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사실 도진은 굳이 자신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호성 정경태를 확인했고 느껴지는 인물의 됨됨이를 통하여 그라면 충분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모습을 드러내면 일이 필요 이상으로 커질 테고 그러면 민폐가 된다.
동네의 일로 끝날 것이 '천마'가 끼어듦으로 해서 필요 이상으로, 불필요하게 사건의 스케일이 커질 테니까.
애초에 이 구역의 담당이 따로 있는데 외부인인 도진이 나서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약지청이 등장하고 약리지가 인사를 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미 스케일은 커져 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인연이 있는 약지청을 모른 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약리지는 그런 선배가 신기했다.
다른 게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곁에 함께 있음에도 누구 한 명 의식을 하지 않았던 것이 그랬다.
당장 오는 길에 선배의 차가 주차된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만난 이들만 해도 수백은 되었다.
그렇게 인파가 많은 길을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누구 한 명 선배를 의식하지 않았다.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렸다 해도 약봉 약리지의 '태'가 가려지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의선약가 안이었던 만큼 마스크를 썼다 해도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곁으로도 향해야 했다.
무려 천마에게로!
하지만 전혀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마치 자신이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어서 약리지는 물었다.
"선배."
"응?"
"혹시 유령이세요?"
"하하하!"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알았기에 도진은 유쾌하게 웃었고 수련중이라 말 해 주었다.
"무슨 수련이길래 이래요?"
"나의 존재를 자연과 동화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만드는 수련이지."
"…선문답 같네요."
평소 도진이 자신의 기척을 감춘다는 걸 약리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척을 드러내면 어떻게 되는지도 일전 도진이 '낮잠'을 잘 때의 소동으로 경험했다.
한데 아무래도 도진의 그 '수련'이라는 건 단순히 기척을 감추는 게 아니라 훨씬 높은 경지의 어떤 것인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본격적으로 사신(死神)의 무공을 계승하기 시작한 도진은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드는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
'감춘다'라는 건 부자연스러운 것.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존재가 됨으로써,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상대가 보고서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길가의 자연스러운 돌멩이처럼 말이다.
도진의 그 이치에 대한 깨달음도 낮지 않아서 무려 약지청이나 정경태 같은 고수도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전까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뭐, 연장선상에서 난동을 부리던 남자 또한 천마가 갑자기 등장하자 무시무시한 충격에 자포자기하여 난동을 더 부리긴 했지만 약리지 덕분에 일단 지구대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지구대는 3층짜리 낡았지만 도색을 새로 하여 깔끔한 건물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확히는 이 중 우측 건물을 지구대가 사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치안 유지 계약을 맺은 호포문(虎咆門)이 사용하고 있으니 호성 정경태가 태상문주로 있는 문파다.
그 업무가 겹치는 부분이 많고 서로 긴밀히 협조해야 하는 만큼 지구대와 치안 계약을 맺은 문파가 이렇게 한곳에 같이 자리잡은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화온과 잠룡문이 그렇지 못하고 새로 사무실을 구했던 건……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금화의 뒷수작 때문이었다.
그와 관련한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지금은 남자다.
"기세를 일으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림인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니 자기 방어를 위해서 저도 기세를 일으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요?"
"그리고 제가 먼저 맞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가 피해자 아닙니까. 틀립니까?"
"끙."
진술 시간.
남자는 앞서의 그 뻔뻔하고 '무대뽀'스러운 모습을 고수하는 대신 놀랍게도, 논리적으로 진술을 하고 있었다.
담당 형사가 이마를 짚을 정도로 말이다.
남자의 말이 무조건 맞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또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긍정과 부정의 경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도록 진술을 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과실을 물을 수 없게 되었으니 단순한 골칫덩이가 아니란 걸 짐작케 한다.
"어쨌든! 거기서 고성방가하고 저기 저분을 위협한 건 사실이죠."
"제가 술에 취해서 좀 목소리를 높인 건 맞는데, 위협한 적은 없거든요?"
"아오……."
물론 뻔뻔함도 어디 가지 않아서 상대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형사님, 저는 괜찮으니 이제 그만 고생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어르신."
"괜찮습니다. 저녁도 드시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건은 결국 노신사가 괜찮다고 함으로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따지고 들면 호포문의 태상문주와 남자 간의 싸움이 될 수 있었던 영향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사건에 관한 뒷처리는 마무리되고 도진과 약리지, 호성 정경태와 노신사.
"자네도 오게. 밥 사줄 테니."
그리고 남자가 정경태의 말에 따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하게 됐다.
"그럼 저는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미안하네. 겨우 시간을 냈는데."
"하하하. 아닙니다.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다음에 보세."
본래 정경태, 노신사와 약속을 잡았던 약지청은 아무래도 바쁜 몸이라 함께 하지 못하게 됐다.
무언가 이야기 할 게 있었던 거 같은데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세 분이서 오늘 같이 밥 먹기로 하셨던 거구나."
"예, 그랬지요."
어느새 노신사의 곁에서 약리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식사는 감자탕집에서 해결하게 됐다.
도진은 본래 뼈가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극한 이치가 담긴 천마검공으로 뼈를 발라냄으로써 그 부분을 티나지 않게 해결했다.
-생활 속에 녹아든 무공. 좋구나, 제자야.
-감사합니다, 스승님.
달그락.
남자는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이 불편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굴하지 않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 그럼 이제 말 해 주세요."
밥을 다 먹고 후식으로 퍼 온 아이스크림까지 하나 남자가 해치우자 약리지가 말했다.
남자가 말했던 불만의 이유.
말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거라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자리는 마련된 것이었다.
