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무림맹(武林盟).
좁게는, 그리고 보편적으로는 정파(正派) 무림이 뭉친 기관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마교는 이런 무림맹과 단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여겨지며 그 대립 구도를 그리는 게 과거 무협지의 보편적인 구도였다.
굳이 과거라고 하는 건 요즘은 그렇게 획일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구파일방에 중소 문파까지 더해져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괴물'로 그려지기도 하며 반대로 그렇게 모인 문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름만 무림맹일 뿐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대의 무림맹은 전자에서 후자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아직 '무림(武林)'이란 게 정착되지 않은, 무림인들의 실력과 위상 또한 대단치 않았던 시절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목소리를 높이기 위하여 무림맹을 창설했다.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기에 무림맹에는 그야말로 무림의 힘이 다 모였고 무림인들이 강해지는 것에 비례하여 점점 더 비대해졌다.
무림 르네상스 초기까지.
국가를 초월하여 모인 무림인들의 무림맹은 비할 데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무림맹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건, 각 국가의 정치인들도 무림에 반대하던 이들도 아닌.
무림인들 스스로였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사회를 만든 건 사람이지만 이제는 그 사회가 사람을 톱니바퀴로 만든 것처럼, 무림맹을 만든 건 무림인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무림맹이 무림인을 부리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었을 때 무림인들은 단체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지배받기를 거부하였으니 그들로 구성된 무림맹은 혼란한 시기에 점차 힘을 잃게 된 것이다.
힘을 가진 가문과 문파는 무림맹을 떠나 각계와 이합집산을 통하여 실리를 챙겼고 무림맹은 결국 그럴 수 없는 '중소문파들의 연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무림이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어느 정도는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처럼 강제력을 행사하는 건 한계가 있었으니 그야말로 중소문파들의 연합이라는 말이 절묘하게 그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바로 그런 무림맹에서 도진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올해 무림대회(武林大會)에 천마신교를 초청합니다.
긴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면 이랬다.
무림대회.
각 나라 단위로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말 그대로 무림인들이 크게 모이는 행사였으며 5년에 한 번은 전 세계 단위로 열린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년은 5년에 한 번 전 세계 단위로 무림대회가 열리는 해였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건 나쁘게 말해 '중소문파 운동회'라고 불리지만 5년에 한 번 열리는 무림대회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크게는 서양과 동양, 작게는 사이가 나쁜 나라들끼리의 신경전이 되니까.
'흐음.'
바로 그런 시기에 초대장이 날아왔으니 도진의 입꼬리도 아주 조금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의 무림'이 모이는 무림대회.
거기에 천마신교가 참석한다는 건 과연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도진은.
-어찌할 테냐?
-참석해야죠.
망설이지 않았다.
-껄껄. 그래야지.
어차피 한 번은 전 무림에 천마신교가 어떤 곳인지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런 기회를 저쪽에서 만들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전 세계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하오문까지도 참석할 자리.
내년에는, 거기에 천마신교가 더해진다.
시기는 겨울이 가고 봄의 싹이 틀 무렵.
도진은 무림대회에 참석하겠다고 소천마의 이름으로 무림맹에 답신을 보냈다.
* * * *
스스로가 소천마임을 천명하고 천마신교의 부활을 선포하였지만 도진의 일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수련을 하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문파의 일을 처리한다.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것이 크게 흔들릴 만한 사건이 없는 한 루틴이 변할 일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밀도가 같을 수는 없었으니 천마신교의 틀을 갖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한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유아를 데려오지 못했다면 조금은 앓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도진이 생각할 정도로.
그 업무의 일환으로 오늘도 학교를 마친 도진은 문파의 일을 둘러보기 위해 산으로 향하였으니 다름 아닌 천마신교의 공사 현장을 방문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사 현장하면 중장비가 다니며 시끄럽고 흙먼지가 날리는 광경을 연상하지만 천마신교의 공사 현장은 달랐으니 중장비보다 사람의 비중이 더 높다.
이유 중 하나는 현대의 공사가 과거에 댈 수 없을 만큼 '자연친화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공(內功)이란 자연의 기(氣)를 정제하여 사람의 안에 쌓는 것이고 그렇기에 무림인에게 있어 '자연 보호'는 농담이 아니라 인생과 직결될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현대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연 보호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었으니 공사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때문에 천마신교의 본단 건설 또한 산을 훼손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건물들을 비할 데 없는, 예술품의 영역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도록 자금과 인력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 딴 생각하면서 일을 할 만큼 실력이 대단한가 보군?!"
"죄, 죄송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사람 중 한 명인,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명장 우벽진이 호통을 치며 '예술 작업' 중에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이에게 호통을 친다.
무려 명장 우벽진이 현장 감독 중 한 명을 맡고 있는 것이 지금 천마신교의 공사 현장이었다.
그는 단순한 의리가 아니라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장인 정신을 발휘하여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그에게 호통을 당한 이조차 이름있는 실력자였으니 이 공사 현장에 쓰이고 있는 자금이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하기도 두려울 지경이다.
물론, 슈미트라에겐 아니었다.
"무조건 최고의 결과만을 내야 합니다. 그 외의 모든 요소는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다른 곳도 아닌 천마신교의 본단이다.
