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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08화 (508/741)

507화

전생의 도진에게 있어 한유아는 태양이었다.

그러니까, 찬란하게 빛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

같은 세계에 있지만 땅을 기는 도진과 달리 저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마주 볼 수도, 마주 보아서도 안 되는 존재.

그렇기에 그녀가 겪어야 했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개인이 겪기엔 너무나 컸던 불행 또한 도진에게 있어서는 남의, 아니 아예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사는 삶에서는 아니었다.

인연이 이어졌다.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가 마음을 닫고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에 피상적인 관계에 그쳤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함께 하는 시간만큼의 인연은 쌓일 수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이며, 감당하기 힘든 어떤 것을 안고 또 지고 힘겹게 걷고 있음을.

허나 그녀는 그 짐을 남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나누기는커녕 감추려 했으며 손을 내미는 것조차 바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손을 내밀지 않았으며, 안타까웠다.

마음을 열지 않은 이에게 건네는 손은 '싸구려 동정'이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악의(惡意)가 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결국 도진이 알고 있던, 한유아의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의 첫 도미노가 쓰러져 버렸다.

전생에서는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천마신교 개파식에 참석한 것? 아니, 그보다 더 앞의 일.

바로 도진이 이청범을 무릎 꿇렸던 '말'이다.

가장 앞에 서는 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태도, 의무.

그런 것들이 또한 리더였던 한유아를 뒤흔들고, 망설이고 있던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동화라면.

혹은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이 약속된 이야기라면 그것으로 충분했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녀 스스로가 예상할 수 있었던 대로 그 한 걸음으로 인한 대가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으로 돌아와 그녀를 휩쓸었다.

전생에서의 한유아는…… 그로 인해 참혹한 결과를 맞이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그렇게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유아는 손을 뻗었고, 그 손을 잡은 도진의 뒤에는 그녀를 받쳐줄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거리를 좁혀 한유아의 손을 잡은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지서 선배가 열심이었어요."

"지서가?"

"네."

한유아의 시선이 도진의 한 걸음 뒤에 선 지서에게로 향했고 지서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외면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부끄러워 그런 것이다.

오래 함께 한 한유아였기에 대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유아 선배를 괴롭히기 위해서였겠지만…… 저한텐 오히려 기회였죠."

한유성의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본인을 괴롭히는 것보다 본인이 리더로 있는 집단을 괴롭히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그런 계산으로 한유아를 지탱하고 있는 이들을 건드렸다.

반발하거나 더 나아가 사표를 내는 것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표를 내면 더욱 좋다.

그렇게 사표를 낸 이들을 받아줄 번듯한 직장은, 적어도 이 대한민국엔 없을 것이었으니까.

금화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영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집단이 탄생하였으니.

천마신교가 있다.

물론 이야기가 간단할 수는 없었지만 여기에 민지서가 있었다.

한유아와 화온, 화온 출신의 사람들과도 모두 이어져 있는 사람.

가장 처음 한유아가 만났던 인재.

그녀가 모두를 이어 주었다.

"지서가 가자는데 안 갈 수도 없고 말입니다."

"다짜고짜 사표내고 다른 곳 가자는데 지서가 보장한다니까 바로 사표 던졌습니다. 낄낄."

"사실 제 꿈이 사표를 표창처럼 날려보는 거였는데 소원성취했습니다."

가볍게, 신나게 말한다.

거기에 담긴 감정들은 진심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포장한 '진짜 진심'도 한유아는 읽을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 그 만남과 함께 했던 시간을 빠짐없이 기억한다.

비록 시작은 금화의 힘을 빌렸지만 금방 홀로 우뚝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인재.

그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잡아야 하니 그럴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연구하였고 적용했다.

다만 어렸던 그녀는 한 가지를 빼먹고 말았으니, 거기에 마음이 섞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갑내기 소녀가 제법 재능이 있어 보여 물질적 지원을 해 주었는데 그 물질에 자신의 마음이 섞이고 그 비중이 오히려 돈보다 커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그러나 턱없이 재물이 부족했던 사람을 도왔는데 그 사람의 별 거 아닌 보답이 오히려 재물보다 크게 느껴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무시당하고, 겉돌았기에 받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감정을 그렇게 늦게 체험하여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무리하다 보니, 결국 금화를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확신했다.

앞으로도, 후회할 일은 없다.

그 감정이 담겨 그 어떤 보석보다 맑고 아름답게 빛나는 한유아의 눈을 마주하며 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런 걸 원했다.

도진은 착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좋았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잘 되는 것.

도진이 원하는 것이었고 천마신교가 원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 힘을 보태주기 위하여 천마(天魔)가 있는 것이다.

맞잡은 한유아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에 단단한 열기가 깃드는 것을 느끼며 도진이 말했다.

"유아 선배."

"응."

"우리 교가 겸직을 허용하긴 하는데, 이분들 책임지시려면 겸직은 힘드시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감이야. 그러니까 잠시 퇴직하고 올 건데, 기다려 줄래?"

"저는 이분들이랑 같이 가야 하는 입장이니까 기다릴 수밖에 없네요. 금방 오실 거죠?"

