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꽈광! 꽈과과과광-!!
금화의 본사에서.
그것도 심처에서 폭음이 터졌음에도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고 경보조차 울리지 않았다.
선택받은 이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그곳에서는 그것이 법칙이었기에.
달칵.
그리고 내부의 소리가 잦아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끔한 모습의 한유성이 역시나 말끔한 모습의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온 한유성의 바로 옆에는 어느샌가 대기하고 있던 말쑥한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리해 두도록."
"예."
대답하며 허리를 깊이 숙이는 남자를 뒤로하고 한유성은 걸었다.
그가 부순 곳은 부회장실로 다른 곳도 아닌 무려 금화의 부회장실임을 생각하면 화를 이기지 못하고 가벼이 행동한 게 아닌가 싶지만, 아니다.
표면적으로 그가 근무하는 부회장실은 허울뿐이니까.
'진짜'는 따로 있었으니.
처억-
지금 한유성이 걸음을 멈추고 홍채 인식에도 모자라 내공의 형질까지 감별하고서야 문이 열리는, 금화의 직계 중에서도 선택받은 후계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놓인 그저 돈이 많은 것만으로는 구매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장인이 수제작한 의자에 그가 앉자 전면에 펼쳐진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모니터에 사람들이 표시되니 일본 카자카미 가문의 수장 카자카미 노보루, 대호문의 문주 태무진 등 유명한 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것은 곧.
이 화상 회의가 바로.
'무형독을 조종하는 이들의 회의'라는 것이었다.
가운데 놓인 스피커가 침묵하는 가운데 모두 모이자 70대의 노인, 카자카미 노보루가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일이 좋지 않게 흘렀나 보군?
한유성은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아는 못 쓰는 패가 되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건 결국 반골 기질을 억누르지 못할 거라고. 결국 그리 되었군.
-잠룡 그놈만 없었더라면 결국 꺾을 수 있었을 겁니다.
더욱 언짢은 표정이 되는 한유성을 돕듯 대호문의 문주 태무진이 말했다.
그러나 카자카미 노보루는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의미없는 가정이지.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야. 그것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싶군.
-동감이야. 우리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에 깊이 고민하고 싶진 않거든.
그렇게 말하는 건 서양인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영어가 아닌 '고대 무림어(武林語)'였다.
아니. 이 회의 자체가 고대 무림의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편한 표정의 한유성을 대신하여 태무진이 말했다.
-안민선을 대신하여 밀어줄 이를 구하였고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3년도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끌끌. 권력에 취한 인간은 멍청해지는 법이지.
-의천검가의 경우…… 동근출이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힘을 실어 주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놈 집착이 제법이니 괜찮겠군.
-예. 저희 대호문에 조금 더 기대는 형태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긍정적입니다.
대호문은 무형독, 아니 그 무형독을 부리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
의천검가마저 의도대로 움직일 만큼 거대한. 그것이 너무나 거대해서 한 눈에 보이지 않아 더욱 은밀한.
이번 일로 휘청인 의천검가는 그렇기에 앞으로 더욱 부리기가 수월해질 예정이다.
-이문강 그놈은 어떻게 할 건가?
-잠룡에게 패배하면서 심지가 꺾인 듯 보이더군요. 못 쓰게 되었습니다.
-쯧. 아까운 일이군.
이문강은 그들이 다루고 부리기에 더없이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아쉬운 소리가 나왔지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니, 한 번 기회를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기회를?
제안을 한 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심지가 꺾였으니, 파고들 여지가 많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대체할 수 있는 이문호도 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합니다.
-흐음…….
-나쁘지 않겠어. 나는 찬성이야.
-좋아. 나도 찬성하지.
하나의 안건이 가볍게 통과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럼, 한국의 스페셜 포스는 어떻게 할 거지?
스페셜 포스는, 그 또한 그들의 거대한 계획 중 일부였다.
작은 톱니바퀴.
그 톱니바퀴는 또 다른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거대한 계획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었다.
여기엔 한유성이 답했다.
"적당한 인물을 찾을 때까지 우선 교육을 하는 형태로 진행할 예정이다."
-교육?
"그래."
그 '교육'이란 은밀하게 주입되는 그들의 '사상(思想)'이다.
그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동화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회(會)'의 일원이 될 것이다.
-자네가 직접 교육을 해야겠군.
카자카미 노보루의 말에 한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군(金君) 한유성.
대한민국의 정점에 있는 그가 직접 수장이 없어 발족이 미뤄진 스페셜 포스의 교육에 나선다면 누가 거부하겠는가.
동시에 그럼으로써 스페셜 포스에 대한 금화의 영향력도 키울 수 있으니 이점이 많다.
그렇게 몇 가지 안건에 대한 논의가 오가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치직-
"……."
-…….
한유성의 앞, 그리고 그들의 앞에도 놓여 있던 스피커가 켜졌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흘러나오는 차분한 목소리는, 그들을 모은 이이자 그들을 연결하는 이다.
"무선."
그들은 그를 '무선(武線)'이라 불렀다.
"어떻게 됐지?"
-예. 정보를 찾아본 결과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 정보는 다름 아닌 자신을 '천마'라 칭한 김도진에 관한 것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이야기.
무선이 그에 관해 말했다.
-그는 이단자들, '마교'의 진전을 이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선의 말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모두 깊어졌다.
"마교?"
-예. 마교입니다.
