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후기지수로 이름 높은 학생이라 해도, 그들이 아이돌과 같은 선상에서 동경의 대상이 된다 해도 길거리에서 대번에 알아보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진짜 아이돌처럼 온갖 매체에 얼굴을 비추고 개인 너튜브 채널까지 열어서 활동하지 않는 한 말이다.
무협지에서와 다르지 않다.
널리 알려지는 건 '명성'이지 '외모'가 아니니까.
그리고 본래 그쪽이 꿈이었고 그쪽으로 진로를 잡은 이들이 아니고서야 무림인은 학생 때부터 워낙 하루가 빡빡해 얼굴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할 여유가 없어 명성과 별개로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드문 게 보통이었다.
좋은 예시가 숭무고의 학생들이다.
척 봐도 잘생겼거나 예쁜 외모를 지니고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흩뿌리고 다닌다 해도 연예인인가, 후기지수인가 하고 생각을 하지 정확히 '누구다!'라고 떠올리지 못한다.
물론 관심이 있는 이들은 그들 쪽에서 열심히 정보를 찾아보니 대번에 알아본다.
한 마디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는 말로 정리가 된다.
약리지의 경우는 아는 사람의 비중이 제법 높은 후기지수였다.
남자라면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외모에 의선약가의 후기지수라는 명성까지 더해지면 웬만해선 한 번쯤은 검색해 보지 않겠는가.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의 사람들이 약리지를 알아보지 못했던 건 오늘 약리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묶었던 데다 마스크까지 썼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의 절반을 덮는 마스크를 쓰고 헤어스타일까지 평소와 다르다.
여기에 숭무고의 교복 표식을 가리는, 감기에 걸렸기에 입고 나온 얇은 바람막이까지 더해졌으며 결정적으로 약리지는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는다.
'의선검가역'을 지나는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이라 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머리가 풀린 뒷모습만 보고 알아챈 사람들을 대단하다 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약리지를 알아보고 외친 누군가로 인해 소란을 일으킨 남자와 약리지의 격돌은 단 한 번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약리지? 어? 진짜네."
"와, 약봉이 지하철을 탔어?"
웅성웅성-
소란이 일어난다.
관심에 비례하여 지하철을 들썩이는 소란은 제아무리 안면에 철판을 깐 남자라 해도 동요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 되었다.
본래는 아무런 영향조차 미칠 수 없는 '배경'이어야 할 방관자들.
그들이 배경에 그치지 않고 남자를 두들기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관심을 만들어낸, 갑자기 참견한 계집애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의선약가의 약봉 약리지라는 게 치명적이었다.
일견 안하무인에 뵈는 게 없어 보이는 것이 남자 같은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철저하게 민감한 타입이었고 그렇기에 해가 되지 않는다, 날뛰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들어야만 움직이는 것이다.
괜히 분노조절장애가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잘 조절되는 병이란 소릴 듣는 게 아니다.
바로 남자 같은 이들이 요즘 부쩍 논란이 되기에 나오는 거다.
띵- 동-
남자는 마치 타이밍을 맞춰 내려온 동앗줄처럼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자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한 발 늦게 신고를 듣고 대기중이던 보안 요원들이 달려왔다.
"…도망쳤어요, 그 남자는."
약리지는 약간의 불만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보안 요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학생."
"아,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걸요!"
"해야 할 일을 망설임없이 하는 것도 용기이며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 대단한 일을 해 준 것이니 감사합니다."
"에헤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남자를 혼 내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도망치는 것까지 봐야 했지만 노신사의 인사를 받자 그로 인했던 불편한 마음들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심성이 착한 약리지는 독한 마음을 오래 담아두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어제 수업에 늦었던 건 그 일 때문이었구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도진에게 약리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감기몸살이 심해진 거야?"
"음, 그러니까요. 그때 힘을 좀 써서 그런지 감기 기운이 싹 사라졌단 말예요."
그래서 마스크도 벗고 평소처럼 생활했다.
오늘 오전 약리지의 문자에 다들 의외의 소식을 들은 얼굴이 되었을 만큼 아무런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무림인도 아니고 수련의인 데다 명문 의가의 직계인 약리지다.
아무런 낌새도 없었고 그렇게 나은 줄 알았는데…….
"오늘 이런 걸 보면, 분명히 그 남자한테 병균이 옮은 거예요. 확실해요!"
"응, 그렇구나. 우리 리지, 코 풀까? 흥 할래?"
"…네, 할래요."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걸 더욱 진지하지 않게 받은 선배에 대한 심술로 약리지는 도발을 받아들였다.
물론, 만용이었다.
"그래. 풀어. 흥!"
"……."
한유아와 재미도 없는 아재 개그를 주고받는, 사실은 진짜 아재인 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티슈를 뽑아 약리지의 코를 잡아 버린 것이다.
"댔거등요."
결국 약리지는 다시 한 번 뿌우, 불만으로 볼을 빵빵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 앞에서 코를 풀다니.
예민한 시기의 소녀가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뭐 그런 식으로 죽도 먹고 수다도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가 버렸고 약리지가 갑자기 '아!'하면서 잊었던 것을 떠올린 얼굴이 되었다.
"왜?"
"선배. 같이 외출해 주시면 안 돼요?"
"어디 갈 데 있어?"
"네!"
약리지가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외출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도진이 먼저 방을 나왔고 약 30분이 지나자 간단히 샤워하고 나온 외출복 스킨의 보송보송하고 따끈한 약리지가 나왔다.
