"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아냐아냐. 이러면 됐어. 고생했는데 이거 마시고 가!"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머나. 그러기엔 염치가 좀……."
"제가 많은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잘못을 갚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신경쓰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호호. 그러면……."
그녀 혼자선 엄두도 못 냈던, 심지어 본래 정리와는 관련 없었던 무거운 짐의 정리까지 남자는 도와주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던 주스까지 마시고 갔다.
…그런 느낌으로.
남자는 그동안의 과오를 씻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조금씩, 동네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갔다.
당연히 제법 소문이 퍼져 나갔고 그 소문을 들은 약리지는 자신이 다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선배."
"응, 그렇네."
한 사람을 갱생시킨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남자의 경우 뿌리부터 썩거나 선을 완전히 넘은 인간은 아니었기에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겨우 선을 넘지 않았을 뿐 쌓은 과오가 적지 않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과오를 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이었다.
쏟은 물은 주워담을 수 없지만, 노력하면 그 뒤처리는 깔끔하게 할 수 있다.
뭐, 그건 그쪽 구역을 담당하는 호포문의 일이었으니 도진이 신경쓸 부분은 아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 사람 말끔하게 다니니까 꽤 괜찮더라구요?"
"그래? 관심 생겼어?"
"아뇨! 제가 좋아하는 타입은 따로 있거든요!"
"오, 그래? 좀 궁금해지는 걸?"
"안 알랴줌!"
…그런 식으로.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사건은 좋게 마무리된 것 같았다.
* * * *
천마신교 본단의 공사는 내년 봄이 오기 전까지는 끝이 날 것 같았다.
물론 모든 게 다 갖춰지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지만 대규모로 외부의 인력을 동원하여 진행해야 할 부분은 봄이 오기 전에 끝이 날 것으로 보였다.
"흠. 이거 한 번 해볼까 싶은데 어떤가?"
"오, 좋은데요? 당장 해 보죠?"
"역시. 자네라면 좋아할 줄 알았네."
취미로 시작하였지만 어느새 진심이 된 가구, 그리고 건축에 관한 일을 원없이 하게 된 우벽진.
"어이, 벽 씨. 잘 돼 가?"
"아니, 선배님까지 그렇게 부르십니까."
"요새 이런 게 유행이라던 거 같아서."
그리고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벽태웅과 그 동생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무엇 하나 걸리는 것이 없어 순항 중인 공사.
한데 거기에 돌연.
"콜록! 콜록!"
"카하악!"
생각지도 못했던 암초가 나타났다.
어느 날부터 공사장에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여름이 끝나고 짧은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는 간절기였으니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배. 나 너무 아파요...ㅠㅠ
약리지가 극심한 감기 몸살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아팠다.
공사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도 감기몸살로 나오지 못하게 된 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되었다.
그리고 도진은 전생에서 있었던 사건 하나를 떠올리게 됐다.
-무림인마저 안전하지 않은 독감 감기 바이러스가 보고되었습니다. 전파력이 강한 이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무림맹과 질병관리청은…….
오래 전 들었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었던 심상치 않은 독감 유행병에 관한 뉴스가 어렴풋이 재생된다.
-제자야.
-예, 스승님.
한국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무림인마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독감 바이러스가 유행했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