"물론이야."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잡았던 손을 손고,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하게 도진과 이어진 한유아는 당당하게 한유성을 만나기 위하여 걸어갔다.

도진은 그 등에 전음으로 무언가를 말했고 한유아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며 걷는 모습에서 그토록 화려하지만 한 번도 펼치지 못했던, 온갖 족쇄에 묶여 있던 날개가 드디어 펼쳐지는 듯한 모습이 신안에 비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도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지서 선배."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유아 선배는 한유성 부회장님이라 해도 지지 않을 거예요."

"…그 부분에 관해서라면, 교주님보다 제가 더 많이 믿고 있을 겁니다."

"하하. 그렇겠죠?"

도진은 유쾌하게 웃었고 민지서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 * * *

한유성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천마라고 떠벌리는 사기꾼 놈이, 그것도 자신의 조치에 사표를 던진 건방진 것들을 데리고 온단 말인가.

하물며 그 의도가 한유아에게 힘을 보태려는 것이라는 게 너무나 뻔히 보였기에 더욱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유아는, 바로 그런 때에 한유성을 찾아온 것이었다.

스으으…….

시리고 또 무거운 기분이 한유아를 엄습한다.

평생 그녀를 짓눌러온, 감히 닿을 수 없었던 '친오빠'의 기세였다.

하지만 한유아의 걸음은 둔해지지 않았다.

느려지지 않았다.

당당하게 그 앞에 섰고 해야 할 말을 하려 했다.

쿠웅-!

그리고 무형의 기운이 실체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낮지만 그래서 더욱 무겁게.

그녀를 바닥에 짓누르고 처박아 버리기 위해 쏟아진, 경계를 넘어선 인간의 분노였다.

그녀의 선언을, 선택을,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 한 수.

평생동안 맞서기는커녕 감히 받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무게.

그 무게에.

한유아는 여전히 두려워하면서도 망설임없이 맞섰다.

황익무(凰翼舞).

그녀를 대표하는 성명절기.

금화의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무공.

그러나, 진무(眞武)가 아닌 무공.

구우웅……!

황익무에 포함되는 조법(爪法)인 금황조(金凰爪)가 펼쳐지며 기운을 잡아챈다.

그리고 짓눌렸다.

그그그그…….

마치 쓰러지는 빌딩을 인간이 받치고 선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무겁고도 두렵다.

'예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럴 거라고.

그러니까 두려웠지만 한유아는 그 두려움에도 망설이지 않고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

금황조는 금화의 '금력(金力)'이 자아낸 무공이다.

그 압도적인 금력과 그로 인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만들어낸 무공.

그렇기에 대단하지만 단지 그뿐이어서 진무에 이르지 못했고 수단으로 선택된 한유아에게 전수되었다.

감히, 금군 한유성이 익힌 금화의 '진짜 무공'에 대적할 수 없다.

한유성도 알고 한유아도 알던 것.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다.

드드득-

"……!!"

그대로 부러져야만 했던 한유아의 손이, 금황조가 한유성의 기세를 파고든다.

마디 하나 없이 아름답고 새하얀, 그런 목적이 포함되어 있던 빛좋은 개살구인 금황조가. 금군 한유성의, 경계를 넘어선 고수의 기운을.

콰드드득-!

파고든다.

한유아는 알았다.

-신공(神功)은 마음을 담고 그것을 자아낼 수 있는 무공이에요.

도진이 해 준 말의 의미를.

'마술'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피땀 흘려 배워 온 무공이.

그저 눈속임이며 신비가 깃든 '마법'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거짓말처럼 자신이 구사하는 모든 것이 마법이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없음에도 자신의 뒤를 소중한 이들이 받쳐주고 있다.

홀로 감당해야 할 무게를 함께 감당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손에 겹쳐져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렇기에 이것은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다.

마법의 영역에 이르렀다.

퍼어어엉-!!

압축되었던 기세가 찢겨져 폭발하고 거센 기의 폭풍이 한유아의 찬란한 금발을 뒤흔든다.

그것이 마치, 족쇄를 모조리 분쇄하는 날갯짓처럼 보인다.

"일주일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대답이 바뀔 일은 없으니 시간 낭비라 판단하여 지금 다시 말하겠습니다."

한유아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회사, 관두겠습니다."

"……."

한유성의 눈이 무시무시하게 한유아를 노려본다.

하지만 이제 그 눈은, 한유아를 짓누를 수 없다.

"그리고 하나 더."

한유아는 오히려 당당한 얼굴로 그 예쁜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한유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유성. 너랑 호적 메이트인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뭐, 라……?"

"왜. 언제는 동생으로 생각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놀라? 그런 적 없잖아."

"그러니까 나도 그만둘 거라고. 이제 그런 건 바라지도 않거든? 조만간 한유아가 아니라 김유아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이 미……!"

"됐고! 네 대답 같은 건 들을 생각 없으니까 이만 갈게."

쾅!

한유아는 바람보다 빠르게 문을 세게 닫으며 나가 버렸다.

꽈과과광-!!

닫힌 문 너머.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굉음이 연달아 들썩였으나 상쾌한 얼굴의 한유아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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