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천마신교'와 소천마에 의해 그 이름을 박탈당한 의천검가의 세계를 뒤흔든 대사건에서 결코 제 3자가 아님에도 제 3자처럼 언급이 되지 않고 있는, 둘 못지 않은 커다란 세력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금화였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이자 세계적인 다국적기업.
한국 언론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앞다퉈 이번 사건에 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의도적으로 금화에 관해서는 언급을 자제했고 그 부분에서 금화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다른 관계도 아니고 '스페셜 포스'라는 희대의 집단을 합작하여 결성하고 의천검가의 소가주 이문강과 금화의 영애 한유아가 결합할 거라는 찌라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확정적이었던 이야기가 오갈 만큼의 관계였던 금화가 언론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금화의 노력과 영향력으로도 인터넷까지 완전히 틀어막을 순 없었다.
스페셜 포스와 한유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만큼 온갖 커뮤니티에서 한유아와 금화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나왔었다.
-ㅇㅇ검가 잣됐는데 스페셜 포스는 어케 되는 거임?
-중단한단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ㅇㅇ검가가 완전히 샷다 내린 것도 아니고 계속하는 거 아님?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천년 제국을 연상케 했던 의천검가의 근본부터 흔들리는 대사건이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천검가가 정말로 망한 건 아니었다.
기적과도 같은 변수가 없는 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이기에 스페셜 포스 프로젝트를 무조건 지켜야 하는 입장인 것이 의천검가였다.
-ㅇㅇ 뭐 따로 기사 없는 거 보니까 그럴 거 같긴 함. 금화도 의천검가 손절은 안했자너.
-아, 그렇네.
이문강이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거절하고 병원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서 외부 활동을 도맡고 있는 건 한유아였다.
철저하게 그 사건에 관한 언급은 피하고 필요 최소한의 활동만 하고 있지만, 어쨌든 스페셜 포스의 양대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서의 스케줄은 다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유아가 이문강이랑 정략결혼할 거라던데, 이거 아직도 유효한 건가 그러면.
-씨** 불길한 소리 하지 마셈.
-ㄹㅇ 족같은 소리 ㄴㄴ
-우리 유아 여신님은 안 된다 이응이응 놈들아
은밀한 찌라시였던 소문은 '절차'를 거쳐 어느새 일반 대중에도 퍼져 나간 뒤였다.
정말로 문제가 있다면 대번에 보도 자료를 내고 거짓임을 알렸을 이야기를 의천검가도 금화도 부정하지 않았기에 이것이 사실일 거라 짐작하는 이들이 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금화가 여전히 의천검가의 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천마신교 개파식에 모인 이들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금화의 영애' 한유아에 시선을 집중하고 경악한 것이었다.
그 별호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금을 녹여 자아낸 듯 빛나는 금발을 자랑하는 그녀가 안에 들어섰고 도진이 직접 맞이해 주었다.
"어서오세요, 선배."
"…살다살다 모바일 초대장을 받아보긴 처음이야."
"하하. 신선했죠? 그거 유일하게 선배한테만 보낸 거거든요. 온리 원!"
"기뻐해야 하는 거 맞지?"
"물론이죠!"
언제나처럼, 장난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시대엔 아직 어색한.
중요한 행사에서는 등장한 적이 없었던 '모바일 초대장'을 도진은 한유아에게 보냈고 한유아는 그것을 보이고 식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민지서와 함께.
"맥콜 마실래요?"
"…대표님은 데자와 좋아하십니다."
도진이 와인 잔에 맥콜을 따라 건네는데 곁에 있던 민지서가 칼같이 파고들어 마찬가지로 와인 잔에 데자와를 따라서는 막아섰다.
"…난 평범하게 와인 좋아하거든? 그런 게 왜 여깄는 거야."
"우리 관계가 어느새 그렇게 변했던가요?"
"변한 거 없거든?"
보는 사람도 재미없는 맥락도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토록 대단한 자리에서, 이토록 막중한 관심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언제나처럼.
그렇게 부담되는 자리에서의 보는 사람도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즐겁고 편안하다.
이곳에 오기까지가, 그렇게나 어렵고 힘들고 무거운 걸음의 연속이었는데.
* * * *
의천검가가 이름을 박탈당한 날.
한유아는 철저하게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어두운 곳에서 퇴장하였다.
그리고 절망의 연속이었다.
"당분간은 네가 프로젝트를 도맡아서 처리하도록 해."
"……네."
금화의 차기 회장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해 나가고 있는, 사실상 자타공인 금화의 대표인 금군 한유성.
사적으로는 친오빠가 되는 한유성 부회장의 명령에 한유아는 약간의 텀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할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에 대한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아주 약간.
기대를 했었다.
이번 일로 인해 이번 합작이, 그녀가 '트레이드' 되는 일이 없었던 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 기대는 철저하게 어긋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기대를 했던 스스로에 환멸하고 말았다.
한유성은 옅게 웃는, 그러나 철저하게 가면으로써 기능하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잘 된 일이지. 너에게도 그렇잖아? 네가 그렇게 원하던, 그럴싸한 집단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기회."
"……."
그녀로서는 결코 넘볼 수 없던 의천검가의 날개가 꺾였다.