남자는 눈을 뒤룩 굴리다 이내 호랑이 등에 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공시생이었어. 무림과 쪽의."
공시생. 공무원 시험 준비생의 약자.
그리고 여기에 무림과라고 하면 최소 A-4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경찰공무원을 목표로 하는 공시생이란 말이 된다.
문파에 들어가는 것보다 안전한데 후에 연금까지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도전한다.
당연히 많이 도전하는 만큼 경쟁이 치열한데 커트라인이 A-3가 아닌 A-4였기에 그렇다.
무공 수준의 커트라인이 낮은데 얻을 수 있는 건 평생 직장이니 리턴이 높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높다.
붙으면 대박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젊고 중요한 시기를 통째로 날리게 되니까.
무공은 A-4 수준으로 어중간하고 공부했던 것은 그 분야가 아니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실패한 이들 중 한 명이, 눈앞의 남자였다.
"사수를 했어. 하지만 다음엔 합격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더 도전했어. 그리고."
'편파 판정'으로 탈락했다, 고.
남자는 아직도 남은 원망을 가득 담아 말했다.
"분명히 내가 유효타를 넣었고 그걸로 내가 이겼어야 했어. 하지만 그 새끼의 판정승이 나왔지."
A-4야 진짜 공시생 흉내만 내는 폐급이 아니고서야 다들 따는 자격증이다.
A-4를 딴 상태에서 필기에서 합격점을 얻었고 실기, 대련에서 합격점만 따면 최종 합격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그는 납득할 수 없는 판정으로 패배해야 했고 그걸로 탈락을 당해야 했다.
"그 새끼가 어디 국회의원 아들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런 판정이 나온 거지."
"더 화나는 건, 그런 나의 불행을 다른 새끼들은 웃으면서 즐기기 바빴다는 거야."
남자는 불합리에 절망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격렬히 항의했고 이후에도 시위까지 하는 등 불합리에 저항했다.
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흔해빠진, 사수를 넘어 오수에 실패한 공시생 나부랭이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다른 공시생들은 안줏거리로 삼을 뿐이었다.
-야, 오수 지나간다.
동네의 사람들 또한 뒤로 수군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상시 감내해야 하는 것이 많았던 그의 인내심은 항상 바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그 소리를 듣기 싫어서 노래를 튼 게 뭐가 잘못이지?"
"잘못이 있다면 공사를 그따위로 한 건설사 새끼들, 방음이 제대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술 처마시면서 떠들어댄 그놈들 아닌가?"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내 얘길 그렇게 지껄여대는 거지? 남의 불행을 그딴 식으로 씹고 뜯고 즐기는 게 잘못된 거 아닌가?"
남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더 많은 울분이 담긴다.
도진은 남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일이라지만, 자신의 불행을 남들이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그저 방관하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도진 또한 겪어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폐를 끼치는 게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
피해자였으나 그는 이윽고 가해자가 되었다. 그것도 꽤나 악질적인.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응징하는 게 권리일 수 있다면, 그 또한 한 명의 가해자로서 무수한 피해자들에게 응징당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거다.
그렇기에 동정받기도 힘든 인간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그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 노신사에게 한 행위만 보아도 그는 일말의 여지도 없는 가해자다.
만약 이런 식이 아닌 다른 형태로 만났다면, 남자는 그가 겁먹었던 대로 도진에게 '천벌'을 받았을 것이다.
약리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공감하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몰골이 된 이유를 들었고 공감도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는 방식이 그런 과거 이상으로 나쁜 방향이지 않은가.
때문에 약리지는 어떤 식으로 일을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고 슬쩍, 도진에게로 도움을 구했다.
도진은 옅게 웃었다.
방법이야 있다.
차근차근, 그가 뿌리부터 썩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신안(神眼)을 통하여 확인했기에 쓸 수 있는 방법이.
하지만 이 자리에서 도진이 나설 필요는 없었으니.
그에 앞서 결심을 한, 해결에 더 적합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남자를 보며 말하는 건 다름 아닌 호성 정경태다.
"…그런데요."
남자는 이미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경험이 있었기에 감히 뻗대지 못하고 존댓말로 답했다.
정경태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좀 덜 위험하면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었다는 거지."
"우리 호포문은 제법 오래 이 구역의 치안을 유지해 왔어. 큰 사건이 터진 적도 거의 없고, 두어 번 그랬을 땐 대문파가 나서서 일을 처리했으니까 우리가 위험을 무릅쓸 일도 없지."
치안 유지 계약은 보통 중소문파에게 돌아간다.
법적으로 중소문파 적합이라고 못박은 건 아니지만 관습으로 굳어 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무림 문파니까 사회적인 부분에 얽매이지도 않아. 무슨 소린지 알겠나?"
"……그건."
남자는 정경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공시생이었던 머리로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입으로 쉬이 말하지 못했고 정경태가 대신 말로 해 주었다.
"자네. 제대로 살고 싶다면 우리 문파에 들어와 일하도록 해. 인턴이 아니라 정직원 계약이야."
"왜……."
"말했잖나. 자네 같은 무인이 커서 된 게 나라고. 자네도 좀 바뀔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거야."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호의.
그 호의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기엔 이 시대가 너무 복잡하다.
남자의 생각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던 정경태가 비죽 웃고선 말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야. 내가 자선사업가는 아니니 말이야. 우리 문파의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도 없지. 그러니까 우선…… 계약금으로 하나 보여줘야겠어."
"뭘, 말입니까."
정경태의 시선이 노신사에게로 향했다.
그의 친우.
너무나 선하고 그렇기에 무른 인간.
"이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