"감기몸살인데 다녀도 되는 거야?"
"약 기운이 돌아서인지 괜찮아진 거 같아요. 무리할 것도 아니고 잠시 다니는 거니까 괜찮아요."
"뭐, 우리 의사쌤이 말하는 거니까 그렇겠지?"
정말로 문제가 있었다면 집안의 사람들이 말렸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에 도진은 후배와 함께 의선약가를 나왔다.
슈킨팍시에 함께 타고 약리지가 알려준 곳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학교 끝나고 따로 알아본 건데요, 그 남자 동네에서 유명한 골칫덩어리였어요."
"그래?"
"네. 무려 전과 6범이었어요."
전과 6범.
그 타이틀만 보면 흉악해도 보통 흉악한 게 아닌데 사실은 '상습 잡범'이었다.
고성방가, 욕설 등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 신고를 많이 받았고 그 과정에서 행패를 부려 전과가 쌓였다는 거다.
"알고 보니까 그쪽 동네 치안 유지 계약을 한 게 친구네 문파였더라구요."
"그랬어?"
"네.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친구는 남사현 그룹의 한 명이었다.
나름 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중견 문파의 아들로, 그 남자 때문에 골치가 아파도 보통 아픈 게 아니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약리지는 첨언했다.
"따로 꾸준히 다니는 직장은 없고 일용직으로 힘 쓰는 일을 하거나 기관 쪽 일을 한대요."
경지가 높지 않다 해도 오래 무공을 수련한 이는 큰 문제가 없다면 현장에서 환영하는 법이고 기관, 정부 쪽은 공공 근로였으니 오히려 남자 같은 이를 대상으로 한다.
"그 사람은 그런데 워낙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싸워대고 평판도 좋지 않아서 일도 잘 못 받는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동네에서 심술 부리는 시간이 늘어난 거고요."
"빌라촌에 사는데 그런 일이 있었대요. 늦은 밤에 이어폰이나 헤드셋도 안 쓰고 스피커로 노래를 엄청 크게 틀어 버린 거예요. 사람들이 화가 나서 신고를 했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아저씨들이랑 무림인 분들한테 이렇게 말했대요. 그 사람들이 예민한 거라고."
"흐음."
"사람들이 나를 왕따 시켜서, 나 혼자 노래 듣는 것까지 모함해서 억울하기 짝이 없다고. 미칠 것 같다고 방방 뛰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데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대요. 아, 그 친구가 이 사건에 함께 출동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남자 얘기 듣자마자 고개를 휘휘 저었던 거라고 했어요."
"응, 그랬구나."
감이 딱 잡힌다.
흔히들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골칫덩이'라고 말하는 그런 부류.
상종해서 좋을 게 하나 없고 오히려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다.
하지만 약리지에게 들은 대로라면 그럼에도 온갖 행패와 말썽을 부리고 다니니 도저히 없는 취급을 할 수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남자를 어떤 형태로든 완벽하게 배제할 수단이 없다는 거다.
전과 6범이란 것도 따로 징역을 산다든가 한 게 아니라 벌금형 등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만큼 '선'의 경계에서 결코 그것을 넘지 않을 정도의 눈치까지 있다는 건데…….
그래서 약리지는 걱정을 한 것이었다.
"그 남자, 앙심을 품으면 꼭 행동을 한대요. 그러니까 무조건 그 할아버지한테 가 봐야 해요!"
"응, 그렇구나."
약리지의 말에 도진이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약자 앞에서 잔혹한 강자가 되는데 눈치까지 보는 타입이다.
보편적으로 이런 이들은 사소하면서도 독단적인 이유로 품은 앙심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니 약리지의 걱정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음…….'
노신사가 운영한다는 유료 주차장이 가까운 곳까지 오자 큰 소리로 악을 쓰듯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웅은! 공부를 안 한다네에에에에!!"
작정하고 악을 쓰는, 아예 위협이라고 해야 할 노랫소리였다.
유료 주차장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오니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약리지를 통하여 도진은 그 노신사가 이곳의 유료 주차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란 걸 들었다.
남자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알아내고선 유료 주차장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밤이라기엔 이른 시간에 유료 주차장 입구에서 소주로 나발을 불며 괴상한 노래까지 부른다.
입구 자체는 막지 않았으나 그 바로 옆에서 행색이 꺼려지는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악의로 똘똘 뭉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악질적인 건, 유료 주차장의 바로 근처가 어린이집이라는 것이었다.
통행하는 차로 인한 사고가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위치에 있는 어린이집의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불안한 눈으로 남자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진짜 나쁜 사람이네요."
약리지가 분기탱천하여 마스크 안 입술에 꾸욱 힘을 주었다.
노신사는 동네에서도 인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늦게 데리러 오는 아이들에게 사비로 간식까지 챙겨 주는, 근처 동네의 아이들 중 누구 한 명 그를 따르지 않는 아이가 없을 정도로.
그랬기에.
노신사는 자신이 아닌 아이들을 위하여 남자의 앞에 선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불안해 하니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주실 수 없을까요?"
"뭐?! 내가 기분 좋아서 노래 부르는데 그것까지 당신 허락을 맡아야 해?!"
정중한 부탁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발작하며 성을 낸다.
"…다행이에요."
약리지는 그렇게 말하며 쿵,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른 게 아니다.
남자가 행패를 부리는 바로 그 순간에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혼을 내 줄 거다.
그렇게 단단히 다짐하며 한 걸음을 내딛었던 약리지의 어깨를.
스윽-
도진이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잠깐만, 리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