바로 그런 본단을 짓는 데에 '최고' 이외의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가성비? 비효율?
슈미트라에겐 최고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곳의 풍경은 공사 현장이라기보단 도자기 장인의 공방을 연상케 하는 어떤 엄숙한 공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흐르는 곳에.
"좀 더 빠릿하게 움직여야지!"
"예, 예!"
세월에 거칠게 깎인 중년인의 호통에 다급히 몸을 움직이는 젊은 학생들이 있었고.
"죄송합니다. 아직 동생들이 조금 서툴러서요."
"아, 뭐. 그래."
그런 중년인에게 사과하는 현장에서도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청년, 벽태웅이 있었다.
* * * *
벽태웅이 젊은 학생들, 그러니까 보육원의 동생들과 천마신교의 공사 현장에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선배님. 저, 문파를 세워 보려 합니다."
"그래?"
"네."
일전 벽태웅은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근래에 그 말대로 문파를 세웠으니 '포부문(抱負門)'이란 이름의 현판을 내걸었다.
그것은 벽태웅이 가지고 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내딛도록 등을 민 것은 보육원의 동생들이었다.
일전 설탕파 사건에서 마약 운반 역할을 했던 불량 서클에 소속되는 잘못을 저질렀던 동생들.
'선'을 넘지는 않았기에 반성하고 용서받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가 당당할 수 없었기에 상당히 처진 모습을 보였다.
보호 감찰 조치 때문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했기에 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책하였고 벽태웅은 장남으로서, 고모와 고모부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
거기에 조언을 해 준 사람 중 한 명이.
"돈을 벌게 되면, 사람은 좀 어른스러워지게 돼."
천마신교 개파식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던 한 학년 선배 주정아였다.
오대용과 함께 멋드러진 커플룩을 차려입고 참석했던 주정아는 벽태웅과 대화를 나누다 그런 고민을 듣게 되었고 조언을 해 준 것이었다.
조금 얼굴을 못 본 사이 사회 물을 먹고 부쩍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두르게 된 주정아가 말했다.
"내가 아니고 우리 할아버지가 해 주신 말이야. 스스로 돈을 번다는 건 보호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사회에 부대끼며 사는 것. 노동의 가치를 알고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삶의 수행이 된다고 하셨거든."
주정아의 할아버지라면 호군자(虎君子) 주대운이다.
사자군 호군성의 친우이자 한국 무림의 명숙.
화가 나면 왜 사자군의 친구인지 보여주지만 평소엔 그야말로 군자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명숙의 말을 벽태웅은, 듣자마자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벽태웅이 그 말대로의 삶을 어릴 적부터 살았으니까.
그리고 그랬기에 주정아가 하고자 하는 말을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주정아가 벽태웅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생들도 스스로 고기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
"예. 감사합니다, 선배."
그 조언이 벽태웅이 문파를 세울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포부문의 목적에는 일전 김도진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강 노사님의 무공을 완성할 테니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문파를 세워도 좋을 거야. 황룡이란 별호도 얻었겠다 숭무고 졸업장도 있겠다 제법 잘 나갈 거야.
-그렇게 문파를 만들고 동생들에게 무공을 전수해서 돈을 버는 거지.
-돈을 많이 벌면 문파의 규모도 커지겠지? 그러면 보육원의 아이들을 더 고용할 수도 있을 거야.
-황룡의 문파 황룡문!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규모가 커지면 앞으로 더 생길 동생들이 무시당하는 일도 없을 테고 함부로 괴롭히는 놈들도 없어지겠지. 어때?
동생들이 왜 나쁜 유혹에 빠졌는지 안다.
그 자신 또한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고모와 고모부의 사랑을 편린이나마 깨닫지 못했다면 흔들렸을 유혹이었다.
부모님이 없다는 것. 혹은, 버림받았다는 것.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설령 이 악물고 노력해도 그 노력을 보장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것들이 얼마나 아이들을 무겁게 짓누르는지 벽태웅 또한 겪었기에 안다.
고모와 고모부는 아이들이 그런 경험을 하지 않도록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실은 냉혹해서, 고모와 고모부의 최선은 제대로 된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벽태웅은.
그런 세상이 싫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 허울뿐이란 걸 짧지만 결코 밀도가 낮지 않았던 삶을 통하여 질리도록 겪었다.
그러니까.
천마신교의 사상에 공감하였으며 또한 그 사상을 '사람의 힘으로' 실현하는 천마신교의 방식을 동경하였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렇게 직접 실현하기 위하여 포부문을 세웠다.
"서강아."
"응, 형."
그날 잘못을 저지른 동생을 포함하여 제법 머리가 굵은 녀석들 몇을 우선 불렀다.
스승님께 허락을 받아 포부문의 문도로 삼고 몇 수 가르치며, 함께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님."
"그래, 태웅아."
도진은 태웅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태웅의 뒤에 선 어린 친구들은 지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천마'를 직접 눈앞에 두었다는 상황에 바짝 긴장하고 있어 제법 귀엽게 보였다.
그리하여 미소짓고 있는 도진에게 벽태웅은 말한 것이었다.
"공사에 정식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