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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504화 (504/741)

503화

의천검가가 몰락하고 잠룡문이 이제는 천마신교임을 선포하던 때까지.

도진과 잠룡문은 파란의 중심에 있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대로, 패배한 의천검가는 그 빛보다 어두운 진창에 처박혀야만 했다.

-ㅇㅇ검가는 이제 어떻게 될까?

-ㅇㅇ검가? 의천검가?

-ㅇㅇ 이제는 이름이 사라진 그 ㅇㅇ검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응이응검가..

-어떻게 가문 이름이 이응이응ㅋㅋㅋㅋㅋ

-이응이응 이러니까 좀 커엽네 ㅋㅋㅋㅋ

-미친놈들ㅋㅋ

조롱과 모멸감에 몸이 떨리는 걸 억누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주대낮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주가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무력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릇으로도.

오히려 무력 이상으로 가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도진의 말이 이청범을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뿐인가.

또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의천검가의 무인들이 무릎 꿇고 대가리를 처박은 가운데서 김도진은 의천검가의 긍지를 먼지로 흩뿌려 버렸다.

그리고 의천검가는 '의천(義天)'이라는 이름을, 명예를, 역사를, 긍지를.

박탈당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명문가에서 이름마저 잃은 하찮은 가문으로 굴러떨어졌다.

상황은, 이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리고 그 최악을 더욱 더 최악으로 이끄는 건, 그에 대한 반성을 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란 걸 깨닫지 못하는 그들 스스로였다.

줄을 댔던 이들이 그 모습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의천검가에 입문했던 직계가 아닌 외인(外人)들 또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중이다.

이토록 심각한 상황에서 더욱 의천검가에게 치명적인 건 사태를 수습하고 그들을 이끌어줄 이가 부재(不在)했다는 것이다.

"봉문(封門)……하게."

김도진에게 무릎 꿇었던 이청범이 두문불출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가주령(家主令)이었다.

봉문(封門).

문을 걸어잠근다.

문파로서 일체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것.

이 현대에서,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의천검가가 선택하기엔 너무나 치명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가주령임에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장로들의 모임인 장로회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봉문이라니. 가주가 충격을 워낙 크게 받아 실언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가주에게 그런 태도는 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뭐요?"

"어허. 다들 상황이 이런데 싸우자고 모였습니까?"

…그리고 개판이었다.

이청범이 충격에 두문불출하는 상황인데 심지어 장로회를 이끌어야 할, 지금껏 수십 년을 흔들리지 않고 이끌어 온 동근출조차 입원중이라 참석하지 못해 벌어지는 추태였다.

가장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자는, 막상 그 앞에 서면 무얼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것들이 완전히 생소해지고 만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자질이 있어도 무수한 경험을 쌓고 가다듬어야만 하는 가장 앞에 서는 자로서의 소양.

그것을 가진 자가 지금 의천검가엔 없었던 것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이청범과 동근출이 의천검가를 꽉 잡고 이끌어 왔기에.

특히나 장로들의 경우 동근출이 수십 년을 앞장 서서 모든 걸 수행해 왔으니 더욱 부작용이 크게 나타났다.

하다 못해 소가주 이문강마저 입원중이어서 지금의 의천검가는 그야말로 선장없이 가라앉는 배였다.

기껏 목소리가 가라앉고 나온 의견이란 것이.

"차라리 현판값을 물어내라고 할까요?"

"뭐요?"

"아니, 그렇잖습니까. 의천검가의 현판은 왕실이 내려준 국보인데 그걸 훼손했으니 따지고 들면……."

"박 장로. 되는 대로 내뱉지 말고 생각을 좀 합시다, 생각을."

"뭐, 뭐요?"

"아니 씨이벌. 지금 그걸 물어달라고 하면 안 그래도 체면 다 구긴 상황에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판단이 안 됩니까?"

심지어 정말 국보도 아니다.

이유를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당시 정부와 의천검가 사이의 복잡미묘한 정세로 인해 국보 지정을 의천검가가 거부했던 탓이다.

"…아니 근데 씨발 말을 해도 꼭."

"어허! 싸우지들 좀 맙시다, 좀!!"

눈앞이 깜깜해져 앞이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있는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를 짚었다.