-세상에 모습을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던 천마신교 내부에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큰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이단자들이 뭉쳐 천마신교를 탈주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천마가 되지 못한 부적격자 또한 있었는데, 그가 중심이 되어 천마신교를 탈주했고 이내 마교라 불리게 되는 광신도 집단이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그 말은."
-예, 맞습니다. 그들은 천마신교가 아니며 김도진 또한 천마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단의 후예입니다.
* * * *
또 한 번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또, 천마신교와 관련한 특종이 터졌기 때문이다.
-금봉(金鳳) 한유아, 김도진과 함께 하나?!
-한유아가 대표로 있던 회사 '화온' 폐업 신고서 제출 확인
이문강을 대신하여 금화와 의천검가가 합작하여 진행하던 스페셜 포스 프로젝트를 도맡았던 한유아가 금화의 본사를 찾은 김도진과 함께 떠나는 모습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페셜 포스 프로젝트와 관련된 업무에 사임함과 동시에 세상에는 생소한, 한유아가 대표로 있던 민간 무력 기업의 폐업 신고서가 제출된 것까지 확인이 되면서 온갖 추측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지?
-몬가..몬가 일어나고이슴..
-이건.. 그거지.
-?
-화화공룡이 또.. 봉을 잡아먹은 것이다..
-Aㅏ...............
-개소리하지마! 라고 하고 싶은데 킹능성이 보여서 말하질 못하겠네..ㅋㅋㅋ
-아..ㅋㅋㅋ 이문강이 싫은 건 맞는데 그렇다고 화화공룡이 또..ㅠㅠ!!
사람들은 그렇게 추측했다.
한유아가 '김도진 패밀리'에 합류할 거라고.
애초에 후기지수로서 숭무고에 다니던 시절에 이미 그녀는 김도진 패밀리로 인식되고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위한 기자 회견이 열렸으니 온갖 관심이 집중되는 게 당연지사였다.
김도진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한유아가 단상의 마이크 앞에 섰다.
그 뒤로 민지서, 그리고 화온과 화온 출신의 사람들이 보인다.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금화와 천마신교의 관계에 관한 한유아 씨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온갖 질문이 쏟아졌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역시나 그녀의 거취에 관한 것이다.
한유아는 그 아름다운, 마력과도 같은 매력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도진과의 대화를 되새겼다.
-리더라는 건 여러 타입이 있으니까요.
-그래?
-네. 구성원과 함께 나아가는 타입의 리더. 선배는 그런 타입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하고,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는 건 구성원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구성원들을 믿어 주고 또 함께 하는 건 아름다운 그림이지 않을까요?
-응,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선배가 원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해요. 나를 믿어 주고 나를 위해 헌신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상을 실현하는 리더가 되는 것. 선배가 바라는 건 그런 모습이겠죠?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서 아주 조금, 볼이 붉어졌을 거라고 한유아는 생각했었다.
-……응.
그래서 거짓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도진은 멋있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걸 목표로 노력하시는 것도 좋겠죠. 그러니까 욕심을 좀 부리는 거죠.
-욕심.
-네. 선배는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삶을 살았고, 그걸 강요당했으니까요. 못했던 만큼 더 큰 욕심을 부려보는 것도 벌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또 리더로서 조금 무책임한 행동이지 않을까.
한유아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마저 읽은 듯 도진은 말했었다.
-괜찮아요.
-뭐가?
-내가 있잖아요.
-…….
-선배는 리더지만, 리더라 해도 가끔씩은, 그리고 아직 부족할 때는 기댈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선배보다 위의 리더니까요. 그러니까 기대셔도 돼요. 아주 조금 손이 닿지 않거나, 아주 조금 힘이 필요하거나 그럴 때에, 내가 선배가 더 손을 뻗을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혼자가 아니잖아요?
한유아는 자신이 그때 어떤 얼굴이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저.
-……응.
하고, 기다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억울해서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하지만 잠깐이야.
-그래요?
능글맞게 웃는 도진을 마주하며 선언했었다.
-그래. 잠깐! 곧 그런 도움이 필요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될 거니까!
도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렇네요. 그것도 좋을 거 같아요. 이렇게나 귀여운 선배가 늠름해지는 것도.
-……!!
'…….'
쓸데없는 부분까지 생각해 버렸다.
한유아는 머릿속의 생각을 휘휘 날려 버리고 다시 표정 관리를 하고선 입술을 뗐다.
"저는 더 이상 '금화의 영애'나 '금봉'이 아니고 싶습니다."
"응?"
"……?"
예상치 못했던 시작에 의문의 시선이 모인다.
한유아는 그 시선들을 받으며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금화를 등에 업은, 금화로 제가 표현되는 삶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한 사람의 무인이자 리더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금화의 영애이자 금봉이 아닌 무림인 한유아로서."
"학교에서는 후배였지만 리더로서 배울 점이 더 많은 김도진. 그 사람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오롯이 한 사람의 리더가 되기 위해 천마신교의 일원이 되고자 합니다."
"오!"
"음……!"
웅성웅성-
작게 소요가 일어난다.
이미 예상했었던 대답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예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여파는 역시나 가볍지 않았다.
기자 중 한 명이 한유아의 선언에 내포되어 있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금화의 영애이자 금봉이 아니고 싶다는 말씀은, 금화의 직계라는 신분을 내려 놓고 싶다는 뜻이 담긴 것 같습니다만!"
기자의 질문에 한유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진과 '재미없는 농담'을 할 때의 얼굴로 말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음 같아선……. 그래요, 한유아가 아니라 김유아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