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김서우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며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빚에도 도망치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경우 '사직'이라는 형태로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건,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문강의 의도를 대번에 읽을 수 있었다.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큰 문제가 발생했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명문화하여 전달하지 않은 이문강이 문제겠지만 현실은 하청인 단강이 뒤집어써야만 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해결의 여지가 있다.
책임자로서 김서우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걸 아는 이문강, 의천검가 측의 '이해'와 '양보'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하지만 이문강은 그럴 생각이 없다.
목적이 김서우니까.
그 김서우를 어떻게 하기 위해 서슴없이 단강마저 부수려 들 것이었다.
때문에 김서우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사직하는 것을 택했다.
단강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리고 아들에 대한 앙심으로 자신이 고개 숙이길 바라는 이문강의 계획이 결코 성공할 수 없도록.
김서우의 선택에 이문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이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책임자였던 사람이 그 잘못을 회피하고 사과조차 못하겠다고요?"
"잘못을 한 건 이문강 대표님이지 않습니까. 예산에 변경이 있었다면 분명하게 서류로 전달을 하셨어야지요. 분명히 해야 할 부분을 하지 않고 구두로 전달했다고 우기면서 제 잘못이라고 하시면, 인정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까득-
말은 잘 한다. 그 아들 새끼를 닮아서.
이문강은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는 상황'임을 상기하며 그 열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 무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나는 분명하게 이야기를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억지에 불과합니다. 절차대로 진행하지 않은 사항에 관해 억지를 부려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내 명예를! 짓밟으시는군요."
맹수가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김서우의 당당함은 흔들리지 않았다.
"명예를 짓밟고 있는 건 스스로이지 않습니까. 억지를 부리지 마십시오."
"억지를 부리는 건 부장님이지 않습니까."
즉답한 이문강이 숨을 토해내고서 말했다.
"……그래요. 김서우 부장님은, 무림인이시라고 들었습니다."
"……."
"서로가 평행선이니, 답은 하나밖에 없군요. 비무를, 신청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유아는 그렇게 생각했고 대부분 같은 생각일 것이었다.
무림인이 무림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니 김서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일류의 문턱조차 밟지 못한 김서우는 무림인이라기보단 샐러리맨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 김서우에게 초절정의 경지를 증명한 이문강이 비무를 신청하다니.
그러나.
"좋습니다. 그 비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문강이 준비한 것을 더 풀어놓을 것도 없이 김서우가 그 비무를 받아들여 버렸다.
'어째서!'
한유아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김서우는 그 답을 담담히, 그러나 강렬한 목소리로 비열한 웃음을 감추는 이문강에게 말했다.
"현장의 책임자로서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 비무에 임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로써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이 대표님이 이기셔도, 그것이 잘못된 것에 대한 증명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이문강은 이가 갈리는 것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정말로,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그래서 이문강은 단단히 준비했다.
'어디, 정말로 네 생각대로 되는지 보자고.'
그렇게 비무가 성사되어 버렸다.
* * * *
상황을 지켜보던 한유아는 술렁이는 침묵 속에서 동떨어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매몰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억지로 반복하여 답이 가려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선명한 답은 외면하는 마음에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래되지도 않은, 바로 이틀 전 민지서와의 통화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저는, 한 대표님이, 당당하게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서야.
-죄송합니다. 술을 마셔서, 자제심이 흐트러져 있어서 실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대표님, 제가 흐트러지지 않게 바로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아는 민지서답지 않은 '칭얼거림'이었다.
민지서는 자신과 닮아서 어차피 안 될 것, 상대에게 부담만 주게 될 이야기 같은 건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무려 술까지 마시고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것도 다, 후배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인 걸까.
그리고 그 영향이…… 전화로 자신에게까지 감염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유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말았다.
- - - -
To. 잠룡문주
후배. 아버님이 이문강이랑 비무를 하시게 됐어. 지금.
- - - -
무어가 무언지 모르겠다.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머릿속에 한유아가 휴대폰을 들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일깨우려는 듯.
쾅-!
멀리서 굉음이 터졌다.
"아……?"
'…….'
그 모습을, 의천검가의 수석 장로 동근출이 기척을 감춘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
패룡 이문강과 강소기업의 부장 김서우가 비무대 위에 선다.
결코 비무에서 마주해선 안 될 조합.
이겨봐야 욕밖에 안 먹을 승부.
그러나 이문강은 여론을 못해도 진흙탕으로 만들, 김도진까지 그 진흙탕에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기에 서슴없이 비무대 위에 오른다.
'그래, 대처를 잘했다는 잘난 얼굴이지만 말이야.'
그림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눈앞의 짜증나는 인간은 자신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고 있겠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찌되었든 김서우가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사직함으로써 회피하려는 인간으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이문강은 진심으로 사과하면 일을 덮어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서우는 책임자로서 설령 불합리한 일이더라도 고개를 숙여 해결을 했어야 한단 말이다.
