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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13화 (513/741)

512화

첫 수업이 시작하기 약 30분 전.

집행부실에 모였던 집행부의 멤버들은 도진이 전해준 의외의 소식에 조금, 아니 제법 놀랐다.

다름 아닌 약리지가 감기에 걸려 오늘 학교를 쉰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소담에게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응. 리지가 감기에 걸려서 오늘은 쉰다고 하네."

단순 감기가 아니라 제법 심한 몸살감기라고 했다.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아예 푹 쉬기로 한 것이었다.

"아. 그래서 오늘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일정 변경 문자를 받은 것이었군요."

그렇게 말하는 건 약리지의 소꿉친구, 호협남가의 남사현이다.

도진의 시선이 남사현에게로 향한다.

"그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

"네. 의료 기기 관련 회사에 취직한 친구입니다."

"그렇구나."

남사현과는 여전히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호협남가와 천마신교의 관계가 미묘한 것과 달리 말이다.

호협남가는 일전 숭무고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더 나아가 무형독까지 번진 일과 관련하여 천마신교에 약간 앙금이 있었다.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천마신교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사현은, 그 모든 것을 알고 또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니 도진은 그 부분에 있어서 과연 남사현의 가치관과 성격에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관계로 오늘 수업 끝나면 한 번 병문안을 가 볼 생각이야. 집행부 쪽 업무는 우리 헌내기들과 새내기들에게 맡길게."

어느새 올해도 지낼 날보다 지낸 날이 훨씬 많게 되었다.

슬슬 집행부 부장 자리를 물려줄 때가 왔고 그에 대비하여 도진은 대부분의 일을 2학년과 1학년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루 정도는 집행부 활동을 빠져도 된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무얼.

2학년과 1학년들 중 누구도 믿지 못할 이가 없으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음…….'

이문호를 포함한 삼인방은 퇴부서를 내고서 집행부를 나갔다.

의천검가가 제대로 '천벌'을 받았고 그 천벌을 집행한 소천마가 있는 집행부에 남는 걸 그들 스스로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해 도진의 졸업과 함께 숭무고의 집행부에는 1학년 둘만이 남을 예정이고 그나마도 학교보다는 천마신교에 집중할 에정이니 '새로운 집행부'에 대한 대비를 슬슬 해야 했다.

뭐, 조금 뒤의 이야기다.

"학교에 못 나올 정도라니, 그렇게 안 보였는데 상당히 무리를 했나 보네요."

우서진의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네."

일반적으로 '무림인은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는 관념이 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무림인은 '지극히 건강한 사람'이니 병에 걸릴 일이 드물고 오래 사는 게 당연하다.

다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으니 무림인 또한 병에 걸릴 수 있다.

심지어 감기에도 말이다.

오히려 감기나 몸살에 걸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니 바로 그 감기가 면역력 저하 등으로 인해 걸리는 병인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제아무리 무림인이라도, 오히려 무림인이기에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등 무리를 하면 면역력 저하가 오게 마련이고 그것이 감기몸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감기균은 그 종류가 다양할 뿐더러 돌연변이도 매우 빠른데 무림인이 극한까지 육체를 몰아붙임으로써 그 특성을 발휘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 무림인에 통하는 감기가 생긴 하나의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곤 했다.

뭐, 그런 이유로 숭무고의 학업과 수련, 수련의로서의 업무에 집행부 활동까지 한 스푼 첨가한 일정을 소화하던 약리지가 감기에 걸린 것 또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거다.

도진은 수업이 끝나고 바로 의선약가로 향했다.

슈킨팍시를 몰고 의선약가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기 전 먼저 약리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고구마죽이요!

-고구마죽? 오케이.

고구마죽.

전복죽 같은 건 많이 들어봤는데 고구마죽은 처음 들어보는 도진이었다.

다행히 죽 전문점에 들어가 보니 메뉴판에 쓰여 있어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었다.

약리지가 요청했던 죽을 사들고 의료 단지 안에 있는 본가에 들어서니 의선약가 소속의 무인들이 각을 잡고 맞이해 주었다.

"어서오십시오, 소천마님."

"아하하. 안녕하세요. 리지 보러 왔는데요."

