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처음엔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을 만큼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은 이윽고 거센 분노가 되어 이청범을 뒤흔들었다.
"가볍다? 가볍다고?!"
그것은 가진 모든 것을 다했던, 생애 과연 다시 펼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쌓아온 모든 것과 긍지까지 다하여 펼쳐냈던 일검이었기에.
경계에 이른 고수였던 이청범이 화(火)에 휩싸여 소리치게 만든 것이었다.
맞댄 검의 너머에서 소리치는 이청범을 도진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저 담담히 응시했다.
그리고 외치는 그를.
뻐억!
"컥."
걷어차 버렸다.
꼴사납게 나뒹군 이청범의 모습에 또 한 번 경악이 겹쳐 내린다.
그 가운데서 도진이 말했다.
"왜. 인정하지 못하겠나? 자신의 검이 가볍다는 것을."
"모욕을!"
빠악!
"모욕? 스스로의 검이 어떤 것인지도 인지 못할 만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이 모욕을 입에 담는 건가?"
나뒹군 이청범이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난다.
"이청범."
도진은 그런 이청범의 화에 휩싸인 두 눈을 마주하며 다시 한 번 고했다.
"너는 의천검가의 가주라 자칭할 자격이 없는 가볍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
이청범이 발작하려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도진의 말이 깊게 꽂혔다.
"이문강을 왜 막지 않았지?"
"……."
"무얼 하려 했는지 알고 있나? 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려 했고 그래서 징치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지."
"이문강은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해악을 끼치며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세상의 병균이며 해악 그 자체다."
"소가주가, 아들이 그런 평가를 듣는 게 화가 나나?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계도하지 않았나?"
"……."
"이문호는 심성의 깊은 곳까지 썩은 인간은 아니었다. 잘 계도하면 충분히 좋은 인간이자 무인으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넌 그러지 못했다."
"동근출을 포함하여 썩어빠진, 의천검가의 썩어빠진 부분도 도려내고 정화하기는커녕 거기에 동조하였지.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를 동정하거나 도우려는 이는 없다. 오히려 잘 됐다 생각하는 이들만이 가득하지."
"이청범. 너는, 의천검가의 가장 앞에 서는 이이자 모두를 이끌어야 할 이로서 무엇 하나 하지 못했다."
"그런 네놈이, 네놈의 검이 무겁기를 바라나?"
이문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바로 앞서 느꼈던 전능감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모두 빠져 나가 버린 것처럼 무력함을 느꼈다.
혹자는 가혹하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말처럼 쉽게 되는 거면 누가 고생하겠느냐고.
맞다.
아이가 부모의 의도대로 바르게 자라는 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일이며 노력만으로 이루기가 지난하다.
비대해져 버린, 개인이 움직이기엔 너무나 커져 버리고 주변과 얽혀 버린 집단의 일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기에.
모두의 가장 앞에 서고 때로는 가장 뒤에서 밀어 주어야 하는 이는.
한 가문의 가주(家主)는 그걸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청범은 대한민국 최고의 가문의 가주로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무게를 알고 있었으나 외면했기에.
도진의 말에 무엇 하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오늘 의천검가가 맞이한 모든 것은 너의 책임인 것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짊어지지 않아 가볍기 짝이 없는 네가 초래한 일."
"이청범. 너는 가주로서 자격이 없다."
털썩!
도진의 선고에 이청범이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도진에 의한 것이 아닌, 지금껏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했던 무게를 비로소 제대로 지게 된 이청범 스스로의 자괴였다.
도진은 그렇게 무너진 이청범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의천검가의 부서진 정문 위 가문을 상징하는 현판을 향해 걸었다.
"너희는 감히 의로운 하늘, 의천(義天)이라 스스로를 칭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오늘 그 이름을 박탈할 것이다."
"막아!!"
담담하고 조용하지만 너무나 선명한 선고에 의천검가의 중역 중 한 명이 절규하듯 외쳤다.
이름의 박탈.
가문과 문파를 상징하는 얼굴인 현판을 부수려는 도진의 의도를 읽었기에 나온 절규였다.
현판을 파괴당하는 건 말 그대로 이름이 부서지는 것과 같다.
명예의 소실(消失).
대한민국 왕실의 진무를 계승했다는 그 어떤 곳보다 높은 명예를 자랑이자 무기로 삼아 온 의천검가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웅-!
"컥!"
쿠쿵!
도진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던 이들은 그 주변에 이르는 순간 강제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구우우웅-!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도진의 걸음마다 그들을 짓누르는, 마치 세계가 그들에게 가하는 듯한 압력이 강해져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말단의 무인부터 의천검가 직계 고수들까지도.
단 한 명도 거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주변에 그렇게 무릎 꿇고 고개 숙인 그들의 모습이 마치 도진을 경배하는 것만 같았다.
"저거……."
"그거……지?"
경이로운 광경에 지켜보는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의 무공을 떠올렸다.
실재한다 생각하지 못했던.
환상에 있지만 그래서 더욱 경이로운 하나의 무공을.
도진이 백설을 들었다.
스각-!
왕실에서 직접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백 년을 넘은 의천검가의 긍지는 허무하리만치 깨끗하게 둘로 갈려 떨어졌다.
파스스…….
그리고 허공에서 잘게 부스러져, 고개를 처박은 의천검가의 무인들 머리 위를 흩날렸다.
