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분노했다.
분명히, 전에 없을 만큼. 앞으로도 과연 이렇게까지 분노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분노가 온몸을 채웠다.
슷-
하지만 그런 분노와 달리 이성은, 그리고 몸은 가장 완벽한 움직임으로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무흔잠영의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천마기가 스며든, 연신극기공으로 단련된 육체로 이문강의 하찮은 검을 멈추었다.
"아버지, 그러니까 야근은 적당히 하시라고 했잖아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와 비무대 밖으로 이동했다.
부축하던 손을 떼었으나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으셨다.
그 모습이, 또 한 번 도진의 심상(心象)을 흔들었다.
스윽-
그래서 조금 흔들린 무흔잠영으로 다시 비무대 위에, 이문강의 앞에 섰다.
두근-!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다.
평소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여 육체를 완벽히 조율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만큼 분노가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성은 지극히 차가우니, 마치 뜨거울수록 오히려 푸른 빛을 띠는 불꽃을 떠오르게 한다.
말했다.
"아버지가 좀 피곤하셔서. 내가 대신 비무를 할 거야. 불만 있나, 이문강?"
도진의 말에 이문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본능이 느끼는, 그러나 너무 거대하여 오히려 이성은 느끼지 못할 만큼의 공포에 굳은 탓이었으며 그로 인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신 비무대 바깥에서 이성을 유지하며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동근출이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믿기 힘든 일이었다.
김도진이 찾아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를 했다.
얕보지 않았다.
초절정의 고수임을 인정하였으며 심지어 그런 수준의 무인이 두엇은 더 찾아오는 상황까지 상정하여 대비를 했단 말이다.
그런데 뚫렸다.
방계도 아니고 직계. 심지어 소가주가 될 이문강의 거처이자 수련장이 있는 이곳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의천검가의 심처(深處)다.
그런 심처가,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쉽게 뚫려 버렸다.
정문에서부터 여기까지.
마치 이미 어디로 가면 가장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지 계산을 마친 것처럼.
앞을 막아선 의천검가의 무인들을 추풍낙엽으로 만들어 버린 무력과 그만한 세력의 망설임없는 집결도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루트를 확정하고 움직인 것은 그 이상으로 소름이 끼친다.
그걸 이미 확정할 수 있을 만큼 의천검가를 들여다보았다는 뜻이 되니까.
상황은 이미 상정을 넘어서 최악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최악에 얽매일 때가 아니라 최악을 풀기 위한 수단을 빠르게 찾아야 할 때다.
현상에만 집착해서는 거기에 매몰되어 죽을 뿐이다.
그러니까 동근출은 해결법을 필사적으로 고민하였고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어려운 수학 문제들이 으레 그렇듯, 답은 간단한 경우가 많았다.
'소가주가 김도진을 이기면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집단의 중심은 김도진이다.
그렇다면, 김도진을 패배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것으로 대부분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린 동근출의 시선이 이문강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전음으로 이야기하기도 전에, 마찬가지로 상황 판단을 끝낸 이문강이 말했다.
"이문강?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네?"
"오늘 부로, 너는 나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하. 교육을 좀 해 줄 필요가 있겠어?"
동근출이 말하기도 전에 이문강이 비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소란을 일으켰던 이들이 비무대 주위로 모였다.
의천검가의 구성원들, 그리고 김도진의 잠룡문과 관련자들이 모두.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도진과 이문강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건방진 새끼…….'
이성과 자존심이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기 위해 강한 척하는 이문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만 강한 척과 별개로 도진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이미 겪었으니까.
저놈은 분명히 초절정이며 방심하는 순간 대번에 패배할 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이문강은 속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렇기에 방심하지 않고.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기로 했다.
콰아아아아아-!!
의천검가의 독문무공이자 가전무공인 의천검공(義天劍功)의 내공심법 의천신공(義天神功)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이문강의 주위로 무형의 기세가 터져 나온다.
초절정에 이른, 그러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무가 직계로서 온갖 혜택을 받아온 이문강의 기세는 과연 대단했다.
그것만으로도 초절정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세.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꽈앙-!
폭음은 총알처럼 쇄도하는 이문강의 진각에서만 터진 게 아니었다.
이문강의 체내에서, 의천신공이 아닌 또 다른 내공이 폭발한 것이었다.
복룡공(複龍功).
그것은 기존에 운용하는 내공심법에 '더하여' 운용할 수 있는 신공(神功)이요 진무(眞武)다.
아직 세간엔 드러나지 않은, 근래에 획득한 의천검가 비장의 한 수.
이문강이 윤상미의 빙해에 당했던 바로 그 비무에서 운용하려 했던, 의천신공의 내공이 한기에 잠식당했을 때 역전의 한 수로 사용하려 했던 수.
그 한 수를 첫 수부터 사용한 것이다.
의천신공의 내공을 오롯이 육체의 강화에 사용하였다.
이문강이 타고난 재능, 압도적인 육체의 성능이 그로써 한계를 넘어선다.