이제 정말 가라앉을 일만 남은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절망했을 때.

"…정숙하시오."

"헉! 동 장로!"

"수, 수석 장로님!"

마치 구세주처럼, 병원을 박차고 나온 동근출이 나타난 것이었다.

* * * *

동근출.

전대 가주 때부터 의천검가를 이끌어 온 장로회의 수장.

이 씨가 아님에도 수석 장로 자리에 앉아 수십 년을 흔들림없이 자리를 지켜오고 장로들을 이끌어 온 자.

비록 그 방향이 좋지는 않았으나 평생을 의천검가를 위해 살아온 그는 놀랍게도, 김도진이 선사한 절망마저 이를 악물고 버텨내며 병상을 박차고 나왔다.

피폐한 모습이라고는 하나 그의 등장으로 회의는 거짓말처럼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묘수가 나왔다.

"여론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지."

천마신교.

그러나 보통 마교(魔敎)라 불리는 집단에 대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이미지는 '나쁜 집단'이다.

그러니까 요즘 들어 마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오히려 위선을 타파하는 '우리편'이라 생각하는 추세가 있지만 보편적으로, 어쨌든 마교는 나쁜 집단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거다.

"그걸 잘 이용해서, 일단은 여론을 돌립시다."

다행히 의천검가는 이쪽에 있어서는 스페셜리스트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문강 때의 사건을 통하여 극한 상황마저 경험해 보았으니 더더욱 거침없이 일을 추진하고 성과를 거두었다.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김도진이 사람들 끌고 가서 정문 부수고 사람을 입원시킨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솔직히 나도 그런 생각 좀 하기는 했음.

-아무리 무림이란 게 있다지만 그래도 중세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칼부림하는 건 좀…….

-그럼 쳐맞을짓을 하지 말든가 ㅋㅋㅋㅋㅋ

-아니, 의천검가 이미지가 좀 씹창이라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김도진이 밝히지도 않고 있자너. 사실 그냥 별 거 아닌 명분으로 일 벌인 건 아닌가?

-씹; 그거 김도진이 아버지 명예 때문에 존나 의천검가에 치명적인데 밝히지 않은 거라자너 ㅋㅋ

-ㅇㅇ 부모님 건드렸으면 뒤지도록 쳐맞을 각오 했어야지.

-그걸 의천검가 상대로 실행한 게 너무 멋져! 동경하게 돼!

-;;그것도 또 모르는 거지. 나는 좀.. 중립 기어 박아볼까 함. 애초에 마교임;; 사실은 정파가 아닐 수도 있는 거지.

-마교라고 하니까 듣고보니 좀 몬가몬가.. 싶긴 하네.

티나게, 급격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천검가를 욕하는 듯 하면서도 중립인 듯,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의도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도록.

사이사이에 개입한다.

그런 식으로 '마교'의 부분을 부각시키고 조금씩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소천마(小天魔) 김도진. 천마신교(天魔神敎)의 개파식 선언!

스스로를 소천마라 천명한 김도진이 기어이 천마신교의 개파식을 선언해 버렸다.

동근출은 기회라 생각했다.

"흔들리는 이들을 붙잡고 결집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교를 뒤흔들어야 합니다."

전 세계 단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이기에 아주 자그마한 자극만으로도 큰 흔들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작은 것이라도 논란을 만들면 크게 번질 것이고 그것을 의천검가는 기회 삼을 수 있다.

나락에 떨어졌다지만 의천검가는 그래도 의천검가다.

무림만이 아닌 정계에서마저 중심이 되는 명문가.

그렇기에 아직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많았고 그것을 이용하면 큰 논란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강력한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 느슨해진 관계도 더 단단히 할 수 있다.

그런 생각과 계산으로 동근출의 지휘 하에 움직이던 의천검가는.

-명성 공방, 천마신교의 우방 선언!

"어?"

-정의검가, 검봉 유지은이 직접 축하를 위해 방문할 것으로…….

"이……."

-오성 그룹, 사자군 오군성의 명의로 화환 전달! 참석 명단에 오대용 대리의 이름도 보여…….

"미친!"

