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여론이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라지만 개파식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천마신교에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개파식은 결혼식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초대받은 이들과 함께 다시없을 축하를 받는 자리이지만 동시에 '홍보'의 성격을 겸하고 있어 무림맹이나 기자단에도 필요한 만큼은 초대장이 발송된다.
그런 식으로 뿌려지는 '손님'으로서의 초대장을 받은 이들 중에 그동안 도진과 악연으로 엮인, 개파식을 망치기 위하여 찾아온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이미지 등의 복구에 허덕이고 있는 관현 그룹이나 안민선 국회의원의 라인을 탔던 이들 등등.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는 얼마든지 교차할 수 있는 이들의 집합.
비록 도진에 의해 크게 손해를 입거나 몰락했다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그들은 의도치 않았으나 똘똘 뭉쳐 개파식을 망칠, 천마신교를 흑도라 매도하기에 충분한 덩치를 키우게 됐다.
심지어 의천검가의 여론전으로 인해 어느 정도 여론의 토대도 마련되었으니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이 자리에서 '분탕질'만 하면 되는 판이 갖추어졌다.
……고 그들은 생각했으나.
"……."
판을 벌이려던 그들은 잠시 숨을 죽이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는 이를 지켜보아야만 했으니 거기에 있는 것이 무려 바할라 왕국의 슈미트라 왕세자였기 때문이다.
나비 슈미트라 아울 바할라.
지금 그는 세계 무림의 중심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애초에, 유명하지 않은 때에도 그는 그랬다.
당연하지 않은가.
알려지지 않았다뿐이지 그의 나라 바할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이었으니까.
그 산유국 왕가의 왕이 될 사람이 영향력이 없으면 누가 영향력이 있겠는가.
다만 업계와 관련이 있거나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유명하지 않은 산유국의, 그리 알려지지 않은 왕세자'를 몰랐기에 이름이 알려지 있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 바로 이곳 개파식의 주인, 김도진과 얽힌 사건이었다.
음지에서 활동하던 무형독이 양지에 드러난 대사건.
그 사건을 통하여 무형독의 절멸을 선언하고 중심에서 물심양면으로 활약하며 슈미트라 왕세자는 유명해진 것이다.
자금력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그의 무력이 자금력만큼이나, 웬만큼 이름 있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대단했다는 건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놀람은 더욱 컸다.
-오일 왕자님;;
-산을 샀습니다(안비쌈)
-(진짜 안비쌈)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한국에서는 김도진과의 친분으로 인해 특히 더 유명하고 친근한 이미지였으니 그의 발언에 실시간 채팅창이 더욱 소란스러워진 것이었다.
기자가 발언했다.
"그, 터라고 하시면……."
슈미트라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능숙한 한국어로 답했다.
"우리의 터전이지 않습니까. 허투루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파식을 너무 오래 미루는 것도 좋지 않으니 오늘은 첫 삽을 뜨는 날의 기념까지 겸하여 개파식을 진행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그러시군요……."
사실 웬만큼 큰, 더 나아가 '대기업'이라고 할 정도로 큰 문파나 가문 정도 되면 소유한 토지나 건물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도 서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 하나를 통째로 문파의 거점으로 삼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어디까지나 '터'에 불과하니 터 위에 지어질, 그것도 오일 머니로 지어질 천마신교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상상도 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거기에 대부분이 정신이 팔려 있던 중 핵심을 잡아낼 수 있었던 기자 한 명이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방금 우리의 터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에 관한 조금 더 자세한 말씀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오……."
모두가 질문을 잘 했다는 시선을 기자에게 던지고선 다시 슈미트라에게 집중했다.
그래.
바할라 왕국의 왕세자 슈미트라.
그는 분명히 자신 또한 '마교도'라 정식으로 밝혔었다.
세계의 모든 언론이 그에 눈이 뒤집혀 인터뷰를 요청했었으나 슈미트라는 모든 것을 이번 개파식으로 미뤘던 것이다.
때문에 몸이 달아 있던 이들에게 슈미트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약속이었지요. 맞습니다. 저는 천마신교의 일원입니다."
"오오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평범한 나라도 아니고 바할라의 왕세자가 천마신교의 일원임을 또 한 번 정식으로 천명했다.
중요한 건.
슈미트라의 이 발언에 관해 바할라에서도 논란이 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한 나라의, 그것도 왕이 될 사람이 교주도 아니고 '종교의 일원이었다'는 발언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바할라가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150년 전 나라라 하기도 힘들었던 바할라의 토대를 닦은 전설의 왕.
그로부터 시작된 '천마신교의 정신'이 뿌리내리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 지금의 바할라였기에.
그리고 이제 그 전설의 왕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슈미트라는 세상에 공개할 수 있었다.
"나는 천마신교의 기둥 중 한 분이셨던 탁탑마왕(托塔魔王) 구지천의 진전을 이은, 당대의 투마(鬪魔)의 이름을 계승한 나비 슈미트라 아울 바할라입니다."
"……!!"
당대 투마의 선언이 식장을 강타한다.
단순한 선언이 아닌, 자긍심과 투마로서의 투기를 담은 선언이 무형임에도 강렬한 충격이 되어 사람들을 뒤흔든 것이었다.
그들은 탁탑마왕이 어떤 무인이었는지, 투마라는 별호가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슈미트라의 선언으로 그것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독마(毒魔) 하연화의 진전을 이은 당대의 독마, 위취련입니다."
