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첫 수업이 시작하기 30분 전 오전.
오늘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강거혁이 실습과 관련한 부분으로 집행부와의 조율을 위하여 찾아와 함께 차를 한 잔 마시는, 평범한 변수가 있었던 평화로운 일상.
그러나 그 평화는.
-아버님이 위험하셔.
나지윤의 연락으로 잠시 자취를 감추어야만 했다.
이문강이 수작을 부린 게 확실한 상황에서 도진은 당연히 가만있지 않았다.
김서우가 연호신공을 익히고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신공'이며 그나마도 아직 경지가 부족하여 안심할 만큼은 되지 않았다.
때문에 도진은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적용하였으니 이문강이 수작을 부리는 그 즉시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들어온 정보를 이야기해 주는 나지윤의 목소리는 심상치 않았고 도진은, 그 순간 결단했다.
"…강 교수님."
"그래, 집행부장."
도진의 진지한 목소리에 강거혁 또한 진지한 태도로 답했다.
"수업에 결석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구먼. 알겠네."
강거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가볍게 목례 후 집행부를 나섰고 휴대폰의 잠룡문도 간의 연락을 위하여 특별히 개발한 앱을 실행했다.
우우우웅- 우우웅-
도진을 따르는 소담과 상미의 휴대폰이 일정한 패턴으로 진동한다.
잠룡문에 이름을 올린 모든 사람들의 휴대폰이 같은 방식으로 울렸고.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도진이 말했다.
"지금부터 의천검가와 전쟁을 시작한다."
* * * *
의천검가의 본가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주변의 넓은 땅이 의천검가의 사유지이기에 서울의 중심인 것 치고는 그 앞을 왕래하는 이가 드물다.
의천검가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된 이들이 아니고서는 찾아올 일이 드문 것이다.
그렇기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으로, 소담과 상미, 클로에를 대동한 채 정문 앞에 선 도진은 그 앞을 지키는 의천검가 무인들의 모든 감각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의 조장이 도진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은 본가의 행사로 인해 외부인의 출입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굳은 얼굴로 앞을 막아서는 조장은 찾아오는 이를 막으라는 엄중한 명령을 받은 이문강 휘하의 무인이었다.
무력으로야 김도진을 막을 수 없겠지만 명분으로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도진이 그의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우웅-
휴대폰이 메시지를 하나 수신하여 진동한다.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도진이 말했다.
"본가의 행사."
"예. 본가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외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기밀입니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일반인을 소가주가 핍박하는 것이니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기밀이겠지요."
"……!"
"하지만 그게 행사라니. 의천검가가 아니라 오물검가라 해야겠군요."
오물(汚物).
그 모욕에 조장이 눈을 크게 뜨고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두웅…….
강제로 숨을 삼키게 만드는 압도적인 기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여러분들에게는 큰 죄가 없습니다.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경고하겠습니다. 나는 이곳을 지나갈 것이며, 그것은 당신들에게 있어 결코 항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오오오오오-!
천마기가 포효한다.
도진이 쥔 백설이 그 흉포한 기운으로 물든다.
"물러나세요. 지금부터, 내 앞을 막아선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선택을 한 무인으로 간주. 배제하겠습니다."
천마검공(天魔劍功), 효아(哮牙).
"……!!"
경고는, 말이란 건 듣지 않으려 하면 귀가 있다 해도 사람에게 닿을 수 없다.
후오오오오오-!
그러나 본능에 때려박히는 경고는.
"으아아아아악!!"
듣지 않으려 해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꽈아아아아아앙-!!
의천검가의 화려하고도 거대한 정문이 폭발하여 박살난다.
비산하는 조각과 내력의 폭풍이 몸을 날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무인들의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렇게 열린 길을, 도진이 당당하게 걸었다.
"습격이다!!"
대번에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한 무리의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의천검가는 그 체면상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사이렌을 울리는 대신 즉시 대응할 수 있는 대기조의 무인들이 나서는 식으로 침입자를 맞이했다.