그러지 못한 김서우였기에 이 비무 또한 그렇게 정당화될 여지가 있다.
무자비하게 패배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굴욕적으로 무릎 꿇릴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문강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촬영되어 '유출'된다.
"시작!"
수석 장로 동근출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천검가의 무인 한 명이 크게 외치고 비무가 시작되었다.
김서우는 나름 괜찮은 자세를 잡았으나 초절정에 이른 이문강의 앞에선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행동이었다.
꽈아앙-!
"크읍."
내리치는 이문강의 검을 김서우가 의천검가에서 대여해 준 검으로 받아낸다.
한 팔로는 결코 막아낼 수 없는 거력(巨力)에 왼손으로 검면을 받쳐 겨우 버틴다.
…아니, 김서우가 '버틸 수 있도록' 한 공격이다.
이문강의 두터운 팔뚝이 거대한 검을 통하여 힘을 가한다.
검에 힘을 가하는 이문강의 온몸은 빈틈 투성이지만 김서우는 그 빈틈을 공략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필사적으로 다하고 있는 힘을 조금이라도 나누는 순간.
김서우는 이문강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었으니까.
그래.
그것이 이문강이 바라는 그림이었다.
논란이 될, 명백하게 하수이자 무늬만 무림인인 김서우를 다른 방식으로 이길 생각이 이문강에겐 없었다.
이문강이 그리는 그림은 오직 하나.
이렇게 검으로 우직하게 내리눌러 김서우가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릎을 꿇은 김서우를 '용서'한다.
-마음을 보았으니 이번 일은 저희 의천검가의 실수로 마무리짓겠습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까지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이문강은 계산한 것이다.
빌어처먹을 김도진의 명성에도 흠집을 내고 자제심을 잃게 만든다.
자제심을 잃고 덤비는 김도진이라면, 여기에 숨기고 있는 '진짜 실력'까지 드러낸다면 승기는 자신에게 기울 거라고 이문강은 생각했다.
그그그극-
이미 계획은 완성되었다.
남은 건 시간 문제, 김서우가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것 뿐이다.
그것뿐이었는데…….
그그그극…….
'…버틴다고?'
그 '시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분명히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짓눌리고 있는 놈이 한참을 지나서도 버티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절정에 오른 이문강은 분명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김서우의 내공량이 일류의 문턱조차 밟지 못한, 삼류나 겨우 면한 쓰레기라는 것을.
제아무리 현대의 무림이 퇴보했더라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감각마저 잃은 것은 아니다.
짓누르는 압력에 필사적으로 내공을 다하여 버티는 것도 모를 만큼 장님이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까 이문강이 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지금 일어나는 일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힘 조절을 했다.
김서우가 필사적으로 버티고 버티지만 서서히, 기필코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초절정에 이른 무인이 상대의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하는 힘 조절이다.
예외란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 이 허접 나부랭이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 것인가.
이문강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조금 불안해졌고.
드드드드…….
가하는 힘을 더했다.
콰드득-!
김서우의 검을 쥔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다.
검면을 받친 왼손으로 검날이 파고들어 피가 배어난다.
그그극……!
관절이 비명을 내지르고 온몸이 삐걱이며 이 이상 버티면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이 날 거라고 경고한다.
그그그그극……!
하지만 김서우는 힘을 풀지 않는다.
정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니 그 정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을 정도로 육체가 망가지지 않고서야 김서우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었다.
콰아아앙……!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사실은, 그 전에 이미 여러 번 들린 것이다.
허나 이문강은 그 이변에 돌릴 정신이 없었다.
애초에 무너졌어야 하는데 아직도 무너지지 않는 김서우에 불길함을 느끼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노려보았다.
'오냐, 그래. 평생 병신이 되어서 방구석에 처박혀 살아라!'
그리고 큰 잘못을 했던 5년 전과 마찬가지의 잘못을 반복하여 선을 넘는다.
뚜둑-!
실시간으로 김서우의 몸이 붕괴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쾌감이 되어 이문강의 뇌리를 뒤흔들었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턱.
그리고 그것이, 거짓말처럼 막혔다.
마치 거대한 절벽에 칼을 들이민 것처럼.
"아버지, 그러니까 야근은 적당히 하시라고 했잖아요."
'……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두 눈이 크게 뜨이고 검을 쥔 손의 힘이 느슨해진다.
여기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있을 리가 없는 놈이 비무대 밖에서, 김서우를 부축하고 있었다.
'뭐, 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에 잠시간 멍하니 서 있던 이문강의 앞으로 또 어느새.
스윽-
김도진이 섰다.
사아아……!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흠칫!
마치 가슴 속이 영혼까지 도려내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좀 피곤하셔서. 내가 대신 비무를 할 거야. 불만 있나, 이문강?"
상상이 따라가지 못할 공포가, 눈앞에 있었다.