슈미트라의 존재감에 전혀 뒤지지 않는 무인이 한 명 더 있었으니 독마 위취련의 선언 또한 식장을 채우고도 남음이었다.
그녀는 한 나라의 왕세자가 아니었으며 뚜렷한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그나마 견식한 건 유지은과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한, 바할라의 사건에 함께 했던 장로 유화성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자로서의 존재감'이,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화경이…… 한 명이 아니었다고?"
"이런 전력이……."
"이 정도는 돼야 마교란 거군."
도진은 위취련의 모습에 슬쩍 웃었다.
-투마전과 독마전이 앙숙인 건 어쩔 수 없는 전통이로구나.
-하하하. 그렇네요.
평소 위취련은 무공을 뽐내지 않는다.
무려 경계를 넘어선 고수였음에도.
하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투마전에 질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기세를 드러냈으니 슬쩍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진의 주변에 모인 이들 하나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기자들 중 한 명이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정의검가의 대표로 참석한 유지은에게 물었다.
"정의검가의 이름으로 마교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조금 부담되진 않으셨나요?"
유지은은 웃으며 질문한 이가 무안할 정도로 간단히 '아뇨'라고 답해 버렸다.
"후배가 교주로 있는 문파잖아요. 부담이 왜 되죠?"
"……."
역으로 그렇게 물으니 순간 대답이 궁해져 버린 기자였다.
유지은은 입을 다물어 버린 기자를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후배는 말이죠, 나의 꽃, 아니 목표거든요."
"이건 제 자랑이 아닌데 자랑이 될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뒤따라오는 사람 하나 없는 길을 혼자 가는 건 정말로 힘들고 무서운 일이란 말예요."
그녀에게 주어진 압도적인 재능은 누구나가 부러워 하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목표가 될 수 없고 누구도 옆에서 같이 뛰어줄 수 없어요. 심지어 뒤에도, 아무도 없죠. 그 고독이란 게…… 나는 너무 익숙했어요. 아니 처음부터 그게 당연한 줄 알았죠. 그래서 망가지려던 순간에."
유지은의 시선이 도진을 향한다.
"후배가 나타나 준 거예요.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려줬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려! 나의 목표가 돼 준 거예요. 나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나타났고 내가 전력을 다해도 따라잡혀 주지 않을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심지어, 너무 멀어지거나 내가 지치려 하면 등을 밀어주기까지 하는."
"아, 지금 생각하니까 대답이 좀 안 될 수도 있겠네요? 에이, 뭐. 어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예요. 후배는 옳다!"
"……."
기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게 논리적인 대답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논리를 떠나 그 감정이 대답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김도진에 적대적인 그였음에도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유지은을 시작으로 해서 보이고 말았다.
"이것이 잘못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비봉(秘鳳) 서소담이 흔들림없는 신뢰로 가득한 그림같은 미소를 지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두려워서 길을 벗어나 도망치려 했을 때. 나를 잡아준 게 도진이였으니까요."
"아무리 어두운 길이라도 도진이가 비춰줄 테고 그곳이 분명하게 올바른 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나는 아마, 아니. 절대로. 평생 하지 않을 거예요."
빙봉(氷鳳) 윤상미에게는 감히 그런 질문을 던지지도 못했다.
그녀의 눈에 담긴 신념은, 의심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을 만큼 절대적이었기에.
무공의 고하를 떠나.
그리고 신분의 고하를 떠나.
누구 한 명 빛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 신념에 틈이 보이는 이조차 한 명 없었다.
심지어 천마신교의 교도가 아닌 웨일스 후작부터 시작하여 상대적으로 그 연결이 옅다 생각했던 TJ 그룹의 서태주까지도.
그들의 시선은 김도진을 향해 있었으며 김도진을 중심으로 하여 흔들림이 없다.
중요한 건, 그런 김도진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의 관계가 결코 경직된 수직 관계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도진은 태양이다.
그러나 그 태양은 균등하게 빛을 내리고 있으니 모두가 빛나게 만들었다.
본래는 함께 하기 힘들었을 이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로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순간 그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의천검가는, 결코 천마신교를 어찌할 수 없음을.
당시 김도진의 이청범을 무너뜨린 칼보다 냉혹했던 말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만다.
그 말이 어째서 그토록 무게감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싫어도 알게 된다.
"장로님."
"…닥치고 밥이나 먹어."
의천검가의 사주를 받고 온, 그들의 지원으로 한국 무림맹의 장로가 된 이조차 그를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감화된 게 아니다.
이미 찌들대로 찌든 성격이 씻긴 것도 아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명료하고도 눈이 부신 광경에 그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어라 하든.
준비를 얼마나 했든.
이 자리에서 천마신교를 뒤흔드는 건 불가능했다.
태양을 가리키며 삿대질하는 우스꽝스런 놈이 될 뿐이다.
'…손절할 때구먼.'
의천검가의 치들은 분명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온 그를 비난할 것이다.
그동안 받아처먹은 게 얼만데.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냐면서.
생각이 있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그들이 생각이 없다는 걸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손절할 때다.
분명히 그 또한 큰 손해를 보겠지만, 짐을 버리는 게 싫어 침몰하는 배에 남을 만큼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고 또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던 그는, 조금 늦게 안에 들어서는 'VIP'를 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어?'
햇빛에 아름답게 빛나는 금발.
그리고 일렁이는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마력에 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녀는.
"그, 금봉(金鳳)이다."
"한유아가 왔다고?"
금화의 영애, 한유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