"잠룡문주!"
그들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위에서의 지시를 받았기에 당황은 길지 않았다.
지시를 수행할 일이 일어날 확률은 희박하다 생각했는데.
'미친 건가!'
그저 꼭지가 돌아 버린, 명성이 높다 하나 아직 어린 잠룡문주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일로 자제심을 잃었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이 지시받은 일은 하나.
소가주의 일이 끝날 때까지 김도진을 막아서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어렵지도 않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잠룡문주가 명성이 높고 A-1의 자격증을 땄다고 하나 그들 또한 의천검가의 무력대다.
기껏해야 예쁘장한 여학생 셋을 데리고 왔을 뿐인 김도진을 길게도 아니고 얼마간 막는 일 따위, 어려울 것 없었다.
……라고 생각한 순간.
"음. 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듯 하구먼, 집행부장."
"강 노사님."
갑작스레 나타난 이는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얼핏 중년인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세월에 깎여나간 흔적이 켜켜이 쌓여 단단한 몸에도 불구하고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다.
'소, 소거인.'
그러나 누구도 그런 노인을 얕잡아 보지 못했다.
소거인(小巨人).
무림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한 고수이자 얼마 전 경계를 넘어섰을 거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 일대의 비무를 보여준 사람.
"태웅아."
그리고 소거인과 함께 온 축복받은 무골을 타고난 그의 제자 벽태웅.
"수업이 있을 텐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강거혁은 1교시의 수업이 있다.
벽태웅은 제자이기에 여러가지 이유로 강거혁의 수업을 듣지는 않지만 역시 다른 1교시의 수업이 있었음에도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강거혁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수업을 듣는 모범생이 일이 있어 불참한다고 하니, 교수된 사람으로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와 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자네에겐 갚아야 할 빚이 몇 개나 있었지. 하지만 도저히 자네가 나에게 부탁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성질 급한 나로선 기다리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쿵!
강거혁이 진각을 내딛는다.
그 작은 체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력(巨力)이 일대에 퍼져 나간다.
"이건 자네가 할 수 있는 부탁에 카운트 되진 않을 테니, 신경쓰지 말고 가게나. 급하지 않은가."
담담히 말하는 강거혁에게 도진은 길게 이야기하는 대신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서는 나아갔다.
그 뒤로 벽태웅이 함께 했다.
"어딜!"
쿠웅-!
앞을 막아서려던 의천검가의 무인들이었으나 땅을 울리는 진각과 기세에 멈추어야만 했다.
쿠구구구구…….
'이, 이게……!'
그리고 짓눌렸다.
소거인.
작은 거인.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찌 거인이 작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말이 된다는 걸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강제로 알게 되었다.
구우웅…….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분명히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다.
세월에 깎이고 깎여, 단단하지만 마모되어 버린 무인.
하지만 그 무인의 기세가. 쌓아온 세월의 무게가 일대를 가득 채우고 그들을 막아서고 있다.
그야말로 거인.
그들을 굽어보는 그 거인이 그저 한 번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에 도저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안하구먼. 누가 자네들을 문책하려거든, 지나가던 성질 더러운 쪼그만 놈이 시비를 걸었다고 하게나."
* * * *
강거혁이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을 막아 주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이문강의 수련장이 있는 의천검가의 깊은 곳에 바로 이를 수는 없었다.
그곳이 소가주가 머무는 곳인 만큼, 겨우 한 겹의 방어를 뚫은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또 한 무리의, 강거혁이 막아 주었던 이들보다 더 높은 경지의 무인들로 이루어진 의천검가의 무인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미친 거냐, 잠룡문주."
무시무시한 눈으로 도진을 노려보는 건 의천검가의 직계이자 정예 부대의 조장을 맡은 이제천이다.
그 경지는 초절정이며 그가 이끄는 부대의 구성원들 또한 절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도진의 남은 일행을 얕잡아 보는 것도 허물이 아닐 정도다.