* * * *
그날.
세상이 뒤집혔다.
대한민국의 무림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가, 그리고 세계 전체가 의천검가의 일을 떠들어댔다.
-뭐? 의천검가가 무너졌다고? 농담이지?
-이건 농담조차 못 될 악질적인 헛소리인데.
의천검가는 세계의 무림에도 잘 알려져 있을 만큼 유명한 가문이다.
적어도 무림을 사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의.
그 가주가 경계를 넘어선 고수였으니까.
한데 그런 가주가 있는 가문이, 그것도 한 나라에서 한 손에 꼽히는 가문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하니 악질적인 헛소리라 하는 것도 심한 게 아니었다.
-너희 동네엔 인터넷도 없냐?
그러나 그것은 헛소리도 농담도 아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무려 당시의 영상이, 의천검가주가 패배하고 그 현판이 가문의 무인들이 무릎 꿇은 가운데 베여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영상이 찍혀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누구 하나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이 그저 아직은 유명한 후기지수에 불과한 학생이 문주로 있는 작은 문파, '잠룡문'이라는 것에 더욱 크게 경악했다.
-김도진? 이름은 들어본 거 같은데.
-한국의 후기지수라고? 그 병아리 유치원에서 이런 괴물이 나왔다고? 거짓말이지?
후기지수. 심지어 학생 시절을 그 어떤 나라보다 '따듯한 온실'에서 보낸다고 알려진 한국의 후기지수가 벌인 일이라는 것은 앞서보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김도진은 십대에 A-1 자격증을 딴 괴물이라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A-1이라고 해 봐야 '화경(化境)'에 비하면 어린애만도 못한데!
경계를 넘어선 고수, 화경의 경지는 초절정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넌 일반인인 거냐? 잘 보라고! 영상을 보면 김도진도 검기를 쓰고 있단 말이다!
-뭐? FUCK!! 진짜잖아!
그리고 떠들던 이들은 영상 속 김도진이 옅지만,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검에 검기를 씌운 채 의천검가주의 검을 막았다는 걸 알았고 더욱 크게 소란이 일어났다.
열아홉에 초절정의 경지를 증명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들썩였는데 이제는 검기다.
근래 경계를 넘어서지 않더라도 검기를 쓸 수는 있다는 게 알려졌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경계의 문턱에 이른 이들이 비할 데 없이 수준 높은 무공의 도움을 '약간' 받아 가능하다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도진이 검기를 썼다는 건 세상이 또 한 번 뒤집어지기에 부족하지 않은 경악스런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도진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러 아예 폭발해 버린 건 의천검가의 현판을 베기 위해 걷던 순간의 일이다.
쿠웅! 쿠웅! 쿠웅!
도진의 걸음을 막기 위해 덤벼들었던 의천검가의 무인들이 하나둘, 근처에 이르는 순간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마치 경배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만드는 '어떤 무공'에 관해 공통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고.
-이거.. 천마군림보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맞아, 친구. 나도 마침 같은 생각을 했어.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환상 속에 있지만 그렇기에 동경할 수밖에 없는 전설의 무공.
그리고 절대의 상징.
-설마.. 김도진은 천마신공을 익힌 거야?
-헤이헤이헤이. 설레발치지 말자고. 천마신공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저게 말도 안되는 짓거리이긴 한데 저것만 보고 천마신공을 이야기하는 건 좀 성급하지.
사람들은 술렁였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그렇기에 시끄러워졌다.
그로 인한 소란은 이번의 사건과 겹쳐 대혼란을 만들어냈고.
-속보! 잠룡문주 김도진, 기자회견 일정 잡아!
전대미문의 관심 속에 기자회견 일정이 잡혔다.
* * * *
사건을 일으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것도 세상을 뒤흔든 이슈의 중심에 있는 김도진 본인이 기자회견에 참석한다는 소식에 해당 장소는 인파로 마비되어 아예 교통 통제가 필요없을 정도로 사람이 미어터지게 됐다.
허나 기자회견장에 들어설 수 있는 건 출입이 허락된, 모인 인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원들 뿐이었고 그들의 전에 없을 온 관심을 담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단상 위에 선 도진은 담담했다.
그 뒤로 잠룡문의 안주인이라 불리는 오성아를 포함한 핵심 인물들이 여럿 있었지만 질문은 대표로 선 도진에게 집중되었다.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의천검가가 현판값을 물어내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관한 걱정은 없으십니까?"
외국의 한 기자가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고.
"굳이 물어내라고 한다면 물어줄 용의가 있으니 빼놓지 말고 기사로 쓰셔도 됩니다."
하하하-
도진이 거기에 부드럽게 답을 한 것으로 회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심각한 분위기의 문답을 분명히 주고받아야 했지만 일단은 좋게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문답을 하기 전 참을성이 부족한 이가 그 질문을 던졌다.
"세간에서는 잠룡문주님이 당시 사용한 무공이 천마군림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혹시."
"잠룡문주님은 천마입니까?"
꿀꺽-!
누군가가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그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의 침묵이 긴장과 뒤섞인다.
도진은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아."
"후우우……."
도진의 부정에 침묵과 긴장에 의한 경직이 풀렸다.
하지만 그때.
"아직은, 아닙니다."
도진이 말을 이은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천마(天魔)라 불리게 될 사람입니다."
"우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