그리고 여기에 복룡공의 내공이다.
한계를 넘어선 육체는 같은 초절정의 무인마저 압도하며 거기에 폭발적인 힘을 부여하는 복룡공의 내공으로 절초를 펼쳐낸다!
꽈아앙-!!
그 결과는 김도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제 아비가 당했던 것과 같은 그림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폭음에 도진이 딛고 있던 비무대가 박살나며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드드드드……!
그리고 그 충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낸 도진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내리쳐진 이문강의 거검(巨劍)을 막아내고 있었다.
'같잖은 새끼.'
두 손도 아니고 한 손으로.
마치 폼을,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한 그 자세에 이문강의 입꼬리가 비웃음으로 올라갔다.
카카카칵.
팔이,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주르륵.
입가의 피는 충격이 내장마저 상하게 했다는 증거이며.
뜨드드득…!
폭발적으로 증폭된 감각에 버티고 선 김도진의 온몸이 비명을 내지르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두면 내공심법으로도, 무림인이라 해도 고칠 수 없는 영구적인 손상이 남을 붕괴의 소리가.
좋다.
마음에 든다.
다른 수법을 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대로 짓눌러서, 무인으로서의 생명을 끊어 주마!
이문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주 약간의 여유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
흥이 식는 걸 느꼈다.
누구도.
그 누구도.
심지어 김서우마저 김도진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개같은 새끼들이!!'
이문강은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폭발하여 힘을 주었고.
드드드드…….
떨림이 심해질 뿐 단 한 치도 검이 내려가지 않는 상황에 외면했던 공포가 다시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걸 느꼈다.
'뭐…… 야.'
이해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눌렀고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육체가 붕괴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왜.
무너지지 않는 거지?
그렇게 공포로 묻는 이문강의 검을 마주한 도진은.
'가볍다.'
…분노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더 이상 방구석에 틀어박혀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세상에 나가야만 했을 때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걸 버티신 거지?'
라고.
어릴 적.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었을 때.
집이 그래도 좀 산다 싶었을 때엔 도진도 어려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그 경험의 한가운데 있었던 아버지는 과연 얼마나 절망하셨을까.
도진은 그때 아버지의 감정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한심한 학생 시절엔 애초에 그런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1년에 과연 몇 번이나 보았던가.
얼굴은커녕, 전화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1년에 몇 번, 몇 안 되는 얼굴을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 마디 말없이 용돈을 주곤 하셨다.
한 번도.
무너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뺑소니를 당했던 그날.
찰나의 순간에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지키기 위해 그 찰나의 순간 망설임없이 자신의 몸을 차 쪽으로 향했음을.
그런 아버지였다.
빛이 바래 색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음에도.
결국 한 번을 약한 소리를 하지 않으셨던 분.
도진은 그런 아버지의 속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할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아버지가 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으며 되지 않고선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한 번, 간접적으로나마. 그 일부나마 체험해 보았다.
드드드득……!
이길 수 없는 상대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으며 결코 바꿀 수 없다.
맞서는 순간, 무릎 꿇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온몸이 망가질 상황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무릎 꿇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그런 공포와, 결국 바뀌지 않는 미래에도, 모든 걸 잃게 될 상황에도 도망치지 않고 무릎 꿇지 않았던 아버지의 감정을.
짊어진 무게를.
'가벼워.'
…도진은 알 수 없었다.
드드드득……!
도진에겐 이것이 무겁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으며, 공포를 느낄 수도 없었다.
콰득!
그래서 화가 났다.
분노했고, 그 분노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오오오오오오-!!
그 분노에 천마기(天魔氣)가 용솟음친다.
억눌렀던 천마기가 폭발하고 연신극기공으로 단련된 육체가 대번에 비틀리고 상처입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되돌린다.
뚝.
길항하던 검과 검의 대결은 일방적으로 끝을 고하고.
"무."
뻐어어어억!!
도진의 주먹이 의천신공과 복룡공을 갈가리 분쇄하며 이문강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
이문강은 입을 쩌억 벌리고, 온몸으로 그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마저 갈가리 찢긴 듯.
도진의 주먹을 통하여 때려박힌 천마기로 인한 고통은 도저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빠악!
카앙!
빠각!
살과 뼈가 부딪치고 순간 검이 교차한다.
허나 그것은 '비무'가 아니다.
도진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일 뿐이며 그것은 일방적인 구타이자 집행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쌓이며 계속해서 증가한다.
이문강은 그 고통과, 고통이 더해지고 계속된다는 공포에 미치지도 못하고, 울부짖지도 못했다.
허락된 건 오직 한계없이 가해지는 고통에 소리없이 절규하는 것 뿐이었다.
도진은 그렇게 이문강에 대한 집행(執行)을 조용한 분노 속에서 계속해 나갔다.
이미 결정한 것이다.
바로 오늘.
이문강은 무인(武人)으로서의 생이 끝난다.
그리고 오늘의 집행은.
"멈춰라!"
이문강에서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