현판을 잃은, 역사와 자긍심마저 잃고 몰락한 의천검가는 그러나 그 덩치만큼은 여전하다.
그것을 장악하라고 한유성은 말하는 것이었다.
…기만이었다.
의천검가를 장악하라고?
스스로의 인생을 다 바쳐 그것에 성공한다 해도.
금화에서 팔려간, 금화를 벗어날 수 없는 '금화의 영애'로서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던 것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
힘이 들어가려는 주먹에서 애써 힘을 풀었다.
꾸욱 주먹을 쥐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이 자리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잡종 따위가, '순혈(純血)' 앞에서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현 금화의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의 딸'이었으니까.
그래. 두 번째 부인의, 그것도 순혈이 아닌 딸.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이었고 그 피를 상징하는 것이 그녀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였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마력과도 같은 아름다움이라 칭송하고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금화라는 이름의 제국에서 그것은 저주였다.
철저하게 순혈주의에 물든 금화에서 그녀는 잡종이었다.
순수 한국 사람이 아니기에 직계임에도 배척당했고 심지어 순혈 중의 순혈인 그녀의 나이 차가 나는 오빠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황자'였기에.
한유아는 도태당했다.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뜻을 세우기도 전에.
그 현실을 이른 나이에 자각하고서는 이를 악물고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한 재능에 축복받았던 그녀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 된다, 고.
불가능하다고.
한유성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애초에 그것이 허락되지도 않는 것이라는 걸 현실로 알게 되었다.
차라리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면.
속물처럼 사는 데에 만족했다면 행복했을 것을.
그러나 한유아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족쇄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유아는 차라리 금화라는 이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금화의 잡종이 아닌 순수한 인간 한유아로서.
무림인(武林人) 한유아로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정답이 정답이 아니게 되는 세계.
정답이 아님에도 사람에 따라 정답이 되어 버리는 세계.
누구나가 옳은 것을 알고 있지만 말하는 순간 정답이 아니게 되어 버리는 세계.
그리고 '아니게 되는 사람'이 자신이 되는 세계에서 그녀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금화를 벗어나려 했는데 '금화의 영애'로서의 자신만이 남았다.
금봉(金鳳)이라는 별호마저 그녀에게는 벗을 수 없는 족쇄였다.
발버둥쳤다.
'예언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자신이 옳게 되는 판을 만들기 위해 한순간을 위해 하루를 투자하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또한, 그녀에게 결코 벗을 수 없는 족쇄가 되었다.
금화를 벗어날 수 없다.
금화를, 한유성을 거역할 수 없다.
그 시도를 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것들을, 그녀는 감당할 도리가 없다.
그녀가 상상하고 예측할 수 있는 모든 '예언'이 그 결과로 수렴하였기에.
겉으로는 저항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천마신교의 개파식에도 참석해서는 안 되었다.
"동근출 장로가 꼴에 주도권을 잡고 싶어서는 수를 쓰더구나."
한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한유아가 도진에게 문자를 보냈던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허물. 배신을 했다는 약점으로 언급하며.
그녀를 비난하지 않지만 그 또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녀를 옥죄려 든다.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수없이 많은 족쇄가 이미 그녀를 옭아매고 있음에도.
애초에 그녀에겐 개파식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초대장조차 없었다.
발송하지 않았는지, 혹은 한유성이 소각해 버린 건지 알 도리조차 없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은, 그러나 너덜너덜한 그녀의 심지를 끝장내기 위해서다.
이대로 시키는 대로, 순순히 팔려 가라.
그것만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한유성은 그것을 요구했고 수용하여 실행하는 순간, 한유아 자신의 삶은 끝을 고하게 된다.
싫다.
거기에 따르는 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하지만 그래서?
거부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지?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데.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될 뿐인데.
결국 도달하게 되는 답은 포기이자 순응이다.
이제껏 외면하고 있던.
의미없는 발버둥으로 거짓된 만족을 얻으려 했던 저항을 포기하고, 이제 유예 시간조차 다하였으니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맞았다.
최선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선.
그녀가 지금껏 발버둥치며 수없이 해왔던 선택의 연속.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 차선의 선택을 하기가 힘들었다.
민지서가 처음으로 술에 취해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저는, 한 대표님이, 당당하게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한유아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게 만들었고 지금 또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그날 후배에게서 보았던 것들이, 들었던 것들이 총명한 한유아가 도출해낸 '차선(次善)'을 뒤흔든다.
가장 앞에 서는 자로서의 의무.
대부분은 외면하고 타협하지만 도진은 타협하지 않았던 무겁디 무거운, 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만큼의 무게.
한유아는 이청범과 마찬가지로 리더였음에도 그 무게를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을 마주하게 됐다.
외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서, 아니. 후배. 너 때문이야.'
지서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한유아는 또,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휴대폰을 응시했다.
짧은 삶이었지만 듣도보도 못했던 것.
후배가 직접 보내준, 천마신교 개파식의 모바일 초대장이 그녀의 푸른 눈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예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상적인 최선이지만 그렇기에, 이상이기에 도달할 수 없는 최선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유아는 후배처럼 한 번.
이상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리더가 되고 싶었고 평생 내딛지 못했던 한 걸음을.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의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래, 드디어. 오판(誤判) 했구나, 동생아."
금화를 지휘하는 경계를 넘어선 이가 시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