개파식에 참석할 거라는 이들의 명단에서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명성 공방을 포함하여 도진의 인맥이 심상치 않은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인맥이, 다른 곳도 아니고 '마교'를 표방하는 김도진을 대상으로도 굳건하며 외부에 즉시 표출할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오히려 '마교'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웨일스 후작가에 덴젤 공방, 의선약가, 심지어 대중에 대한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그 이상인 안티체리에 레드슈 등 연예인에 인플루언서들마저 개파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에 무슨 국제적인 축제가 열린 듯한 모양새였다.

그 압도적인 면면에, 동근출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여론전이란 건 결국 편가르기이며 내 편을 더 많이 만드는 게 핵심이다.

한데 거기서 제대로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김도진, 마교 쪽으로 세력이 훅 기울어 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속보! 바할라의 왕세자도 마교도였다!

…라는 속보였다.

"수, 수석 장로."

"어떡합니까?"

다른 장로들이 동근출에게로 시선을 모은다.

동근출은 거기에 화내지 않았다.

평생을 겪어 온 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해 볼 만큼 해 봐야지요."

평생에 없었던, 어떻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은 처음이었기에.

동근출은 또 처음으로 자신감이 담기지 않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

천마신교의 개파식은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바할라 한국 지부, 그러니까 쌍둥이 빌딩에서 열렸다.

오일 머니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화려무비한 쌍둥이 빌딩은 과연 천마신교의 개파식 장소로도 빠지는 부분이 없었고 그곳에 모인 이들의 면면은 쌍둥이 빌딩 이상으로 빛나고 있었다.

"축하해, 후배!"

"아, 감사합니다. 선배."

정식으로 이야기가 끝난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용성보다는 예식과 멋에 치중된 정장 무복을 입은 유지은이 선녀처럼 날아 도진과의 거리를 좁히더니 덥석 안았다.

애정 표현이라기보단 예의 '아메리칸 스타일'에 가까운 인사였고 도진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담담히 그 인사를 받아주고 마주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곁에서는.

파르르…….

소담이 몰래 주먹을 떨었고.

사아아아아…….

상미가 급속히 주변 온도를 낮추는 냉기를 흩뿌렸다.

냥!

도진이 상미에게 맡겼던 솜이가 시원하다며 기분 좋게 울었다.

"…손님들 면면을 보면 이 정도면 진짜 천마신교네."

"그러게 말입니다. 누구 한 명 안 유명한 사람이 없네."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간에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기는 했다.

'천마신교는 결국 마교 아님?'이라고.

까딱 이미지가 잘못 씌워지면, 최악의 경우 무려 김도진이라 해도 정말로 흑도 낙인이 찍히는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과장이 아닐 만큼 '마교'라는 이름은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이제 볼 수 없을 거라고 지켜보는 이들은 생각했다.

흑도의 이미지를 씌우기에는, 그렇게 몰기에는 지금 이곳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이 대단해도 너무 대단했으니까.

그리고 그 정점이.

"슈미트라 왕세자님."

"소천마를 뵙습니다."

"슈미트라 왕세자다!"

"정말로 와 버렸잖아……."

직속의 왕실타격대 엑소시아와 함께 참석하여 도진과 인사하는 바할라의 왕세자, 슈미트라였다.

그와 함께 한 자리에서 기자들은 1면을 장식할 특종이 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아쉽게도 교의 완공식에 맞추어서는 너무 늦을 듯하여 이렇게 임시로 바할라 한국 지부에서 개파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 여기가 천마신교가 아닌가요?"

도진의 말에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쌍둥이 빌딩은 웬만한 문파의 본가도 비빌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규모였다.

그런데 여기가 그저 바할라 한국 지부라고?

기자들의 의문에는 곁에 있던 슈미트라가 답했다.

"예. 이곳은 그저 바할라의 한국 지부일 뿐입니다. 천마신교는 저곳입니다."

슈미트라가 한 곳을 가리킨다.

기자들의 시선이 슈미트라의 손가락을 따라갔고.

"산?"

거기에는 산이 있었다. 거대한.

그런데 건물이라곤 하나 없어 말 그대로 순수한 산뿐이었다.

그 산을 가리키며 슈미트라가 말했다.

"터가 적당해 보이길래 샀습니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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