서벅.
그러나 도진은 그런 이들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찰나조차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완전한 무시.
그에 이제천이 분노하려는 순간, 절묘하게 도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허나 그것은 이제천 때문이 아니었으니.
스슷-
그 어떤 무늬도 없으나 그래서 더욱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검은 무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도진의 뒤에 도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열한 무인의 선두에 두 명의 무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니.
"독마전주."
"예. 소지존."
"치우세요."
"존명!"
도진은 짧게 명하고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이 새끼들이……!'
개무시를 당했다 생각한 이제천과 휘하 무인들이 분노하여 무기를 빼든다.
'병신을 만들어 주마!'
무단으로 침입하여 공격했으니 팔 하나 정돈 잘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으로 내공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땅을 박찬 이제천은.
빠각.
"……!"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갈비뼈가 골절되어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그렇게 초입이라 하나 초절정의 무인을 단 한 수로 제압한 건 독마전주 위취련이다.
독마의 이름을 계승하여 이 시대에 짊어지고 있는 그녀의 무위는, 초절정의 무인을 단 한 수로 잠재우는 영역에 있다.
위취련을 시작으로 독마전의 무인들이 의천검가의 무인들을 추풍낙엽의 모양으로 만들며 휩쓸었다.
독을 쓰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의천검가의 정예 부대는 위취련을 중심으로 한 독마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대번에 길이 열렸고 그 길의 앞에서 소전주 위연서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도진을 맞이했다.
"길을 열었나이다, 소지존."
"……."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주지 않고, 그저 멈춤없이 걸었다.
'아아…….'
위연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 모습에, 오히려 감격하여 몸을 떨었다.
파르르…….
온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지존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소지존의 진면목을 영접하고 있다는 생각에 위연서는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소지존을 위한 길을 자신의 손으로 열었다.
이제 모두가 보게 될 것이다.
천마신교의, 시대를 뛰어넘어 그 이름을 계승한 천마(天魔)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 * * *
의천검가 소가주의 개인 수련장에 도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루트는 이미 나지윤에 의해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가는 길에 적지 않은 방해가 몇 번이고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내가 길을 열어줄게, 도진아."
그 장애물을 치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고 도진이 손을 쓸 일 또한 없었으니.
강거혁, 그리고 독마전에 이어 합류한 잠룡문의 문도들이 나서 주었으니까.
소담을 필두로 한 암산서가의 무인들이 서슴없이 의천검가를 적대한다.
"우, 우 명장! 미쳤습니까!"
"내가 소싯적에 좀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
우서진과 함께 나타난 우벽진 또한 통짜 쇠로 만들어진 무시무시한 맹호추를 망설임없이 휘두르며 의천검가의 무인들 얼굴을 새하얗게 질리도록 만들었고.
"한국과의 관계를 망칠 셈인가!"
"우리의 관계를 망치고 있는 건 당신들이다."
한국 지부에 머물고 있다 달려온 리쉬라를 포함한 엑소시아의 무인들 또한 그 무력을 사용하는 데에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들뿐이 아니다.
한낱 숭무고의 신입생들마저, 의천검가와 적대하는 데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미친……. 다들 미친 건가!'
의천검가다!
대한민국의 명문 무가이면서 동시에 정치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적대해서는 안 되는 가문이란 말이다!
한데 이게 무엇인가.
가진 게 많기에 더욱 조심하고 의천검가를 어려워해야 하는 이들이.
가진 게 없어 적대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야 할 이들마저.
그저 멈춤없이 걷는 한낱 작은 문파의 문주이자 학생 따위를 위하여 의천검가를 적대하고 있다.
제대로 된 명분조차 없는 상황에서!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그런 미친 자들에게 의천검가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낱 작은 문파의 문주의 걸음을, 단 한 걸음조차 늦추지 못했다.
그들은 평생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그그극…….
도진은 보게 되었다.
초절정 고수의 핍박에도, 무릎을 꿇지 않은 아버지의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