"예.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전에도 제법 각이 잡혀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 이상으로 무인들의 대처가 달라진 걸 확연히 느낀다.

잠룡문의 문주 때도 특별한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에는 댈 수도 없을 정도다.

뭐 이제는 경계를 넘어선 고수, 심지어 '천마'였으니 오히려 이쪽이 당연한 것이긴 하다.

일정 구역까지 안내를 받아 함께 갔고 약리지의 흔들거리는 기척이 느껴질 즈음엔 혼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똑똑.

"넹. 들어오세요, 선배."

코맹맹이 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워낙 새하얀 이미지라 발갛게 달아오른 게 더욱 극명한 약리지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빨간 토끼가 됐네."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하니 약리지가 뿌우, 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픈 사람 놀리기 없기."

"하하. 그래."

폭신해 보이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약리지는 말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사실은 어제부터 조짐이 보였거든요. 눈뜨고 일어나니까 목이 사알짝 아프고 콧물도 나구요. 그래서 마스크 쓰고 조심을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됐어요."

"요즘 좀 무리하긴 했지?"

"네. 2학년 2학기잖아요. 바쁜 건 어쩔 수 없었죠."

약리지도 어느새 2학년 2학기인 거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 전 라스트 스퍼트를 해야 할 시기.

특히나 약리지는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라 의선약가의 직계로 무림인이면서 동시에 의사가 되어야만 했다. 무림의 의사가.

당연히 소화해야 할 것들이 숭무고 내에서도 비교할 사람이 드물 정도로 막대했으니 제아무리 스스로 컨디션 관리를 한다 해도 이렇게 감기 몸살에 한 번쯤 걸리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죽 먹을래?"

"네. 따듯할 때 먹을래요."

도진이 약리지의 말에 포장해 왔던 죽을 꺼내 주었다.

포장 박스가 선을 따라 접으니 일회용 반상이 되었는데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 도진이었다.

그렇게 포장 박스로 반상을 만들고 뚜껑을 연 뒤 수저까지 챙겨 주었는데 약리지는 수저를 드는 대신 빤히 도진을 보았다.

"왜?"

"저 감기몸살이잖아요."

"응."

"그러니까 먹여 주셔야죠, 선배."

그야말로 강아지 같은 눈으로 도진을 애처롭게 응시하는 약리지였다.

평범한 이라면 그대로 KO 당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고 도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애교 잘 부리는 조카가 있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진은 씨익 웃으며, 제법 굵고 기다라며 중간이 뚫린 막대 하나를 꺼내 건네 주었다.

빨대였다.

"이걸로 먹으면 손 안 써도 되겠지? 그릇은 내가 들어줄게."

"……."

"흥, 됐어요."

약리지가 다시 한 번 뿌우, 하며 그 빨대를 거절했다.

* * * *

결국 약리지는 수저로 죽과 몇 가지 반찬을 직접 먹었다.

그러면서 수다를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응."

"감기몸살에 걸린 게 무리했던 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아요."

약리지는 무언가 다른 짐작가는 게 있다는 얼굴로 말했고 도진과 약리지의 눈이 마주했다.

약리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오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 * * *

슬슬 밝은 시간이 짧아져 가는 시기.

약리지는 감기 기운이 있다는 걸 눈을 뜨자마자 스스로 진단할 수 있었다.

'아.'

하긴. 요즘 빡빡하긴 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감기에 좋은 따듯한 차까지 마셨다.

그리고 마스크를 쓴 뒤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묶고 집을 나섰다.

평소엔 자차로 등교를 하지만 오늘은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짧은 시간이나마 눈을 좀 붙여볼 생각이었다.

지하철역이 멀다면 결국 소요되는 시간과 체력이 거기서 거기였겠지만 그녀의 집은 의선약가.

의료 단지 지하까지 지하철역이 이어져 있어 가능한 선택지였다.

그런 이유로 마스크를 쓴 약리지는 오랜만에 지하철에 앉아 잠시 눈을 붙여보려 했으나…….

"씨발 늙어 빠진 새끼들이 아침마다 자리를 차지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앉을 자리가 부족해지는 거 아냐! 맞아, 아니야?!"

"예, 그렇네요. 미안합니다."

'……뭐야.'

아침 지하철의 고요함을 깨는 불쾌한 소음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그녀가 탄 칸이 아니라 바로 옆 칸이었기에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고 약리지의 성격상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옆 칸으로 옮겨가 보았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건장한 남자가 자리에 앉은 젊잖게 나이를 먹은 노신사 한 분을 윽박지르고 위협하는 광경이었다.

"씨팔 나이 먹었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아침에 왜 굳이 기어나와서 우리가 앉을 자리를 차지하냔 말이야! 안 그래? 어?!"

"예. 미안합니다."

안 그래도 열이 오르던 그녀의 눈에 더욱 불이 나게 만든 건, 그렇게 윽박지르는 나쁜 놈에게 노신사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척 봐도 더러워도 보통 더러운 게 아닌 똥을 상대로 한 현명한 대처.

그러나 약리지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는 성격이었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저기요! 뭐하는 거에요, 지금!"

"넌 또 뭐야!"

참견하는 약리지에게 바로 살벌한 기세의 방향이 바뀌어 덮쳐든다.

그 기세는 심상치 않아서 약리지에게도 제법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무공을 오래 익힌 사람이네.'

정돈되지 않은 기세로 볼 때 경지가 그렇게 높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의 크기가 상당하니 무공을 오래 익혀 내공만큼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칸에 있었음에도 참견하는 이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약리지는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남사현만큼은 아니어도 그녀 또한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성격이었으며 그 성격을 뒷받침 할 최소한의 힘 정도는 있다.

이래봬도, 감기몸살에 걸리긴 했지만 그녀는 무려 약봉 약리지가 아닌가 말이다.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기세에 맞서 당당하게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무공을 익힌 사람이 노신사님을 상대로 그러는 거 안 챙피한가요?"

"이게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하고!"

남자가 쿵쿵거리며, 씩씩거리며 거리를 좁힌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이 수련 후 샤워도 안하고 나온 것 같다.

무엇보다 민소매 티를 입고 있어 보이는, 삐져 나온 겨드랑이 털.

그래. 그 번들거리는 시커먼 겨드랑이 털이 바퀴벌레급으로 극혐 그 자체였다.

"저기요. 더 다가오지 말아주실래요? 제가 속이 좀 안 좋아질 거 같거든요?"

"이년이!"

팩트에 기반한 인신공격에 남자는 다짜고짜 들고 있던 봉을 휘둘렀다.

약리지는 거기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오른손을 내뻗었다.

단순히 손만 뻗은 게 아니라 진각의 힘을 고스란히 담은 출수.

그리고 그 힘은 어느새 오른손에 들고 있는 판관필에 집중되었다.

약리지는 그 새하얀 강아지 같은 이미지와 달리 힘 대 힘의 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체구에서야 밀리지만 무공에서까지 밀리지는 않는다.

남자의 내공이 얕지 않지만 약리지의 내공도 어디가서 꿀릴 수준이 아니다.

여기에 무공에서의 우위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판관필의 한 점에 집중된 힘을 관자결(貫子訣)로 운용하는 게 아니라 파자결(波字訣)로 운용하여 때려박는다.

그러니까 판관필로 봉을 꿰뚫는 대신 그 힘을 봉을 매개로 하여 퍼뜨려 남자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 다음은 쉽다.

균형이 무너진 남자를 점접공으로 혈도를 제압하는 걸로 끝.

…그런 생각이었는데.

꽝!

'아.'

실패했다.

힘이 제대로 퍼지지 않았고 상대의 힘을 상쇄하는 것도 조금 삐끗하며 남자는 세 걸음, 약리지도 세 걸음을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물러나고 말았다.

실패한 건, 오산(誤算)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약리지가 감기에 걸려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무공의 구사가 완벽하지 못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의선약가의 무공은 섬세했는데 평상시와 다른, 감기에 걸린 몸을 고려하지 못하고 무공을 구사했으니 계산이 틀리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르륵-

깔끔하게 해소하지 못한 충격은 어설프게 묶었던 머리가 풀리게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약봉(藥鳳)이다!

지켜보던 이들이 약리지를 알아보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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